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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 / 재커리 D. 카터

by mubnoos 2021. 10. 27.

 

 

케인스와 슘페터 중에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예전부터 난 슘페터였다. 케인스에게 기존의 것을 수리하거나 제어하는 느낌을 받았다면, 슘페터에게서는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거나 변형하는 느낌을 받았다. 수정과 간섭, 그리고 통제는 내가 선호하는 대안 혹은 가치들은 아니다. 창조적 파괴없이는 지속적인 대안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케인스보다는 슘페터를 더 선호하게 했다.

 

 

케인스는 정부, 그리고 슘페터는 기업의 역할을 강조했다. 케인스가 제안하는 정부의 개입은 내가 선거를 통한 정치참여를 제외하고는 따로 실천하기 힘든 내재적이고 수동적인 이슈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슘페터가 말한 기업혁신의 개념은 회사에 속한 내가 보다 실제적이고 능동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되었다. 창조적 파괴, 즉 혁신은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충분히 적용가능한 현실적인 개념이라고 공감하기도 했다. 최근에 경제, 환경, 정치 등의 이슈들에 솔루션으로 제기되는 Big State의 개념들도 슘페터가 예견한 것이 케인스의 것보다는 더 근접하다고 판단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슘페터의 이미지는 약간 너드같고 언더독같은 느낌이다. 반면에 케인스는 금수저 날라리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슘페터를 케인스보다는 더 선호하는 편이다. 아마도 이 책이 아니였다면 케인스에 대해서, 정치적_경제_공무원 정도로만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을 끝났을 것이 분명하다.

 

 

 

개인적인 느낌이다. 케인스가 비틀즈 같다면, 슘페터는 롤링스톤즈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케인스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읽으면서 그 '비틀즈'는 데이빗 보위 혹은 엘튼 존이 된다.

 

 

 

1) 케인스의 삶 Life

케인스의 성적 가치관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책은 시작하자마자 케인스의 커밍아웃으로 시작한다. 공무원 케인스의 사적인 삶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자유로운 진보 그 이상이다. 케인스는 만성적인 건강 문제에도 성적으로는 활기찬 동성애자(->양성애자)였다. 몇 년 동안 섹스를 한 횟수와 상대를 모두 기록해두는 습관은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키가 2m가 되는 케인스가 동성애를 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모습은 도덕과학을 강의하던 아버지와 청교도 가정에서 성장한 엘리트 계층 출신의 귀족 공무원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ㆍ리디아 로포코바

케인스의 사정을 알고 결혼한 리디아는 남편의 동성애적 바람을 수용했다. 아니 지원했다. 케인스의 동성애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리를 놔준다거나, 본인이 남성 코스프레를 하며 동성애적인 성행위를 시도했다는 것은 실험적 사랑의 대표커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케인스는 그렇다고 치자. 리디아는 왜 그랬을까? 리디아가 불임이기에 그런 것일까? 케인스는 그정도로 매력있는 남성이었나?

 

ㆍ비트겐슈타인?

'메이너드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친하게 지냈다.' 비트겐슈타인은 '과묵한' 동성애자였다. 케인스가 비트겐슈타인과 절친이었다면 그들이 썸을 탔을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케인스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개입하고 해결해야 하는 철학적, 과학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과 케인스가 MBTI검사를 한다면 정반대의 성향이 나올 확률이 클 것이다. 사실 둘의 특별한 교집합이 뭐였는지 전혀 모르겠다. 국적도 직업도 관심사도 일치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리송하다. 하지만 '메이너드는 비트겐슈타인과 친하게 지냈다.' 이 점은 여러 의미에서 흥미로운 점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는 게 맞는 거 같다.

 

 

 

2) 민주주의 Democracy

모든 역사적 사건은 돈이 흐르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돈이 흐르는 방향은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좌우한다. 다시 말해 경제의 방향과 선택은 민주주의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구가 무엇인지보다는,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경제를 바라보는 생각들이 대부분 케인스의 생각이 맞았을지 모르지만,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하이에크 아니였을까?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주인의 길' 선택하는 것이 승리의 형태가 아닐까? 하지만 불황은 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이며 정부가 돈을 풀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케인스의 주장대로 현재의 미국은 무제한 돈을 푼다는 양적완화 길에 다시 들어섰다. 이쯤되면 경제의 '윤회' 또는 '뉴트로'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바라보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차이는 바로 정부의 역할에 있다.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발상은 고통을 참고 견디라는 논리보다 언제나 인기있는 정책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경제시스템은 시장이 우선일까? 정부가 우선일까?, 보수일까? 진보일까?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한걸까? 케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을 예측하고 움직이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 구조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종국에는 모두다 죽는다.'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케인스가 한 말은, 결국 모두 다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의 태도가 아닌, 오히려 시도하고 개선하는 의지의 태도를 의미했다고 생각한다. 목적지가 있는 '마라톤'이 아니라, 목적지가 없더라도 한 순간의 '춤'으로써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우리의 시스템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지 않을까?

 

 

 

 

3) 돈 Money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질서의 중요한 의미는 금융권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JP모건 역시 유럽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했던 일을 파운드에서 달러로 통화만 바꿔서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무엇인가 움직인 것 같지만 사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달러 유동성 공급에 의존하는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근본적인 불안요소는 해결되었을까? 현재 미국의 재정정책이 유지 가능할까? 미국의 달러는 언제까지 기축통화의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까?

 

조개껍데기부터 금본위제로, 금본위제에서 달러로, 그리고 달러에서 비트코인으로 변화하는 통화화폐의 방향은 피할 수 있는 일일까? 투자의 귀재, 케인스가 살아있다면 과연 비트코인을 매수했을까?

 

 

 

 

 

 

 

 

 


 

 

 

감수자의 글

ㆍ케인지언이란 케인스가 주창한 경제학 이론에 공감하며, 이를 활용하여 세상에 개입하고 미래를 전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ㆍ2020년 2분기 미국 경제는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9.1%라는 충격적인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들어가며

 

ㆍ기숙학교 시절부터 메이너드는 줄곧 남성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서른여덟에 느닷없이 거의 열 살이나 어린 러시아 발레계의 스타, 리디아 로포코바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것이다. - 메이너드는 리디아와 불시에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도 심리학자 세바스찬 스프로트와 계속 관계를 이어갔던 것처럼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즉흥적인 관계를 선호했다?

 

ㆍ메이너드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친하게 지냈다.

 

ㆍ20세기 시민 가운데 케인스가 63년 인생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규칙적으로 자신을 재창조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ㆍ우리는 케인스가 불경기에 정부가 예산 적자를 감수하고 민간 부문이 할 수 없는 소비를 대신 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사실을 대학에서 배운다.

 

ㆍ케인스는 역설로 점철돼 있었다. 그는 무용수와 결혼한 관료이자 한 여성을 가장 사랑한 동성애자, 제국주의에 맞선 대영제국의 충직한 공무원이자 두 번의 세계대전에 자금 조달을 도운 평화주의자, 현대 민족국가의 지식구조를 마련한 구제주의자이자 경제학의 토대에 이의를 제기한 경제학자였다. 모순투성이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구원을 위한 일관된 비전이 있었다.

 

ㆍ케인스는 미국을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다. 별안간 성질을 내고 예민한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CHAPTER 01 케인스, 금을 구하러 런던으로 오다

 

ㆍ그는 과로와 운동 부족으로 코감기와 감기를 달고 살았다.

 

ㆍ금본위제라는 국제 통화 체제 전체가 위기에 처했다. 런던이 무너지면 세계 금융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ㆍ영란은행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중앙은행이었고, 이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에서 만든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모델이 됐다.

 

ㆍ국가는 사회에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될수록 경제활동을 더 많이 지원할 수 있었지만, 이 또한 그만큼의 화폐에 상응하는 금이 은행 금고에 있어야 가능했다.

 

ㆍ금 보유량이 줄면 영란은행이 금리를 높였고, 은행 예금부터 회사채까지 모든 것의 수익률을 높여서 사람들이 영국 통화로 돈을 보유하게끔 유도했다. 금에는 이자가 붙지 않았다. 금의 가치는 특정 화폐 단위로 영원히 고정됐다. 하지만 파운드화의 금리 인상이 예상되면 변덕스러운 투자자들은 금을 사서 프랑스 프랑이나 미국 달러로 재투자하는 대신 런던에 현금을 묶어 두었다.

 

ㆍ영국의 자본가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금융업자들은 갑자기 불안정해진 지폐 조각들을 국경 너머에서도 교환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산인 금으로 바꾸려 들었고 영란은행은 단 사흘 만에 금 보유량의 2/3를 잃고 말았다.

 

ㆍ금융시장이란 경제학자들이 교과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깔끔하고 질서정연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시장가격의 변동은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행위자들이 축적한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가려는 결함을 가진 인간의 판단에 불과했다. 시장 안정은 균형점을 찾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 정당성, 신뢰를 유지하려는 정치권력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됐다.

 

 

 

https://mubnoos.tistory.com/599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 존 메이너드 케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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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2 피로 물든 돈

 

ㆍ블룸즈버리 Bloomsbury Group는 완전한 성적, 지적 해방을 꿈꾸면서 급진적이고 사회 전복적인 행동규범을 다듬어 나갔다. 블룸즈버리 멤버는 그 누구도 소유의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당사자 모두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면 어떤 식의 관계도 적절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남성이 남성을 사랑할 수 있었고 기혼 여성도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이 원하는 누구와 원하는 만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부정직함만 빼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관계가 정당화되었다. 또한 충절을 이유로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은 우상 숭배자이자 윤리적 진보를 방해하는 걸림돌 취급을 받았다.

 

ㆍ블룸즈버리의 애정사는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놀랍도록 안정적인 공동체였다.

 

ㆍ선이란 신비로운 관념이나 교회 권력이 정한 오랜 칙령이 아니라 자연 세상의 일부라는 것이다. 심지어 벤담은 여러 법과 행동을 통해 발생하는 쾌락의 양을 정확히 산출하는 도덕적 '계산법'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ㆍ선함은 측정할 수 없으며 자연계의 어떤 일련의 사실로부터 유추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만 직감할 수 있는 단순하고 정의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는 근본적인 속성이었다.

 

ㆍ케인스와 스트레치는 멤버들에게 동성애의 도덕적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사도들 사이에서 성적 혁명을 이끌었다.

 

ㆍ케인스는 스트레치의 연인을 채가는 버릇이 있었다.

 

ㆍ그가 킹스 칼리지 시절에 쓴 논문들을 보면 군데군데 붙어 있는 메모지가 눈에 띄는데 거기에는 1901년부터 1916년까지 케인스가 가진 수십 건의 성관계를 집계한 것으로 보이는 표가 연필로 그려져 있다. 네 줄짜리 은밀한 통계 명단이나 상대를 만난 장소가 표기돼 있다.

 

ㆍ그는 실제로 은밀한 이중생활을 했다. 그는 사도들이나 블룸즈버리 멤버들과는 자신의 성생활을 터놓고 말했지만 국가 지도자들이나 재무부 관리, 외교관들에게는 자신의 연애 관계를 철저히 함구했다.

 

ㆍ케인스는 보수당을 솜씨 좋게 비난하면서 금세 유명해졌다. 그는 자유당을 합리적인 탐구, 보수당을 억압적인 전통과 연결시켰다.

 

ㆍ자유시장은 전쟁 중인 국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치였다.

 

ㆍ거시경제라는 용어는 미국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후기 연구 내용을 전파하기 시작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탄생했다.

 

ㆍ돈이라는 것은 단지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매기는 수동적인 힘이 아니었다. 돈에는 그 자체로 능동적인 힘이 있었다.

 

ㆍ1914년 8월에 금융 위기가 시작되면서 케인스는 돈이 곧 권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ㆍ원조 관계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JP모건이었는데 회장은 존 피어폰트 모건 주니어는 돈을 정치권력으로 바꾸는 요령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친영파 인사였다. 그와 JP모건은행은 미국에서 영국의 채권 발행 및 상품 구입을 대신해주는 독점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이 미국에서 구매한 상품의 절반 정도를 JP모건이 수입했고 그 비용의 1%를 수수료로 받았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중립적 입장을 표명했지만 모건은 전쟁 덕분에 자금 대출과 구매 수수료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고 있었다. 영국의 미국 상품 구매량이 증가하자 JP모건은 구매대행 수수료로만 3,000만 달러의 순이익을 벌었다. 모건은 이런 식으로 대서양을 사이에 둔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초당적 힘을 가진 미국의 비공식 외교 기관이 되었다.

 

ㆍ영국 정부는 더 이상 외교 문제를 미국과 협상할 입장이 아니었다. 구걸이 필요했다.

 

 

 

 

 

 

 

 


CHAPTER 03 실망으로 점철된 파리평화회의

 

ㆍ우드로 윌슨은 대전의 승리자 중 유럽이 자초한 대혼란이 재발되지 않도록 국제연맹이 외교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비전으로 제시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ㆍ케인스는 영국 대표단 보고서에 '독일의 젖을 짜내려면, 일단 독일을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썼다.

 

ㆍ케인스가 인생에서 복잡하게 뒤얽힌 돈과 숫자들을 마주치면 으레 그랬듯이 배상금을 둘러싼 갈등 역시 실상은 숫자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의 의미, 정치적 발전의 한계, 인간 자유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ㆍ영국은 사실상 독일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자신들을 위한 간편한 자금원을 만들려고 했다.

 

ㆍ케인스는 던컨 그랜트에게 보낸 편지에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윌슨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사기꾼이더군.'

 

독일의 배상금과 연합국의 전쟁 부채는 당대 가장 중요한 경제 이슈였고, 그 중대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와 분리될 수 없었다. 시장경제란 국가와 무관한 채로 그 자체의 원칙에 따라 운영될 수 있는 독립된 영역이 아니었다. 무역의 리듬, 그 논리와 메커니즘은 정치권력에 의해 정의되고 지원되어야 했다. 배상금과 연합국 간 부채 문제를 둔 고전 끝에 그는 긴축재정, 즉 정부가 지출과 부채 상황을 줄임으로써 경기 침체를 타개할 수 있다는 원칙을 평생 배척하게 되었다. 이제 케인스는 정부가 과도한 부채를 떠안게 되면 국민들의 삶의 질이 낮아지므로, 빚을 갚는 것보다 차라리 빚을 갚지 않기로 선언하는 편이 낫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CHAPTER 04 평화의 참담한 결과

 

ㆍ불평등을 토대로 한 축적의 원리는 전쟁 전 사회질서와 당시 우리가 이해했던 진보의 중요한 일부였다. 그 원칙이 이제는 그때의 부를 재창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전체 인구 중 아주 소수의 사람이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들만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전쟁은 모두에게 소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금욕의 덧없음을 일꺠워 주었다.

 

ㆍ노예제가 폐지되면서 노동 비용이 상승한 것은 사실이었다.

 

ㆍ전쟁 부채는 탕감되어야 하고, 배상금 청구는 완화되어야 하며, 채권자가 아닌 국민들의 요구가 우선시되는 국제 협력체제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케인스의 신념이었다. 번영은 현명한 투자와 고된 노력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었다. 오직 정치적 리더십만이 진보에 필요한 확신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었다.

 

ㆍ경제적 불만은 민족적 적대감으로 이어진다.

 

ㆍ케인스는 인구 과잉은 번영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지만 나날이 풍요로워진 시대에 성장한 사람으로서 버크와 달리 민주주의를 통해 더 여유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의 전통과 관습은 예술과 사상이 만개할 여건을 마련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시험대에 올라와 있지만 아직까지 스스로에게 불명예를 일으키지 않았다.'

 

ㆍ케인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더 품격 있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경제학이 할 일은 그런 품격 있는 것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었다.

 

 

 

 

 

 

 

 

 


CHAPTER 05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돈의 세계로

 

ㆍ학부생 때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가장 큰 야망은 재무부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원고는 1992년 마침내 <논리철학논고>라는 제목으로 출간했고 언어, 논리, 궁극적 진실 간의 관계를 독특한 방식으로 도출해냄으로써 영어권 국가 전체에 철학적 혁명을 일으켰다. 비트겐슈타인은 '사고의 한계를 긋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는 한계의 한쪽 끝에는 참된 지식의 문제가 있고 또 다른 반대편에는 그저 허튼소리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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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 논고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가 왜곡되어서 만들어진 가짜 문제(pseudo problem)이다. 형이상학은 거창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말장난일 뿐이다. 우리가 철학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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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세상에는 의미 있게 탐색하고, 논의하고, 논쟁할 수 있는 몇 가지 진실, 즉 지성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비튜겐슈타인의 생각이었다. 그 영역은 본질적으로 경험이라는 과학으로 밝혀질 수 있는 사실의 세계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관심을 두는 선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은 거의 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의 바깥에 있다. 심지어 논리도 언어가 가진 내부 구조의 일부일 뿐이다. 아무도 논리 없이 무엇인가를 의미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철학자들이 논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또한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불가사의한 점이다.

 

ㆍ케인스는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현재에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은 향후 일어날 사건들에 따라 정당화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상황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재에 할 행동을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케인스의 결론은 정교한 확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ㆍ합리적인 것과 옳은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ㆍ<확률론>의 핵심은 계몽주의 시대에 과학적 합리주의를 확률과 불확실성에 적용해서 합리성 그 자체에 깊은 진실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작업은 사실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언어로 표현하려는 것이므로 말 그대로 터무니 없는 노력이라고 일축했다.

 

ㆍ케인스는 도박도 즐겼는데 경마장에서 조랑말을 가지고 노는 것과 주식투자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를 두지 않았다.

 

ㆍ케인스가 자신의 투자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에 어떤 전략적 결정을 내리도록 자문한 적은 없었다.

 

ㆍ리디아로 인해 케인스의 성적 가치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끌렸던 일을 기억해보면 그는 이제껏 열정적인 게이로 살아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여성에게 홀딱 빠진 것이다. 다만 이들의 관계는 모두 상당히 파격적이어서 남성은 파트너의 합의에 따라 결혼 후에도 동성연애를 계속할 수 있었다. 케인스는 리디아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지만 일부일처제로 넘어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리디아는 케인스의 사정을 알고 있었고 연애 초기에는 애인의 새로운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해 다리를 나주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리디아는 또한 남성용 잠옷 두 벌을 사거나 골프복을 입고 케인스를 유혹하기도 했다. 손가락과 입을 통한 다양한 시도는 리디아와 케인스 모두에게 성공적이었다. 케인스는 리디아와 사랑에 빠지고도 2년 동안 여전히 세바스찬 스프로트와 야릇한 시간을 보냈다.

 

ㆍ평화를 되찾은 초기에는 인플레이션이 어디서든 일어났다. 미국, 프랑스 독일 모두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돈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ㆍ전쟁 전에 확립되었던 금본위제가 그 절정에서 붕괴되었기 때문에 다시 그 시스템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는 기회로 여겨졌고, 심지어 세계대전도 파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중명했다. 케인스는 저명한 은행가들에게 파운드화의 금 환산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더 영광스러운 대영제국을 확실히 만드는 국격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ㆍ더 수준 높은 런던의 고위층은 런던이 전쟁을 겪으면서 월가에 넘겨준 금융 파워를 되찾으려면 영국에 투자하는 것이 미국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영국 돈이나 영국 부채에 투자한 돈은 어떤 식으로도 손해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국 정부가 세계 금융시장에 증명해야만 했다.

 

ㆍ"종국에는, 모두가 죽는다."

 

ㆍ케인스는 연설에서 그가 새롭게 고안한 통화 이론을 강하게 제시했다. 각국이 자국 통화의 가치를 재평가해서 디플레이션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영국의 번영을 위해 국제 무역의 흐름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러 대비 파운드 가치가 강세면 영국 상품이 더 비싸지고, 그러면서 미국 시장에서 인기가 떨어지는 반면에 파운드가 약세일 때는 상품 가격이 더 저렴해지면서 인기는 높아지게 된다. 자유무역에 있어서는 통화 가치의 재평가가 관세와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CHAPTER 06 사회주의로의 입문

 

ㆍ케인스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이상주의자라는 점이다. 지적인 이론이 어리석은 이론을 압도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모두에게 폭넓은 혜택을 주는 개혁을 기득권이 거부하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웠다. 게다가 케인스는 사회적 서열 꼭대기에 기득권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는 한 오류가 있을지라도 기존 시스템을 선호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경제적 해악 중 다수는 위험, 불확실성, 무지의 결과로 생긴다. 좋은 환경이나 능력을 타고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불확실성과 무지를 이용할 수 있고 대기업들도 똑같은 이유로 큰돈을 거머쥘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부의 불평등이 생긴다. 게다가 실업, 실망스러운 사업 결과, 효율성과 생산성이 저하되는 원인도 바로 이런 요소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개인의 영역 밖에 있다. 어쩌면 병을 악화시키는 것이 개인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다.

 

ㆍ케인스는 자유방임주의가 다른 사상으로 대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믿었다.

 

ㆍ금본위제만 부활하면 그런 호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바보이자 장님이다.

 

ㆍ금과 관련된 문제는 단순히 실업뿐 아니라 국제 권력이 결부돼 있었다. 전쟁 전에 영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금융 시스템을 관할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그런 지위를 누렸다. 또한 연합국들이 여전히 지고 있는 막대한 전쟁 부채로 인해 금이 이미 유럽에서 미국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미국의 방대한 금 보유고는 국제 경제에서 미국에 커다란 자유를 부여했다. 미국이 어떤 결정을 하든 금이 고갈될 일은 거의 없었다. 만약 영국이 국제 무역에서 환율을 고정하는 금본위제로 복귀한다면 미국 연준이 어떤 조치를 취하든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영국은 국제 금융 질서에서 지위가 강등될 것이다. 만약 미국이 그들의 달러화 가치를 내린다면 영국은 그에 따라 파운드 가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반대로 미국이 통화 가치를 높이면 영국도 높여야 할 것이다.

 

ㆍ케인스는 궁극적으로 그의 대표적 정책 공식이 될 내용을 제안했다. 금본위제와 결별하고 비전통적인 좌파 개혁을 이행해서 계층 갈등을 피하는 보수주의적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칠은 케인스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그가 기득권이나 부유층과 결탁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ㆍ처칠 또한 금본위제로 복귀한 것이 그의 공직 경력에서 가장 중대한 실수라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그는 1930년에 이런 말을 했다. "다들 제가 역대 최악의 재무장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는 그 말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전 세계가 만장일치를 본 거죠."

 

ㆍ매카시즘McCarthyism : 1950~1954년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공산주의 선풍

 

 

 

 

 

 

 

 


CHAPTER 07 대공황

 

ㆍ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는 1920년대 중반에 상대적으로 낮았던 금리 수준을 계속 유지해서 기업들이 저금리로 빌린 돈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신기술과 생산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1924년에 일반 은행들이 기업체에 자금을 대줄 수 있도록 연준에 돈을 빌릴 때 청구하는 이자율이 3% 선까지 인하되었다. 세계의 투자자들은 월가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ㆍ연준의 할인율은 6%로 엄격히 정해져 있어서 이제 12%로 치솟은 은행권 이자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고, 그 사이에서 수익을 창출할 여지가 많았다.

 

ㆍ국제적 금본위제는 기본적으로 달러를 기준으로 했다. 미국은 전쟁을 기점으로 막대한 양의 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다른 나라의 통화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ㆍ금융 불안이 국제 경제에는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1923년에 하이퍼 인플레이션 위기를 겪은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경제는 미국의 돈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들어 오는 대출금이 고갈되기 시작하자 두 나라의 은행 시스템도 무너졌다. 이런 사태는 1929년 여름에 미국 연준이 금리 인상을 단행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ㆍ자본주의 자체는 적어도 기원전 3천 년 바빌로니아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정부의 창조물이었다. 케인스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와 그와 관련되 경제 관행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빌로니아에서 발명되었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미 수준 높은 발전을 이뤘다.

 

ㆍ돈은 지역 상인들이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한 관습이 아니라, 문자, 도량형 등 국가가 만든 다른 발명품과 함께 등장한 정교한 통치 도구였다.

 

ㆍ케인스가 말하는 투자란 주식이나 채권에 자금을 투입하는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사업에 돈을 투입하는 투자를 의미한다. 즉 생산을 전체적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거나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이다.

 

ㆍ케인스는 중앙은행은 정상적인 상업 활동이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붕괴되지 않도록 금리를 조정해서 물가 안정을 주도면밀하게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ㆍ케인스에게 금은 수 세기 동안 경제적 선의를 실천한 원천이 아니라, 자유방임주의와 번영에 대한 위험한 미신을 조장한 보수주의적 장치의 일부일 뿐이었다. 중앙은행은 국제무역의 지속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상을 책임져야 한다. 즉, 물가는 물론 국가의 고용 수준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ㆍ오너십과 경영을 분리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긴장과 반목을 조성할 가능성이 높거나 확실하므로 인간관계의 악이라 할 수 있다.

 

 

https://mubnoos.tistory.com/179

 

광기, 패닉, 붕괴 – 금융위기의 역사 / 찰스 킨들버거

Manias, Panics and Crashes – A History of Financial Crises by Aliber, Robert Z & Palgrave Macmillan 제3판 로버트 솔로의 서문 귀무가설 null hypothesis 찰스 킨들버거의 서문 경제학은 천천히 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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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8 불사조 케인스

 

ㆍ금융적 딜레마는 더 이상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해법을 가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금융이란 위대한 지식 논객들도 위대한 진리를 찾아 나가야 하는 어렵고 복잡한 영역이었다.

 

ㆍ일반인들은 더 이상 지폐를 금으로 바꿀 수 없었지만 루스벨트가 달러와 금의 연관성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달러화 가치는 사실상 여전이 금값에 매여 있었다. 재무부가 점차 더 높은 가격에 금을 구입하면 투기꾼들이 정부가 좀 더 높은 가격이라도 매입을 계속하리라는 기대감 속에 금을 사게 될 테니까 금의 시장가격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루스벨트의 계획이었다.

 

 

 

 

 


CHAPTER 09 희소성의 종말

 

ㆍ케인스에게 대공황은 고전학파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였다. 경제에는 자기정화 능력이 없었다.

 

ㆍ케인스에게 고전적 이론이 가진 가장 큰 취약점은 공급이 곧 수요를 창출한다는 말로 요약되는 세이의 법칙이었다. 아담 스미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세이가 주창한 이 법칙은 케인스가 고전적 이론에 대해 갖고 있던 세 가지 문제, 즉 1) 희소성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요인의 강조, 2) 시장의 자정작용, 3) 비자발적인 실업은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한데 엮여 있었다.

 

ㆍ세이의 법칙에 따르면 사회에 소비되지 않는 수입은 없어야 했다. 신제품이 공급되면 그 자체로 수요가 창출되므로 생산량이 증가되면 지불과 소비가 더 활발해져 균형을 맞추는 경제 시스템이 자동으로 구현될 수 있었다. 상품 생산자가 구매 가격을 수용하고 그 수입을 임금이라는 방식으로 근로자들에게 이전하면 사회에는 그가 생산한 가치와 정확히 일치하는 양의 새로운 수요가 창출될 수 있었다. 근로자들의 임금은 다른 상품에 쓰이게 되고, 그러면 경제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총수요 중 결핍된 수요는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따로 챙겨두는 저축도 또 다른 형태의 소비였다. 저축은 미래의 소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ㆍ과도한 저축 가능성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을 낳을 것이다. 근로자들은 가진 돈을 전부 소비하지 않으므로 상품과 서비스의 공급량은 그것에 대한 수요를 초과할 수밖에 없다. 생산자들은 생산량을 줄이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방식으로 이에 대응할 것이다. 그러면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면서 아무도 신규 고용과 생산 확대에 투자하지 않는 나쁜 균형을 낳을 것이다. 실업은 저기능 경제의 고정적 요소로 눌러앉는다.

 

ㆍ사실 대공황을 만든 것은 돈 그 자체였다. - 통화경제란 본질적으로 미래에 대해 변화하는 관점이 고용 수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제이다.

 

ㆍ케인스는 돈을 다양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 정보를 전달하는 메커니즘이자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소유한 물질의 가치를 안전하게 판단하게 하는 가치의 저장고로 인식했다. 고전주의 경제학은 돈을 그림 같은 고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 케인스는 돈이 경제적 가능성에 대한 서사를 창조한다는 측면에서 영화나 소설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돈의 중요성은 기본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에서 비롯된다.'

 

ㆍ현대 금융 시스템은 두려움을 고통으로 바꾸는 돈의 능력을 크게 증폭한다.

 

ㆍ케인스가 거의 20년을 스스로 투기꾼이 되어 그 과정을 관찰해보니 실제의 모습은 이론과 달랐다. 사람들은 다양한 기업 가치에 투자하지 않았으며 그저 다른 투기꾼들의 판단에 따라 자금을 베팅했다.

 

승자가 되려면 개인적으로 예쁘다고 판단하는 얼굴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봄으로써 다른 참가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얼굴을 골라야 한다.

 

ㆍ케인스는 인간의 본성을 자신이 믿는 대로 인식했다. 즉 인간이란 조금은 이기적이고, 약간의 두려움이 있으며, 사회 발전에 관심이 있고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꺾어버릴 수 있다고 여겼다.

 

 

 

 

 

 

 

 

 

 


CHAPTER 10 혁명의 도래

 

ㆍ세계 최초의 대량 생산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1945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ㆍ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모건 가문 같은 부유층 가족들에게 새로운 세금, 규제, 감사인 등 강력한 족쇄를 채웠고 이 시스템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미국 경제를 전례 없는 속도로 성장시킨 것은 금융 귀족들의 뛰어난 천재성 덕분이 아니라 케인스가 주장했던 대중의 구매력 덕분이었다.

 

ㆍ1932년에 하버드대 경제학부는 그때까지 학부 역사상 가장 눈에 띄는 교수 채용을 했는데, 바로 오스트리아의 보수적 귀족으로 승마 장갑을 끼고 강의하는 것으로 유명한 조지프 슘페터를 영입한 것이다.

 

 

 

 

 

 


CHAPTER 11 전쟁과 반혁명

 

ㆍ네 가지 기본 자유권

1) 언론과 표현의 자유

2) 종교의 자유

3)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4) 공포부터의 자유 (전쟁)

 

ㆍ인플레이션이 닥치면 정부는 대개 금리 인상으로 대처했다. 대출을 더 비싸게 만들면 기업들은 대출을 줄이게 되고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근로자들을 해고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물가 하락을 초래한다.

 

ㆍ수년간 인플레이션 옹호자라는 불명예를 입은 사람으로서, 치솟는 전시 물가와 싸우는데 케인스만큼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케인스의 그런 노력에 미국의 재계 엘리트만큼 적대적인 집단도 없었다.

 

 

 

 


CHAPTER 12 좋은 삶을 위한 열사

 

ㆍ하이에크의 <노예의 길>

 

ㆍ파시즘은 근본 원인은 실업이었다. 실업은 쉽게 무력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과 분노의 근원이었다.

 

ㆍ케인스는 그가 젊었을 때 그렇게 옹호했던 금본위제를 통한 자유무역이 세상을 휩쓴 디플레이션의 주범이라고 믿게 되었다.

 

ㆍ케인스는 금본위제가 붕괴된 이유는 그것이 국가들을 디플레이션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라고 기존 주장을 고수했다.

 

ㆍ케인스는 어떤 무역방식이든 그것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비결은 흑자 국가, 즉 국제사회의 주된 채권국들이 무역수지의 균형을 맞추는 조정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적자를 내는 국가나 계속 흑자를 내는 국가를 벌할 수 있는 국제적 권력기관이 필요했다. 이는 곧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돈을 내게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ㆍ케인스는 영국 국민들을 파멸에서 구하기 위한 소임을 다했다.

 

ㆍ뉴턴 이후로 세계 정치와 지적 발달에 케인스만큼 심오한 영향을 미친 유럽인은 없었다.

 

 

 

 

 


CHAPTER 13 보수 특권층의 반격

 

ㆍ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케인스에게 붙은 자유주의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기 위해 로크, 흄, 스미스, 버크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하이에크의 지적 여정에 동참해 몽페를랭에 모인 많은 학자는 본인들을 18세기 불꽃의 수호자가 아닌 독창적인 교리의 창시자로 간주했으므로 "신자유주의"라는 별칭을 채택했다.

 

https://mubnoos.tistory.com/1394

 

노예의 길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서 문 ㆍ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공개적으로 작은 정부를 버리고 큰 정부를 추구하겠다고 천명하고 재정적자의 누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재인 케어' 등의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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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풍요로운 사회에 가려진 민낯

 

ㆍ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고서를 좋아했다.

 

ㆍ케인스는 뉴턴을 '우리의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불렀고 여기서 '우리'란 케임브리지 사람들을 말했다.

 

ㆍ뉴턴은 광기 어린 열정으로 통찰력을 얻은 후 그의 창조적 발견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공식 언어로 신중하게 새로운 지식을 제시했다.

 

https://mubnoos.tistory.com/389

 

뉴턴의 프린키피아 / 정완상

제1법칙 - 관성의 법칙 물체에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현재의 운동상태를 유지한다. 제2법칙 - 가속도의 법칙 운동상태의 변화는 외부 힘에 비례한다. 외부힘 = 질량 x 속도 제3법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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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케인스는 투자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비경제적이고 불필요한 사업들에 착수하지 않고는 더 이상 투자를 이끌 방법이 없을 것으로 믿었다. 투자 활성화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대공황 때의 실업률과 빈곤을 낳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근로자들이 늘어난 여가 시간, 더 많은 휴일, 단축된 근무시간을 더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황금기가 시작될 것이다. 투자할 만한 프로젝트가 없으면 근로자들이 너무 장시간 일하면서 돈을 저축할 필요도 없어진다. 20세기 들어 생긴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려는 트렌드는 대공황 시기에 정규직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까닭도 있지만 점점 더 상황이 좋아졌다.

 

 

 

 

 


CHAPTER 15 끝의 시작

 

ㆍ케네디에게는 시대를 초월해 정치 브로커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돈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ㆍ1930년대 당시 연준은 은행과 연방정부 모두에 저금리로 값싼 대출 정책을 유지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은 금리 조정보다는 재정 정책 그리고 전쟁 중에는 물가 통제로 관리되었다. 1937년부터 1947년까지 연준은 1% 할인율을 유지했고 1942년부터는 제2차 세계대전 채권의 금리를 낮추기 위해 재무부와 함께 통화 정책을 공개적으로 조정했다. 심지어 전쟁 이후 물가 통제가 사라지고 물가가 잠시 치솟았을 때는 고금리 정책과 그로 인한 실업으로 물가 인상과 싸우려는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1951년 말까지도 할인율은 여전히 1.75%에 불과했고, 연준 이사회는 미국의 정부 부체에 예측 가능한 특정 이자율을 고정하는 데 전념했다.

 

ㆍ케네디 대통령이 부딪친 가장 큰 걸림돌은 균형예산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닌 사회정의를 지지하는 진보주의자였다.

 

ㆍ1960년대까지 미국의 최고 경제학자들은 모두 케인스주의자였지만 케인스 경제학을 국제적인 사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인스와 케인스주의는 개별 국가가 불황에서 벗어나거나 실업과 인플레이션을 조정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일련의 전략으로 활용도가 엄격히 제한되었다.

 

ㆍ1960년대 말에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그 이름이 대표했던 철학 사상과는 괴리된 건조하고 기술적인 경제 이론이 된다. 워싱턴과 학계에서는 케인스주의라는 단어가 매카시즘이 한창이던 때 가졌던 체제 전복적 의미를 더 이상 함축하지 않았다.

 

 

 

 

 


CHAPTER 16 19세기의 부활

 

ㆍ프리드먼은 자유란 인간의 자치 능력이 아니라 각 개인의 시장 활동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역할은 자유로운 시장 자본주의에 필요한 기관들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ㆍ프리드먼은 책에서 '자유시장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주장은 자유 자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자유시장'은 경제적 자유의 체계이자 정치적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ㆍ케인스주의는 두 번이나 실패했다. 그들은 1930년대에 대한 불충분한 데이터를 토대로 판단을 내렸고, 전후 미국 경제의 실제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했다. 프리드먼은 실패한 케인스주의를 대체한 대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경제활동의 핵심 동인이 통화 공급이라고 주장했다.

 

ㆍ프리드먼에 따르면 어느 경제에나 자연실업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실업률이 그 아래로 떨어지면 어떤 재정 정책이나 통화 정책을 써도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고는 경기를 끌어올릴 수 없다.

 

ㆍ케인스 체제가 무너지자 이를 즉각적으로 대체할 경제사상이나 정치집단이 없었다. 한편,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는 미국 정부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 큰 구멍을 냈다.

 

ㆍ1976년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신자유주의 사상에 전반적으로 동조하는 경제팀을 꾸린 후 규제 완화 정책을 추구했다.

 

ㆍ가장 극적인 변화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서 벌어졌다. 밀턴 프리드먼은 통화주의를 정부가 적극적인 경제 관리 주체에서 배제되는 자유시장 이론을 설명했었다.

 

ㆍ지적 조류가 케인스주의를 쓸어버렸지만, 레이건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레이건은 재임기간 내내 볼커가 진두지휘한 금리 정책의 파괴적 영향력에 대항하고자 막대한 군사비와 감세 정책에 의존했다.

 

 

 

 

 


CHAPTER 17 제2의 도금시대

 

ㆍ실업률과 예산 적자를 동시에 공격적으로 줄일 수는 없었다.

 

ㆍ케인스 사상은 철저히 포기한 정책이었다. 이들에게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은 금융시장의 위험과 한계를 다룬 책이었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어떤 금융 자산에 결부된 위험이 시장이 정확한 가격으로 산정하기는 불가능했다. 투자자들은 새롭고 예기치 않은 정보와 행동들을 끊임없이 처리했다.

 

ㆍ2000년에 갑자기 바뀐 것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정책이었다. 금융 위기가 한창일 때, 1990년대부터 세계화를 열렬히 지지했던 많은 이들이 대중 무역적자가 미국을 더 깊은 경제적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여겼고, 크루그먼 같은 학자들은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 유출을 막기 위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ㆍ금융시장은 안정기에만 합리적으로 보인다.

 

ㆍ도금시대는 위대한 기술적 변화로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생활 수준은 향상됐지만 엄청난 불평등과 자본주의의 남용을 초래한 시기였다.

 

ㆍ아무리 20세기 경제학을 크게 지배했다 할지라도, 적자지출같이 익숙한 도구로 관리되는 완전고용이라는 목적은 새로운 변혁의 시대에 맞고 새롭고 대담한 대체 패러다임으로는 기묘하고 불충분해 보였다. 케인스의 시대는 끝난 것 같았다.

 

 

 


글을 마치며

 

ㆍ불행의 이면에 어떤 하나의 원인이나 단순한 설명 같은 것은 없다.

 

ㆍ케인스는 <화폐론>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절약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ㆍ적자재정이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하거나 금리가 유동성 선호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으며, 갈 곳이 미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모두가 죽는다. 하지만 종국에는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하다.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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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원론 / 이준구, 이창용

제1장 경제학의 기본성격 - 경제학을 배우는 목적 1) 현실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이해할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 경제 문제를 이해할수 있는 사회생활에서 성공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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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 VS 슘페터 / 요시카와 히로시

케인스 : 정부 정책 “자발적인 저축이 투자의 원천이 되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려면 국가가 의도적인 정책을 펼쳐서라도 물가수준을 반드시 안정시켜야만 한다.” 슘페터 : 기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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