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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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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황제들

 

오늘날 카프리 섬은 지중해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라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2천 년 전에는 섬 자체가 황제의 사유지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카프리 섬을 영유하고 있던 나폴리에 이스키아 섬을 주는 조건으로 취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로마 세계의 최고권력자가 면적이 네 배나 되고 온천도 솟는 이스키아를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했던 카프리 섬은 온천의 이점도 잊게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답다. ‘나폴리 만의 진주’라는 별명은 로마시대부터 있었다. 11

 

이집트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파라오의 유택인 피라미드이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건축은 신들에게 바친 신전인 반면,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들라면 사람들이 현세에서 살아가는 데 유용한 도로, 수도, 다리, 회당, 항만, 목욕탕 같은 사회간접자본이었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69

 

고대 로마에서 꽃은 살아있는 사람을 축복할 때나 무덤 앞에 바치기 때문에, 죽은 직후에는 각자 자신의 재력에 맞는 물건을 불태우는 것으로 애도의 뜻을 나타낸다. 기독교 시대가 된 뒤에도 이 관습은 양초에 불을 켜서 바치는 형태로 계승되었다. 111

 

로마 국민은 얼마나 여러 번 로마 군단의 패배를 참고, 장수들의 죽음을 견디고, 로마 역사를 장식한 가문 전체의 붕괴도 참아 왔는가. 지도자 개개인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불멸의 존재는 국가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각자 자신의 직무로 돌아가자. 로마 시민이 낙으로 삼고 기다리는 대지의 여신 축제일도 다가왔다. 일상생활은 직무와 즐거움의 두 가지로 성립되는 법이다. -티베리우스의 포고령에서. 114

 

“나 개인으로서는 아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고, 앞으로도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 아들을 죽인 혐의로 고발된 피고에 게는 모든 수단에 호소하여 변명할 기회가 주어질 것을 보장한다. 게르마니쿠스의 명령 가운데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까지도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 따라서 여러분도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재판에 임해주기 바란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내 슬픔에 가 장 적절히 경의를 표하는 길이라고 생각해달라.” 티베리우스의 연설 중에서. 117

 

로마의 종교에는 그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독립된 사제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인의 종교가 가진 성격을 이 두 가지 사실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는 듯하다. 이런 로마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 분담이 자명한 이치로 여겨진 것도 당연했을 것 이다. 개개인을 보호하는 것은 신들의 역할이라 쳐도, 그 인간들이 모여서 구성하고 있는 공동체(레스 푸블리카)를 ‘보호’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도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인정해야 한다 는 것이 로마 지도자들의 일관된 종교관이었다. 137

 

황제에 즉위하는 데에도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할 뿐 아니라 황제의 후계자를 고르는 일도 원로원의 승인이 있어야 실현할 수 있고, 황 제 칙령조차도 잠정조치에 불구하고 그것을 항구적인 정책으로 만들고 싶으면 역시 원로원 의결을 거쳐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제 화할 수도 없는 것이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로마의 제정이었다. 로마 황제는 중국 황제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페르시아 같은 오리엔트의 군주와도 다르다. ‘로마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밖에 없는 황제였다. 140-141

 

로마인이 처음으로 가도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도를 여러 줄기가 그물처럼 얽힌 도로망으로 구성하면 그 기능도 더욱 높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실행한 것은 로마인이다. 로마인이 처음으로 법률을 만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법률은 여러 갈래에 걸쳐 있는 법률체계로 만들어야만 법치국가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행한 최초의 민족은 로마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공 통점은 필요에 따라 ‘유지 보수’하지 않으면 기능 저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인간세계의 현실이었다. 법률면에서의 유지보수는 곧 현재 실정에 맞게 법률을 고치는 것이다. 144

 

로마의 1개 군단은 독립된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단장부터 일개 병졸에 이르는 군단병에다 技⼠와 의사, 경리까지 합하 면 1개 군단의 정원은 약 6천 명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퇴역병을 개척지에 식민할 때 1개 군단을 통째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로마의 군단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군단병의 노쇠나 전사나 부상으로 결원이 생긴 경우에도 그것을 보충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의 목적이 공격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공세만 펴는 군사조직은 동질성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였다. 방어에는 질도 중요하지만 양 도 중요하다. 제정이 된 이후 로마의 적은 파르티아 왕국을 제외하면 질보다는 양으로 공세를 가해오는 야만족이었기 때문이다. 티베 리우스가 맨 먼저 한 일은 결원을 철저히 보충한 것이었다. 25개 군단 하나하나가 바우이라는 목적을 위해 최대한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독립된 조직이어야 했다. 151-151

 

당연한 일이지만, 책임분담 방식을 채택하면 임무를 맡을 사람의 인선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면에서 티베리우스는 워낙 뛰어난 능 력을 보였기 때문에, 그토록 티베리우스를 싫어한 역사가 타키투스조차도 다음과 같이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황제라도 티베리우스만큼 교묘한 인선을 해낼 수는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적재적소와 능력 위주로 일관했다. 군단장에는 군사 능력, 행정관에는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했고, 속주 통독 에는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귀족을 등용했다. 속주 총독의 임무에는 외국과의 교섭도 포함되기 때문에, 명문 출신이 유리해지는 경 우도 고려한 것이다. 이렇게 선발기준은 다양했지만, 적재적소와 능력 위주의 원칙은 일관되어 있었다. 152

 

 

로마 황제는 단독으로 정책을 시행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제 통달이나 황제 칙령이라고 번역되는 ‘긴급조치령’이고, 그 것을 로마인들이 말하는 ‘법률(렉스)’로 만들어 항구적인 정책으로 바꾸려면 ‘원로원 권고(세나투스 콘술툼)’라는 이름의 원로원 의결을 거쳐야 했다. 159

 

 

로마 제국은 타키투스 같은 공화정 동조자가 뭐라고 비판하든 간에 카이사르가 기획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하고 티베리우스가 반 석처럼 다져놓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티베리우스가 새로운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바로 새로 운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우구스투스가 훌륭하게 구축한 제정도 그를 뒤이은 사람의 방식에 따라서는 한때의 개혁으로 끝났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가 그 체제를 견고하게 다지는 일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제 정 로마는 다음에 누가 뒤를 이어도 튼튼한 반석일 수 있었다. 221

 

 

칼리굴라는 ‘제일인자(프린켑스)’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을 병사들이 존경하는 뜻으 로 부르는 호칭이다. 카이사르가 그렇게 불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도 ‘임페라토르’였는데, 칼리굴라만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칼리굴라가 명실공히 ‘황제’가 되고 싶었다면, 즉위한 직후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을 때 결행한 편이 성공률도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밤낮없이 떠들썩한 축제로 세월을 보냈다. 즉위한 지 2년 반이 지난 칼리굴라에게 군사적인 영광 이외에 부족했던 것, 아니 그보다 훨씬 절실하게 부족했던 것은 ‘돈’이 아니었을까. 266

 

 

로마인과 유대인은 법률에 대한 사고방식도 달랐다. 유대인에게 ‘법’이란 모세의 십계처럼 신이 내려준 것을 인간이 지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모세가 그저 돌조각에 새긴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것이 신의 뜻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신이 내린 것으로 되어 있는 이상 인간이 감히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로마인이 생각하는 ‘법’은 인간이 생각한 것이고, 그것을 법률로 만들 것인지 어떤지도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인간이 결정한다. 따라서 현실에 맞지 않게 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274

 

 

로마가 제국 안에 사는 이민족을 로마인과 동화시키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방책은 로마시민권을 주는 것이었지만, 속주세 면제라는 현실적 이익이 있는데도 로마 시민이 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이 고대에는 ‘특수’의 전형이었던 유대 민족이었다. 카이사르가 정한 법에 따라 의사와 교사는 민족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제정 시대가 진행되면서 이 제도는 제국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었 지만, 유대인은 우수한 민족이라서 의사와 교사를 많이 배출했는데도 이 특전을 활용한 사람은 놀랄 만큼 적다. 로마인이 되어버리면 로마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275

 

그리스어에서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는 오늘날에는 오로지 유대인만의 특유한 현상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바빌로니아나 이집트로 강제 이주 당한 것은 별문제로 하고,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일에서는 그리스 민족이 선배 였다. 로마인들도 ‘콜로니아’라고 불리는 식민도시를 각지에 건설했지만, 그것은 정략적인 이주였고, 사람들의 자발적인 이주에 따른 현상은 아니다. 자발적인 이주라면 그리스인이 선구자였고, 그 다음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의 이주와 유대인의 이주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한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은 이미 존재하거나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이나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1천 년에 시작된 그리스 민족의 이주로 지중해 세계에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곳곳 에 그리스인 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유대인이 건설한 도시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다. 289

 

 

‘팍스 로마나’의 확립과 사회간접자본의 보급은 서방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때까지는 불균형했던 동방과 서방의 경제력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지배자인 로마로 부가 집중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다. 로마 제정 시대, 제국의 3대 도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인데, 이들 가운데 서방에 속하는 것은 로마뿐이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동방에 속한다. 지배자인 로마인 자신이 제국 전역의 부의 흐름은 중요시했지만, 로마에만 부가 집중도 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속주세도 피지배자가 지배자 로마에 바치는 상납금이 아니라, 그들의 거주지 역을 포함한 제국 전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비였다. 290-291

 

티베리우스는 유대계 주민의 비율이 100만 명 가운데 2만 명에 불과한 서방에서는 그 비율이 무시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기 전에 예방책을 취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 이주를 제한하거나 금지한 것은 아니다. 이주하는 것은 자유지만, 서방에서는 동방과 달리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도록 했다. 토요일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모세의 십계에도 나와 있기 때문에 인정했다. 하지만 유대인 공 동체 안에서 유대법에 따라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이주한다면, 유대교도라도 로마법에 철저히 따르도록 했다. 100만 명 가운데 2만 명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293

 

 

칼리굴라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괴물은 아니었다.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의 불행, 아니 제국의 불행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젊은이가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지위에 앉아버린 데 있다. 사물의 옳고 그름이나 선악 따위를 판단하는 안목은 그에게도 있었다. 애마인 인키타누스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할까 하고 농담을 할 만큼 원로원의 통치능력이 쇠퇴한 것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303

 

 

테러 행위는 문명이 미숙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선거로 낙선시키는 수단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러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한 사람을 죽이면 정치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기 40 년부터 41년까지 칼리굴라를 둘러싼 환경은 즉위 당시의 열광이 거짓말로 여겨질 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열광이 차갑게 식기까지 는 3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칼리굴라는 로마에서는 책임 있는 공직을 맡을 수 있는 나이로 여겨진 30세도 채 되지 않았다. 307

 

 

로마 군단의 등뼈라고 불리는 백인대장은 대개 80명의 병사를 휘하에 두고, 근위대로 치면 중대장이다. 하지만 로마군에서는 하사관 이고 장교의 경력은 800명을 지휘하는 대대장부터 시작 되는 게 보통이었다. 명문 자제나 유력자의 연고자는 입대한 뒤 적응기간을 거 치면 곧바로 대대장에 임명된다. 유대인이라도 필로 같은 유력자의 아들은 백인대장도 거치지 않고 장교인 대대장이 된다. 따라서 군 단장이든 대대장이든, 백인대장을 지낸 경험이 있다는 것은 군대에서 ‘밑바닥부터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 단계씩 올라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311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회고 취미가 아니다. ‘인간성’에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가 그것을 결정한다. 격동기에 태어나면, 평온한 시대에 사는 것보다 인간의 온갖 언행을 좌우하는 인간성에 더 많은 흥미를 갖게 마련이다. 특히 관찰력과 분석력을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도 시대의 키잡이가 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라면 더욱 그렇다. 325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개개인의 창의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역사는 내가 창조한 다’고 생각지 않고 ‘역사는 인간들이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조상들이 보여준 선례를 참고하는 데에도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서기 41년에 황제가 된 ‘역사가’는 이 조상들 중에서도 특히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통치지표로 삼았다. 334

 

 

로마인들이 갈리아인이라고 부른 민족은 켈트족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에는 켈트(그리스어)와 갈리아(라틴어)를 구분하여, 로마에 정복 당하기 전을 가리킬 때는 켈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정복 당한 뒤를 가리킬 때는 갈리아라고 용어를 사용하는 모양이다. 또한 아일랜드인처럼 로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경우에도 켈트라고 부른다. 이 켈트족의 민족종교는 드루이드교였다. 드루이드교에는 전 문 사제계급이 있는데, 이 사제들은 종교만이 아니라 사법과 교육도 지배하며, 갈리아 부족들의 지배층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신교였지만, 종교와 신자들의 관계는 일신교인 유대교와 비슷했다. 351

 

“원로원 의원 여러분, 우리가 오랜 전통으로 믿고 있는 일도 처음 이루어졌을 때는 모두 새로운 것이었다. 국가 요직도 오랫동안 귀족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로마에 사는 평민에게 개방되었고, 다음에는 로마밖에 사는 라티움인에게 개방되었고, 다음에는 이탈리아 반도 에 사는 사람들에게 개방되는 식으로 문호개방의 물결이 차츰 확대되었다. 의원 여러분, 갈리아인에 대한 문호개방도, 지금은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로마의 전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토의하면서 수많은 선례를 들었지만, 이것도 언젠가 는 선례의 하나로 인용될 것이다.” -역사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연설 중에서. 403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조국(파트리아)의 개념을 이탈리아 반도에만 한정하지 않고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대하려 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신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중추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 것뿐이라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쇄국론 을 외치는 본국 출신 의원들을 절망시키고 대부분 속주 출신인 개국론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의 대단한 점은 한편으로는 개국 노선을 추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노선에 제동을 걸기 위한 법안도 성립시켰다는 사실이다. 404

 

 

노예제도는 고대 로마가 붕괴하고 기독교 세계가 된 뒤에도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다. 기독교라는 신앙에 눈을 뜨지 못한 자는 기독 교도와 대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교회의 묵인 아래, 비기독교도인 노예는 계속 존재했다.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인권 존중을 제일의 기치로 내건 계몽주의 시대였다. 따라서 모든 나라의 노예제도 폐지 선언은 18세기 말에 집중되어 있다. 405

 

 

그리스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피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로마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인의 ‘노예해방 규제법’은 정신을 공유한다는 로마의 전통을 지키면서 열등분자가 섞여 들어 로마의 정신이 희박해지는 것만 막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409

 

쾰른은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가 우군으로 끌어들인 게르만의 유력 부족 우비족의 근거지여서, 이 우호적인 부족의 땅이 라면 가족을 놔두어도 안심할 수 있었다. 이 땅을 로마군의 겨울철 숙영지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그리피나의 외조부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다. 하지만 외조부나 아버지와 인연이 깊고 자신의 출생지이기도 하다는 이유만으로 한 도시에 자기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퇴역병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세워야만 비로소 그 일을 수행한 사람의 이름을 도시에 붙이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다. 그래서 아그리피나는 출생지인 쾰른에도 만기 제대한 고참병들을 이주시킨 로마의 식민도시(콜로니아)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쾰른의 옛 이름은 아그리피나의 식민도시를 뜻하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다. 쾰른은 식민도시를 뜻하는 라틴어 콜로니아를 독 일어식 발음으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자기 이름을 딴 도시를 갖는 것은 제정시대로 접어든 뒤에는 오직 황제에게만 허용된 영예다. 아그리피나는 이 영예까지도 손에 넣게 되었다. 417

 

 

아그리피나의 뛰어난 점은 아들이 황제가 될 때까지 제왕 교육을 시킬 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아들이 제위를 계승한 뒤에도 그 보좌역을 맡을 수 있는 인물로 세네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로마 황제의 ⽂을 세네카에게 맡긴 것이다. 그렇다면 武를 맡길 수 있는 인물도 필요하다. 아그리피나는 그 역할을 맡아 줄 사람으로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선택했다. 세네카는 에스파냐 태생의 로마 시민이지만, 부루스는 남프랑스 출신의 로마 시민이다. 원로원에서 두각을 나타낸 세네카와는 달리, 부루스는 군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개 병졸로 시작하여 대대장까지 진급했다. 역사가 몸젠은 티베리우스가 등용한 속주 출신 인재들을 ‘티베리우스 문하생’이라고 불렀는데, 부루스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천재적인 번득임은 부족하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무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나이는 세네카보다 대여섯 살 젊었던 모양이다. 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421

 

 

서기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성장한 아그리파 2세를 유대 왕위에 앉히기로 결정한다. 다만 이 젊은 유대 왕은 성실함에서는 아버지를 능가했지만 군주의 자질은 부족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그런 젊은이가 유대 전역을 통치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대를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 처음에는 그 가운데 3분의 1만 아그리파 2세가 다스리게 하고,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로마에서 파견된 두 장관이 분담하여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에는 유대를 양분하여 아그리파 2세와 로마 장관 1명이 분할 통치하는 체제로 바뀌었지만, 예루살렘과 그 주변은 로마의 직할 통치구역으로 남았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로마인과 신권정치를 요구하는 유대교도의 동거는 항상 폭탄을 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해묵은 불화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중동이 화약고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429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클라우디우스도, 그리고 그후의 황제들도 대부분 security의 어원인 securitas를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안전보장이 아니라 현대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종합안전보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군사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는 사회형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를 위해 로마는 본국과 수도에 필요한 주곡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방침조차 바꾸려 하지 않았다. 431

 

그러나 인간은 문제가 없으면 불만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사소한 문제라도 찾아내서 그것을 불만거리로 삼는 게 인간의 본성 이다. 이런 인간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말도 나온다. 일반 시민이 네로의 등극을 환영한 것은 단지 분위기가 쇄신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원로원이 환영한 이유는 해방노예로 이루어진 비서관 정치가 폐지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447

 

세네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정이란 현재 눈앞에 있는 결과에 대한 정신적 반응이고, 그 결과를 낳은 요인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반면에 관용은 그것을 낳은 요인까지 고려하는 정신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지성과도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 450

 

경제정책만 살펴보면 네로는 14년에 걸친 치세에서 세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국고 일원화다. 둘째는 간접세 폐 지, 셋째는 화폐개혁이었다. 서기 64년에 실시된 화폐개혁은 개혁이라기 보다 ‘손질’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지만, 이것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476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간 뒤에도 지리적 문명적 조건 때문에 항상 로마파와 파르티아파가 대립한 나라다. 파르티아 왕제가 왕위를 빼앗은 뒤로는 당연히 파르티아파가 우세해졌다. 아르메니아 영토로 진격하는 것은 적지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코르블로는 3만 명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파르티아-아르메니아 연합군을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코르불로는 파르티아군이 본격적으로 출동하기 전에 파르티아 왕제인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와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485

 

그 후 무려 400년 동안 브리타니아인이 로마에 본격적으로 저항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로마의 제 패가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의 브리타니아인은 ‘팍스 로마나’를 모토로 하는 로마 세계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드루이드교로 상징되는 켈트 문명은 이 무렵부터 브리타니아에서도 쫓겨나 아일랜드로 옮겨갔고, 거기서 살아남게 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으로 갈라지기 오래 전에 이미 로마 세계와 비로마 세계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509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기독교도 유대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다. 하지만 관용은 상대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존재는 인정해준다는 뜻이다. 유대교도에 대한 로마인들의 태도는 이런 의미의 진정한 관용이었다. 이런 로마인과 로마에 사는 유대교도 사이에 이렇다 할 마찰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유대교의 선민사상과도 관계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저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믿고 있다. 다른 민족도 유대교도가 되어 신의 선택을 받는다면, 유대인은 더 이상 선민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들 내부에서 유대교를 고수하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다른 민족에게 유대교를 포교하는 데에는 열성을 보이지 않는 다. 유대교가 포교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지 않은가. 이와는 반대로 예수는 기독교의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말했다. 유대적인 선민사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의 신 앞에서’라는 전제조건이 있는 이상, 예수의 평등사상도 다른 종류의 선민사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선민사상’의 이 차이 때문에 남에 대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태도에 큰 차이가 생겼다. 유대교도는 남에게 유대교를 포교하는 데 열성을 보이지 않는 반면 기독교도는 포교에 열심이다. 556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이 믿는 신은 유일신이고,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종교에 눈을 뜨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니까, 그 상태에서 구해주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도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 기독교도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참견’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는 비기독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557

 

자기들은 제물로 바친 소나 양의 고기를 먹는다. 그런데 기독교도는 제물로 바친 인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도는 에트루리아인보다, 카르타고인보다, 그리고 분명한 야만족인 켈트족보다 더 야만스러운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식인인 경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태도도 역시 달랐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보는 기독교도는 로마인이 창설한 인류공생체의 규칙을 어지럽히려 드는 어둡고 불길한 적이었다. 3백년 뒤의 로마제국을 예언하는 듯한, 정확한 파악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558

 

 

네로의 기독교도 박해는 방화죄를 전가하려는 목적 때문인지, 수도 로마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기독교도가 다음에 박해를 받는 것은 30년 뒤인 서기 95년이다. 이때도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자신 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기독교도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560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자질의 우열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네로는 서투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좋아진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만 한다. 어쩌면 그는 평판이 좋아지면 무슨 짓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버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572

 

 

동쪽으로는 라인 강, 북쪽으로는 도버 해협,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피렌체 산맥과 지중해에 접해 있는 갈리아 전역은 모두 5 개의 속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남프랑스 속주만 원로원 관할 속주였고, 나머지 4개 속주는 모두 황제 직할 속주였다. 다만 로마 군단이 상주해 있는 것은 4개 속주가운데 ‘게르마니아 속주’뿐이었다. 이 지역은 방위의 최전선인 라인 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기카’와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와 ‘아퀴타니아’는 황제 속주지만, 로마군 병영도 없다. ‘장발의 갈리아’의 수도인 ‘루그두눔 (오늘날의 리옹)’에 2개 대대(1천 명도 안된다)를 상주시키고 있었을 뿐이다.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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