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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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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극복

 

내전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적군와 아군으로 나뉘어 있지만, 동포니까 너그럽게 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적에게 이롭지 않도록, 즉 아군에게 이로운 형태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게다가 아군 병사들의 경멸을 사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상충되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지 않으면, 동포끼리의 내전에서 성공하기는 바랄 수 없다. 당시에도 널리 읽히고 있었던 카이사르의 ‘내전기’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전에서 승리하는 요령을 배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교과서였다. 73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기병 2만 기를 보내주겠다고 제의하기까지 했다. 세 사람은 이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파르티아의 경기병은 용맹하기로 유명하니까, 2만 기라면 강력한 지원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데도 거절한 것은,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절대로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로마인의 일관된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싸울 때에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싸울 때에도,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싸울 때에도 다른 민족을 끌어들인 적이 없었다. 서기 69년에도 세 사람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파르티아 왕의 제의를 거절했을 것이다. 106

 

‘독수리(아퀼라)’라면 로마 군단기를 말한다. 은으로 만든 독수리 밑에 각 군단을 나타내는 표장을 단다. 이 군단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것은 군단 전체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서기 69년 7월 18일의 입성 행진에서는 은독수리 깃발이 네 개 등장했다. 4개 군단이 통째로 수도에 들어온 것이다. 111

 

군사전략상으로 보면 카이키나의 예측이 정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다. 제1차 베 드리아쿰 전투에서 승자였던 그는 패자가 된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모욕당하는 쪽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만이 같은 인간을 모욕할 수 있는 법이다. ‘도나우 군단’ 병사들은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무의식중에 일찍이 굴욕감으로 눈물을 삼킨 곳을 설욕전의 장소로 택하는 법이다. 그들에게는 그 장소가 베드리아쿰과 크레모나였다. 이것을 카이키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전략이라 해도 인간적 요소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탁상공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129

 

인류가 도저히 초월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악이 한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압승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중간한 승이로는 전쟁과 별다름이 없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압승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적의 사망자 수가 아니다. 그보다 아군의 희생자가 적은 편이 더 중요하다. 승리가 진정한 승리이기 위해서는 적이 또다시 싸움을 걸어오지 못할 상태로 해둘 필요가 있다. 문자 그대로 승부를 결판 내는 결전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을 마구 죽이기보다 아군의 병력을 계속 유지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희생자가 적으면 사 기가 떨어지는 것도 피할 수 있다. 어제까지 고락을 함께한 전우가 사방에서 픽픽 쓰러져 죽는데도 병사들이 사기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성을 무시한 허황된 소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32

 

마키아벨리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속주병에게 반란을 사주하는 것은 절대로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었다. 161

 

“그리고 게르만족이 갈리아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상투적으로 써먹는 말은 언제나 자유와 독립이다. 하지만 잊지 말라. 남을 지배하려는 민족치고 이 두 마디를 기치로 내걸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다는 인간세계의 냉엄한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카이사르가 이 땅을 로마법의 지배하에 귀속시킬 때까지 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노골적인 힘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복자가 된 우리 로마인은 승자의 권리를 제국 전체의 평화수립을 위해 사용했다. 물론 그대들 에게는 속주세를 낼 의무를 부과했다. 하지만 민족간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병사가 필요하고, 병사에게는 급료를 주어야 하고, 급료를 주려면 세금을 징수할 수밖에 없다. 로마가 갈리아에 요구한 것은 속주세 뿐이다. 다른 것은 모두 그대들의 자치에 맡겼다. 훌륭한 황제는 속주민에게도 이익을 주지만, 그것은 우리 로마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됨됨이가 좋지 못한 황제의 경우에는 가까이에 있는 우리 로마인이 그 폐해를 직접 받게 된다.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거나 반대로 비가 너무 많이 내리거나 하는 자연재해를 인간인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됨됨이도 우리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됨됨이가 좋지 못한 황제가 백성을 방치하든, 탐욕을 부리든, 참을 수 있는 동안은 참을 수밖에 없다. 188-189

 

 

로마군에서는 전통적으로 일선 사령관에게 거의 무제한의 재량권이 주어졌다. 한니발과의 강화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독단으로 결정했고, 갈리아를 제패한 카이사르도 독단으로 전후 처리를 진행했다. 네로 황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을 맡겼는데도, 코르불로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강화를 맺기로 결정해버렸다. 다만 이들 일선 사령관의 결정을 먼 훗날까지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하려면, 즉 국가정책으로 확립하려면 원로원의 의결과 시민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긴 하지만, 부결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해 도 좋을 정도다. 194

 

 

무키아누스와 켈리아리스가 보복보다 관용을 택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바타비족 반란에서 갈리아 제국 수립에 이르는 이 사태의 진정한 책임은 로마 쪽에 있다고 로마인 자신이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타키투스도 ‘로마인끼리 싸운 내전의 여파 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1년 사이에 황제가 세 명이나 바뀌고, 군단병들이 편을 갈라 서로 격돌하는 혼란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속주병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인 자신이 무능함을 보이지 않았다면, 속주민이 로마인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갈리아 제국 소동은 당연히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다. 이런 사정을 무키아누스와 켈리아리스도 충분히 알고 ‘관용’을 베푼 게 아니었을까. 195

 

 

유대민족의
첫 번째 특수성은 그들의 거주지역인 팔레스타인 일대가 전통적 강대국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선상에 자리잡고 있다 는 점이다.
두 번째 특수성은 그들이 대단히 우수한 민족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 특수성은 고대 그리스인에 비견될 만한 유대인의 이산 경향이다. 그리스인과 다른 점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본국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다는 점이다.
네번째 특수성은 유대인은 다른 민족을 지배해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다섯번째 특수성은 유대인과 종교의 관계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 아닐까.
그리스나 로마의 다신교 신들은 인간을 지켜주고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이 신봉하는 일신교의 유 일신은 인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명령하고, 그 명령을 어기면 벌을 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존재다. 198-199

 

정복자 로마인은 피정복자들을 동화시켜 로마제국이라는 공동운명체의 일원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그리스인도 에스파냐인도 갈리아 인도 북아프리카인들도 로마의 동화정책에 찬동하고 참여했는데, 유독 유대인만은 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했다…그리스인에게 는 본디부터 반유대감정이 있었지만, 그리스인과는 달리 사회적 지위나 직업에서 유대인과 경쟁관계에 있지 않았던 로마인은 반유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유대인과 직접 접촉한지 60년이 지날 무렵에는 로마인도 반유대 감정을 지니기 시작한 게 아닐까. 유대인을 싫어하게 되면, 그들이 하는 것이 모두 혐오대상으로 바뀐다. 티키투스도 말했듯이 할례는 유대인과 타민족을 구별하기 위한 의식이고, 일신교는 다른 신들에 대한 경멸감에서 생겨난 신앙이며, 병역이나 공직을 거부하는 것은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없음을 나타내고, 인구를 늘리는 데 열심인 것은 타민족을 앞지르려는 생각에서 나왔고, 인간의 형상은 본뜬 신상을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 라고 부르면서 거부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에 대한 경멸이고, 춤도 추지 않고 운동경기도 없는 유대교의 종교의식은 음침하고 음울 해서 인생을 절망하게 한다는 식이다. 타종교를 믿는 자와 결혼을 금지하는 것도 유대인의 폐쇄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05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모두 폭동에 가담했는가 하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대인은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있었다. 급진파는 이때까지 유대 내륙지역을 휩쓸고 다니다가 예루살렘의 하층민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시카리오이’들이고, 온건파는 예루살렘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구성원들이 굳건히 단결되어 있지 않으면, 급진파의 행동은 더욱 과격해지게 마련이다.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다. 또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입장 때문에 온건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체념 하 게 되는데, 급진파의 과격한 행동은 그런 효과도 노리고 있었다. 207

 

 

네로는 유대문제가 시리아 총독의 임무를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대 문제만 담당하는 책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자작시를 노래하면서 그리스 전역을 ‘순회공연’하고 있던 네로가 그래도 이런 문제는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네로가 자작시를 노래하고 있을 때 꾸벅꾸벅 졸다가 들켜서, 이제 출세하기는 다 틀렸다고 믿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기용한 걸 보면, 네로는 시원시원한 성격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209-210

 

 

로마는 10개 가까운 원로원 관할 속주에 총독을 파견해야 하고, 집정관을 지낸 지 10년이 지난 사람만 총독이 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정관을 대량생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보궐선거라도 집정관에 출마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 는 두 달쯤 집정관을 지낸 모양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서기 62년에는 아프리카 속주총독이 되어 주재지인 카르타고에 부임했다. 여기서 1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여러 군단을 지휘하는 이른바 ‘황제가 임명하는 사령관(레가투스 임페리알레)’이 되어 황제 직할 속주 에 부임할 수 있다. 그런데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네로 황제가 자작시를 노래하는 공연장에서 꾸벅꾸벅 졸아버린 것이다. 베스파 시아누스는 이제 출셋길이 막혔다고 누구나 생각했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에 네로는 유대 전쟁을 담당할 사령관으로 베스파 시아누스를 발탁했다. 216

 

 

대부분의 로마 장수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특징은 무인다운 허영심과는 인연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군으로 소수의 적을 공격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군으로 공격하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과 아군의 희생을 줄일 수도 있기 때문 이다. 500명 정도가 수비하는 마사다 요새를 공격하는데 그 열 배나 되는 병력이 투입된 것을 두고 경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로마 장수의 정신을 모르는 사람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로마군의 전법은 병력이나 무기 나 군량보급 같은 확정요소를 정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다음 아군은 병사들의 사기 면에서도 적군보다 우세했다고 말한다. 다 시 말해서 정신력 같은 불확정요소는 맨 마지막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는 이 불확정요소가 가장 중시 되었다. 일본이 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46

 

베스파시아누스는 ‘평화 포룸(포룸 파케스)’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고 당장 공사를 시작했다. ‘포룸Forum’이란, 오늘날에도 남아 있 는 포로 로마노 유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 경제 행정 등의 기능이 모여있는 지역의 총칭이다. 로마 시대의 도 시라면 어디에나 있지만, 포로 로마노의 라틴어 명칭인 ‘포룸 로마눔’은 ‘로마의 포룸’이라는 뜻으로서 제국의 중추라고 해도 좋았다. 253

 

베스파시아누스는 출신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꺼이 만나주었다. 이제는 소수파가 되었지만 아직도 공공연히 제정 타도를 외치는 공화주의자들과도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수도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황제 앞에서 공화정 복귀를 주장하자, 한동안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지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처형당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소리든 지껄일 작정인 모양인데, 하지만 나는 깽깽 짖는다고 해서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 그 후 이 철학자들은 ‘⽝儒學派’라고 불리게 되었다. 병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에, 병으로 쓰러지자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불쌍하게도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군.” 256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도 주었다. 따라서 그후 황제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제 위계승자는 ‘카이사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 제위계승자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내전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한 베스파시아 누스는 아들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부정을 만족시키면서 내분의 싹도 잘라버리는 방책으로 제위계승자의 칭호까지 명확하 게 정한 것이다. 267

 

 

콜로세움을 건설한 사람이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다. 따라서 이 원형경기장의 정식 명칭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이다. 번역하 면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반원형 극장인 ‘테아트룸theatrum’ 형태는 그리스인이 창안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반원을 두 개 합쳐놓 은 원형극장은 그리스어로 ‘한 쌍’을 뜻하는 ‘암피amphi’를 붙여서 ‘암피테아트룸’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개최되는 행사즈이 종류에 따라 의역하면, 원형경기장이나 원형투기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이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처음 건설된 것이다. 정확히는 타원형이지만, 이 양식의 야외경기장은 완전히 로마인의 창안이다. 수도 로마에 건설된 이 원형경기장만 ‘콜로세움’이라는 통칭으로 불린 것은 네로의 거대한 입상(콜로수스)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아’를 건설할 당시 자신을 본뜬 거상을 세우게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거상을 파괴하지는 않았지 만, 얼굴 부분을 네로에서 태양신으로 바꾸었다. 파괴하지 않은 이유는 이 거상이 규모 때문에 민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78

 

 

로마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 원로원 의원들이 계속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예컨대 키케로나 폼페이우스나 브루투스 같은 ‘ 공화파’가 승리했다면, 로마 제국은 후세의 대영제국처럼 본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형태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브루투스 일당에게 살해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구상에 따라, 본국과 속주를 포함하는 거대한 공동운명체라는 형태의 제국을 창출해냈다. 역사가 기본은 이렇게 말했다. 로마가 왜 멸망했느냐고 묻기보다, 로마는 어떻게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 사회인 로마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 어려운 제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로마인은 타민족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타민족까지도 로마인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쇠퇴는 식민지들이 독립했기 때문이지만, 로마제국에서는 속 주들의 독립이나 이반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346

 

 

학교에서 배우는 로마사는 서기 5세기에 일어난 야만족의 침입이 로마 멸망의 원인인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오해다. 공화정과 제정을 통틀어 로마의 역사는 야만족 침입의 역사와 완전히 겹친다고 해도 좋다. 수도 로마까지 야만족이 침입한 기원전 390년부터 로마가 다시 야만족에 유린당하는 서기 410년까지 8백년 동안 로마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방위력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기 5세기에 일어난 야만족의 침입은 ‘민족 대이동’이라고 부를 정도의 규모였지만, 동로마 제국은 붕괴를 면했 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에서는 방위체제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이동하는 야만족도 이 동로마제국을 피해 방위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서로마제국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387

 

로마 법정은 다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재판장은 원로원에서 선출된 법무관이 맡는다. 임기를 마친 속주 총독이 속주민에 의해 고발당할 경우에는 ‘오라토르Orator’라고 불린 변호사가 원고측을 대리하여 검사 역할을 맡는다. 물론 오라토르가 피고측 변호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델라토르 Delator’는 고발자로 번역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고발이 전문이기 때문에 피고측에 서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배심원은 ‘켄툼비리Centumviri’라고 불렀는데, 직역하면 ‘백 명의 남자들’이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부터는 180명으로 정원이 늘었지만, 배심원의 명칭은 여전히 ‘백 명의 남자들’을 뜻하는 ‘켄툼비리’였다. 배심원은 원로원 계급과 기사계급 및 평민 계급에 속하는 유자격자들 중에서 1년에 한번씩 추천으로 선발되었다. 배심원이 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이런 자격조건을 설정한 것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져야만 판단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수도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바실리카 율리아’회장에서 재판이 열렸다. 이 건물은 가로 101미터에 세로 49미터인 직 사각형이지만, 재판이 열리는 날에는 중간에 칸막이를 쳐서 네 구역으로 나눈다. 네 건의 재판을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서인데, 법치체 제의 창시자인 로마인인 만큼 사소한 일도 재판으로 시비를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100명의 배심원도 네 팀으로 나뉘어 25명 의 배심원이 평결을 내렸다. 411-412

 

검사 역할도 맡고 변호사 역할도 맡는 ‘오라토르’와 달리, ‘델라토르’는 검사 역할만 전문적으로 맡는다. 로마 제국에서는 델라토르도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공직이 아니라 민간 직업이었다. 즉 보수를 전제로 하는 자유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엘리트의 책무로 되어 있었던 ‘오라토르’의 수임료 상한선이 1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정해져 있었던 것과는 달리, ‘델라토르’는 유죄 판 결을 받은 자에게 몰수한 재산의 일부를 보수로 받는다. 델라토르는 재산 사냥꾼이나 마찬가지라 하여 사람들이 꺼리고 싫어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몰수 재산의 일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연구자들 중에는 4분의 1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413

 

 

황제에 즉위한 뒤 처음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네르바는 원로원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성립시켰다. 원로원은 황제의 사법권 밖에 있다는 것이 이 법률의 요점이다. 이로써 원로원 의원들은 아무리 황제가 ‘델라토르’를 이용하여 법정에 끌어내도 처형당할 염려 는 없어졌다. 다만 치외법권이라 해도 그것은 황제의 사법권에 대해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치외법권’이고, 그 밖의 일반 형법이나 민법 에서는 원로원 의원이라도 치외법권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네르바는 실질적으로 ‘델라토르’의 힘을 줄이는 법률도 성립시켰다. 이 법의 제정으로 해방노예나 노예가 주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 추방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이들의 귀국이 허용되고 몰수 재산이 반환되었다. 하지만 이것말고는 네르바도 도미티아누스의 정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계승했다. 433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마르티알리스의 글을 인용하겠다. “포스투무스에게, 인생을 즐기는 것은 내일부터 하자고? 그러면 너무 늦다네. 즐기는 것은 오늘부터 해야 돼. 아니, 그보다 현명한 건 어제부터 이미 인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라네.” 450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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