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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16

로마인 이야기 3 / 시오노 나나미 승자의 혼미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양육은 어머니 코르넬리아의 세심한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아 자신도 당시 로마 교양인의 자격인 그리스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보석’이라고 부른 두 아들의 가정교사의 그리스에서 학자를 초빙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고 해서 가정교사나 하인인 노예들에게 두 아들을 맡겨 버린 것은 아니다. ‘자식은 어머니 뱃속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맡아보는 밥상머리에서도 자란다’고 말한 여자였다. 코르넬리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더불어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로마 여인의 귀감으로 칭송받게 된다. 22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채택한 이후 귀족계급과 평민층 사이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4 / 시오노 나나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법무관(프라이토르)은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집정관 다음의 중요한 공직이다. 해마다 6명이 민회에서 선출된다. 자격 연령은 40세. 원로원 의원이라야 출마할 자격이 있었다. 법무관으로 1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의 한 곳에 총독으로 부임한다. 이 공직을 역임한 뒤에야 비로소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었다. 21 초등교육 후기부터 고등교육 초기. 나이로 치면 8,9세부터 16세까지 배우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문법,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 이 일곱 과목이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다. 직역하면 ‘일반학과’이고,..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5 / 시오노 나나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지금까지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을 석방했지만, 코르피니오에서 석방한 요인들 중에는 에노발부스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 에노발부스는 카이사르 후임으로 갈리아 총독에 임명된 인물이고, 따라서 카이사르에게는 당면한 최대의 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 편을 버리는 폼페이우스는 얼마나 다른가!” 28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카이사르 76 피아첸차에 도착..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6 / 시오노 나나미 팍스 로마나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세나투스’, 직역하면 ‘일보’ 또는 ‘원로원 의사록’이라고 불리는 이 법률은 원로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토론 이나 결의를 이튿날 포로 로마노의 벽면에 게시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정보공개법’이다. 22 옥타비아누스는 이 법을 고치는 조치를 취한다. ‘악타 세나투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속기로 기록되어 모두 ‘공문서보관소, 타불라리움’ 에 보관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23 ‘악타 디우르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을 ‘일보’라기보다는 ‘관보’로 번역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으로 바꾼다. 수도 로마에서 결정된 모든 공적 사항, 즉 원로원 의결사항이나 공직선거 결과를 자세히 기록하여 본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의 식민..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악명 높은 황제들 오늘날 카프리 섬은 지중해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라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2천 년 전에는 섬 자체가 황제의 사유지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카프리 섬을 영유하고 있던 나폴리에 이스키아 섬을 주는 조건으로 취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로마 세계의 최고권력자가 면적이 네 배나 되고 온천도 솟는 이스키아를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했던 카프리 섬은 온천의 이점도 잊게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답다. ‘나폴리 만의 진주’라는 별명은 로마시대부터 있었다. 11 이집트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파라오의 유택인 피라미드이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건축은 신들에게 바친 신전인 반면,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들라면 사람들이 현세에서 살아가는 데 유용한 도로, 수도, 다리, 회당, 항만, 목욕탕 같은 사회간접자본이..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위기와 극복 내전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적군와 아군으로 나뉘어 있지만, 동포니까 너그럽게 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적에게 이롭지 않도록, 즉 아군에게 이로운 형태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게다가 아군 병사들의 경멸을 사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상충되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지 않으면, 동포끼리의 내전에서 성공하기는 바랄 수 없다. 당시에도 널리 읽히고 있었던 카이사르의 ‘내전기’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전에서 승리하는 요령을 배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교과서였다. 73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기병 2만 기를 보내주겠다고 제의하기까지 했다. 세 사람은 이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현제의 세기 소 플리니우스는, 로마 황제란 “원로원과 로마 시민, 군대, 속주, 동맹국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통치를 위임 받은 유일한 존재이며” 그 목적은 “오직 만민의 자유와 번영과 안전보장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만민에 대한 통치자는 만민 가운데 선택된 자여야 한다”고 말 한다. 이 한마디-라틴어 원문으로는 “Imperaturus omnibus eligi debet ex omnibus”-는 계몽주의를 거친 근대 서유럽 국가의 위정 자들에게도 “늘 명심해야 할 말”이 된다. 이 구절은 영국 하원 의사당에서 라틴어 그대로 말해도 누구나 당장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 만큼 유명한 구절이다. 51 그러면 후천적으로 강대한 권력을 부여 받은 황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소 플리니우스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0 / 시오노 나나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왜 중국과 로마는 국가 규모의 대토목사업을 시작할 때, 한쪽은 방벽을 건설했고 또 한쪽은 가도를 건설했을까. 물론 고대 중국에 가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시대의 로마에 방벽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중점을 둔 것이 다를 뿐이다. 기술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두 민족 모두 ‘수직’과 ‘수평’을 바꿀 수 있었으니까, 그 점은 분명하다. 또한 로마인과 외적의 침략과 무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결코 국방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팍스 로마나’가 확립되기 이전,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은 줄곧 전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벽보다 가도 건설을 우선한 것이다. 방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가도는 사람의 왕래를 촉진한다. 국가 방위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이..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1 / 시오노 나나미 종말의 시작 26세의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57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세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하는 말로 이 연설을 마무리했다. 당시 22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미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얻어 차기 황제로 결정되어 있었다. “젊은이여, 로마 제국이 앞으로도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가장 고귀한 지위를 차지하게 될 그대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 26 로마인의 가정에서는 갓난아기에게 이름과 함께 다음 두 가지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나는 딸라이다. 가늘고 가벼운 금속 고리에 흔 들면 소리가 나는 방울이 몇 개 달려 있다. 또 하나는 황금으로 만든 부적이다. 악귀를 쫓는 이 부적은 끈을 매달아 목에 걸고, 성년식을 치르는 날까지 늘 몸에 지니고 있어야..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2 / 시오노 나나미 위기로 치닫는 제국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구절로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불행을 안고 있다.” 이 말을 역사에 적용하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융성의 시대는 어느 민족이나 비슷하지만, 쇠퇴기에 접어들면 저마다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15 후세의 역사가나 연구자들은 대부분 3세기의 ‘위기’를 초래한 요인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의 침입 격화 -경제력 쇠퇴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기독교의 대두. 16 로마 제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기축통화는 크게 나누면 ‘아우레우스 금화’와 ‘데나리우스 은화’와 ‘세스테르티우스 동화’의 세 종류 다. 그중에서도 ‘데나리우스 은..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3 / 시오노 나나미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는 것으로 시작된 로마 제정을 역사에서는 ‘원수정’이라고 불러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절대군주정’ 과 구별한다. 라틴어의 ‘프린켑스, Princeps’를 ‘원수’라고 번역했지만, 원래의 뜻은 ‘로마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일 뿐 국가 로마의 주권자라는 의미는 없다. S.P.Q.R는 로마를 나타내는 약어인데, 이것은 ‘로마 원로원 및 시민’이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바로 국가 로마의 주권자다. 75-7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각 황제의 담당 구역을 다시 ‘디오케시diocese,관구’롸 나누고, 황제 대리를 의미하는 ‘비카리우스, vicarius’가 각각의 관구를 다스리도록 행정조직을 개편했다. 하지만 앞의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인구가 적었던 ..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4 / 시오노 나나미 그리스도의 승리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치세는 아버지가 죽은 해인 서기 337년부터 그 자신이 죽는 361년까지 24년이다. 처음 3년은 삼형제가 제국을 나누어 다스렸고 그 후 10년은 동생과 둘이 분담해서 통치했지만, 그 동안 줄곧 콘스탄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였으니까 황제로서의 통치는 거의 4반세기에 이르렀다.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아우구스투스’가 된 뒤의 치세는 25년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무려 반세기 동안 로마 제국을 지배한 셈이다. 7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우대정책이 성직자의 공무 면제, 세금 면제, 독신자에게 불리했던 원수정 시대 세금제도의 폐지로 진행 된 것은 ‘지배의 도구 instrumentum regni’로서 기독교 진흥에 온 힘을 다하기로 결정한 콘스탄티누스에게는 ..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5 / 시오노 나나미 4세기 초의 사람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다른 모든 종교와 똑같이 기독교 신앙을 공인했기 때문에 ‘대제’ 로 존경받았지만, 4세기 말의 사람인 테오도시우스는 이단과 이교를 일절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배척하는 일신교적 사고방식을 강행 했기 때문에 ‘대제’라고 불린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라는 유능한 ‘양치기’의 존재도 크게 작용했다. 23 4세기의 황제들은 제국 서방의 본거지를 로마가 아니라 밀라노에 두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야만족의 침략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중간까지 뻗어있는 제국 방위선에 집중되고 있었다.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달려가려면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로마보다 북부의 밀라노에 있는 편이 유리했다. 둘째, 기독교도가 된 4세기 이후의 로마 황제들에게 .. 2021. 1. 28.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김대식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_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 위대한 제국 로마도 결국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영원한 제국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국을 세운 로마보다, 제국을 다시 잃은, 멸망한 로마가 오늘날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로마는 멸망하기를 거부했기에 어쩌면 여전히 오늘날까지 먼 거울 distant mirror로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8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다’ 중에서 미국의 표어는 ‘다양한 것이 합쳐져 하나가 된다, E Plutibus Unum’는 의미의 라틴어다. 하버드 대학교는 ‘진실 Veritas’, MIT는 ‘머리와 손, Mens Et Manus’, 서울대학교는 ‘네 안에 있는 빛은 진실, Ve..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 / 시오노 나나미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년 시절의 아놀드 토인비는 고대 로마를 찾아 이탈리아 전역을 자전거로 답사했다. 프롤로그 폴리비우스(그리스인, 포로) - 저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로마 장군)의 지원 53년 기원전 202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 패배) ~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전쟁(카르타고 멸망) 제1장 로마의 탄생 트로이 함락 - 트로이 왕 트리아모스의 사위 - 아이네아스만 아이네아스만(아프로디테의 아들 (미와 사랑의 여신) 아이네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기원전 753년에 로마에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 - 아이네아스의 자손 귀족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 북부의 에트루리아 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양대세력의 틈바구니.. 2021. 1. 21.
로마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인간과 그 인간의 소산인 체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할 필요가 있다 - 마키아벨리 시대의 요구에 따랐느냐 아니냐 포에니 전쟁 (페니키아인과의 전쟁) 로마 vs. 카르타고(용병) 제1장 제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 로마군의 코끼리 두려움 항해술이 뛰어난 카르타고 공화정 로마에서는 임무가 주어지면 원조원조차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400년 기득권을 빼았겼다. 지중해 서쪽 바다를 잃는것이기도 했다. 제2장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BC 241~219)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 에스파냐로 이주할 때 하밀카르는 아홉살 난 맏아들 한니발을 데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아홉살짜리 아들.. 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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