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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1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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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시작

 

26세의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57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세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하는 말로 이 연설을 마무리했다. 당시 22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미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얻어 차기 황제로 결정되어 있었다. “젊은이여, 로마 제국이 앞으로도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가장 고귀한 지위를 차지하게 될 그대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 26

 

로마인의 가정에서는 갓난아기에게 이름과 함께 다음 두 가지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나는 딸라이다. 가늘고 가벼운 금속 고리에 흔 들면 소리가 나는 방울이 몇 개 달려 있다. 또 하나는 황금으로 만든 부적이다. 악귀를 쫓는 이 부적은 끈을 매달아 목에 걸고, 성년식을 치르는 날까지 늘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29

 

 

12세 때부터 중등교육이 시작된다. 보통 17세에 사회로 나가니까, 로마인들은 그때까지 5년동안 받는 중등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여 겼다. 교사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중학교 고사를 의미하는 ‘그라마티쿠스’였던 것이 무엇보다 좋은 증거다.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란 마르쿠스인 만큼, 가정교사들도 모두 최고 등급인 그리스인이었다. 그것도 학과별로 담당 교사가 따로 있었다니까, 서기 2세기쯤 되면 자녀 양육만이 아니라 가정교사도 분업화한 모양이다. 35

 

열다섯 살이 되면 라틴어로 ‘토가 비릴니스 toga virilis’라고 부르는 성년식을 치르고, 소년 시절의 투니카 대신 토가를 입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을 일가친척이 모여 축하해준다. 토가는 성인 남자가 격식을 차릴 때 입는 옷이다. 마르쿠스는 이 무렵 아버지 대신이었던 할아버지도 여윈 모양이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은밀히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 성년식이 끝나 자마자 마르쿠스의 약혼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약혼녀는 케이오니우스 콤도두스의 딸인 케이오니나였다. 그 직후에 하드리아누스는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 표했다. 마르쿠스는 차기 황제의 딸과 약혼한 셈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가 되어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이름을 바꾼 차기 황제와 마르쿠스의 나이 차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리고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과 마르쿠스의 나이 차이는 아홉 살이었다. 37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아는 것이고, 전달 방식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교수들은 상대의 어법이나 억양의 잘못을 바로잡으면 절대 안된다고 가르쳤다. 통치자 앞에서 입을 다무는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통치자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라니, 정말 훌륭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40

 

포도주 산지와 생산연도를 문제삼기 시작한 것도 로마인인데, 로마의 미식가들은 질그릇 단지에 담은 포도주를 유리잔이나 은잔에 따르면서 이것은 남부 이탈리아의 팔레르누스산이고 안토니누스와 마르쿠스가 집정관이던 해의 ‘비눔, vinum’이라고 말하고는 손님에 게 권했다. 참고로 라틴어의 맏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어에서는 포도주를 ‘비노vino’라고 한다. 그리스어로는 ‘오이노스’다. 61

 

그리고 프론토는 상당히 훌륭한 교사이기도 했다. 제자인 마르쿠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철학은 무엇을 말해야 할 것 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웅변은 그것을 어떻게 말하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66

 

훗날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황제 마르쿠스는 명상록에서 자신이 이끄는 로마 제국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집행되고, 개인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도 보장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기반을 둔 군주정의 존재이유다.” 67

 

‘오현제 시대’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은 시대는 서기 96년부터 180년까지 약 1세기,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다섯 황제가 다스린 시대다.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로마인도 그리스인도 모두 그 100년을 ‘황금시대 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제1장부터 제3장까지 제정을 총괄한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아들 콤모두스가 즉위한 180년을 기점으로 하는 제4장부터 쇠퇴와 멸망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서술 하기 시작한다. 즉 로마제국의 쇠망은 오현제 시대의 종말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역사관이다. 73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 별장에 머물고 있던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갑자기 몸져 누운지 이틀 만에 잠자듯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질서 있는 평온’이라고 평가 받은 치세의 종막에 어울리는 평온한 죽음이었다. 75세 생일을 반 년 앞둔 나이였다.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달은 황제는 한 가지 유언을 남기고, 한 가지 일을 시킨 뒤에 숨을 거두었다. 유언은 장례를 너무 화려하게 치르지 말라는 것이었고, 측근 신하들에게 명령한 일은 황제의 침실에 놓아두도록 되어 있는 ‘행운의 여신’ 황금상을 마르쿠스의 침실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마르쿠스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는 확실한 의사표명이었다. 83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무찔러 구국의 영웅이라고 불리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법정에 끌어내어 실각 시킨 카토는 역사에서 ‘대 카토’라고 불리고, 그 피를 이어받은 증손자인 이 사람은 ‘소 카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스토아 철학자 이자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다. 따라서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뒤 우티카로 망명했지만, 항복하면 용서받으리라는 것을 알 면서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유명해졌다. 게다가 음독하거나 혈관을 자른 것이 아니라 할복 자살이라는 장렬한 방법을 택했기 때 문에 더욱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89

 

이건 여담이지만, 내가 찾아가본 로마 시대의 별장 유적 가운데 돈이 많은 것도 나쁘진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 곳은 다음 네 군데 다. 카프리 섬에 있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 치르체오에 있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별장, 티볼리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그리고 마지막이 아피아 가도 부근에 있는 헤로디아스 아티쿠스의 별장이다. 서기 2세기의 ‘에피큐리언(쾌락주의자)’은 공공사업만 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에 대한 소비감각도 갖고 있었다. 119

 

일반 사병은 만기까지 20년 동안 같은 군단에 배속되어 같은 기지에서 근무하고, 퇴역한 뒤에도 대부분 현지 여자와 결혼하여 군단기 지 주변에 정착한다. 로마 군단병의 이런 토착화는 로마의 방위전략이기도 했지만, 백인대장 이상은 사정이 다르다. 특히 대대장이나 군단장은 자주 임지가 바뀐다. 이것도 방위전략의 하나였지만, 육체적으로도 다양한 환경에 익숙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123 166년의 개선식에는 전통적인 로마의 개선식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개선장군인 마르쿠스와 루키우스가 처자식을 개선장 군이 타는 황금전차에 동승시킨 것이었다. 전에는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개선장군이 직접 몰고, 전차에 동승하는 것은 월계수 잎을 본뜬 황금관을 개선장군의 머리 위에 받쳐들고 개선식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뒤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임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노예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가족 동반으로 바뀌었다. 131

 

서양 역사상 유명한 첫 번째 페스트는 기원전 430년 무렵 그리스 아테네를 덮친 페스트였다. 이 역병을 때마침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 이에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맞물려 도시국가 아테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정치가 페리클레스도 이 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서기 166년부터 167년까지 로마 제국을 덮친 ‘페스틸렌시아’라고 한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페스트는 14세기에 이탈리아를 덮친 페스트만큼 큰 피해를 주지 않은 것 같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으로 유명해진 이 14세기의 페스트로는 1년 사이에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지만, 고대 로마에서 창궐한 페스트는 그 정도로 심각하지 는 않았다. 136

 

신들의 공존을 인정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는 사고방식에 따르면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이 ‘무신앙자’라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시민들이 기독교도를 비난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공공생활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자기네끼리는 상호부조에 열심이었지만, 그들이 사는 도시나 지방자치단체가 벌이는 공공사업이나 복지사업에는 열의를 쏟지 않았다. 이것은 공공생활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의무라는 생각이 아직 힘을 잃지 않은 이 시대에는 충분히 바난 받을 이유가 되었다. 140

 

수도장관의 직무에는 경찰청장의 직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법에서는 고발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고발장을 제출하면 사법관 은 반드시 그것을 수사하고 재판할 의무가 있었다. 유스티누스를 고발한 사람은 견유학파 철학자인 크레스켄스였다. 전도자 유스티누스도 원래는 그리스 철학에서 출발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스토아 학파, 다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피타 고라스 학파를 거쳐 플라톤 학파로 진리를 찾아 돌아다닌 끝에 기독교에 이른 인물이다. 진리 탐구의 길을 철학에서 기독교로 바꾼 제 국 동방의 전형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143

 

서양인들은 지금도 영국의 기번과 독일의 몸젠을 로마사의 권위로 꼽고 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몸젠의 평가는 기번과 는 달리 아주 엄격해서 “위대한 지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고 단정적으로 쓰고 있다. 몸젠이 ‘위대한 지성의 소유자’로 평가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뿐인데, 카이사르는 천재다. 그리고 천재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뻔히 보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할 때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149

 

방위에는 산맥보다 하천이 적합하다고 가르친 것도 카이사르였다. 브리타니아 원정을 시도하여, 브리타니아를 영유하는 것이 갈리아와 나아가서는 제국 서방의 안보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도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야만족을 격퇴하는 것만이 아니 라 동화시키는 것도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로 보여주었다. 173

 

한니발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을 당시의 로마 위정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17세 미만의 지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청소년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장래의 로마 시민은 성장하기에 적당한 환경에서 충분히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로마군에는 소년병이 없었다. 183

 

타락하고 퇴폐한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를 바라고 천년왕국의 도래를 기원하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이다. 또한 저희들끼리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로마 제국의 공직이나 군대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기독교도들의 태도도 반감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갈리아에 기독교를 전도하러 온 자들이 대부분 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동방 사람이었던 것이 결국 ‘크세노포비 아xenophobia’를 키우는 온상이 되었다. 두 개의 그리스어 낱말을 합한 ‘크세노포비아’는 ‘외국 혐오, 외래인 공포증, 외국인 배척’이 라는 뜻이다. 236

 

황제가 중태에 빠진 것을 안 병사들은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다. 최고사령관이 죽어가고 있다는 슬픔만은 아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병 고를 견디며 전선에 병사들과 함께 있는 황제를 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황제의 목숨이 꺼져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황제의 죽음을 전우의 죽음처럼 받아들여 진심으로 괴로워하고 애석해했다.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약과 식음을 끊은 지 나흘째인 3월 17일 황 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눈을 감았다. 59세 생일을 한 달 앞둔 때였다. 황제로서의 치세는 19년에 이르렀다. 기질적으로는 군사 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으로 점철된 19년이었다. 245

 

공화정이든 제정이든, 국가 로마의 주권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다. 로마를 나타내는 ‘S.P.Q.R.’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 Senatus Populus que Romanus’의 약자이고, 여기에는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 Princeps’의 약자인 P도 없고, ‘황제 Imperator’의 약자인 I도 없다. 로마 황제는 주권자인 로마 원로원과 시민으로부터 통치를 위임 받은 존재다. 따라서 선제가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것 만으로는 제위에 오를 수 없다. 원로원이 제위 계승을 승인하고, 시민들한테도 동의를 얻어야 한다. 원로원 표결은 오늘날 국회에서 다수결로 신임 총리를 인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민들도 제위 계승을 인정했는지 안 했는지는 콜로세움이나 대경기장에서 판가름 났다. 이런 곳에서 열리는 행사가 당시에는 여론조사 역할을 맡고 있었다. 257

 

원래 그리스에서 시작된 스토아 철학이 로마의 엘리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그 철학이 엘리트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로마 남자

 

‘스토익’이라는 말은 스토아 철학을 실천할 때 요구되는 태도에서 유래한 형용사인데, 공무에 종사하는 로마 엘리트들의 태도는 참으로 ‘스토익’하다. 아니 마땅히 스토익해야 한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사무관료 이외에는 무보수인 국가 요직을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 렀을 정도다. 260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사는 방식에는 귀천이 있다. 노예라도 깨끗하게 인생을 마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라쿠스 형제 가운데 동생과 생사를 같이한 노예.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했을 때, 카이사르 휘하의 최고 무장이고 카이사르와 함께 그해의 집정관을 맡고 잇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조차 겁에 질려 카이사르의 주검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카이사르의 시신을 수습하여, 피묻은 단검을 든 살인자들이 멋대로 날뛰고 있는 도심을 지나 사저로 돌아온 세 명의 노예,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를 끌면서 걷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데다 말을 더듬는 버릇까지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살갑게 도와주고 마지막 에는 독살당한 황제와 운명을 같이한 나르키소스, 노예제 사회이기는 했지만 이처럼 계급을 초월한 인간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폐해도 있었다. 노예나 해방노예는 그들의 삶을 규제하는 ‘과거’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만 중시한다. 그들이 섬기는 주인 이 앞으로도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주인이 최고권력자인 황제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현재’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돈’이다. 노예 출신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서면, 우선 돈을 긁어모을 궁리부터 했다. 클레안드로스도 축재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308-309

 

 

180년부터 192년까지 계속된 콤모두스의 치세는 처음 5년이 페렌니스 시대, 다음 4년은 클레안드로스 시대였다. 그 다음에는 콤모두스가 친정하는 시대가 찾아와도 좋았을텐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28세가 되도록 무언가에 기대지 않으면 서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치세의 마지막 3년 동안에도 세 사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314

 

 

정통성과 실력은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둘 다 권력행사에 꼭 필요한 것이다. 후세가 정통성과 실력의 타협점을 찾은 결과 도 달한 곳이 바로 입헌군주제다. 실력주의로 일관하면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경우에는 내란이 일어 난다. 322

 

군대는 로마 시대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의 경우에도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조직임을 절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처럼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실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조직은 별로 없다. 난세는 하극상의 시대이기도 하다. 조상 대대로 원로원 의원을 지낸 집안 출신이라든가 유력자와 인척관계라는 것은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생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힘과 지혜다.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힘과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325

 

 

열 명을 이치에 맞는 말로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백 명을 말로만 설득하기는 어렵다. 천 명을 말로만 설득하는 것 은 불가능하다. 근위대는 1만 명의 집단이었다. 그래서 선동이 먹혀 들기도 하지만, 선동자가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만 명 단위의 집단을 장악하려면 무언가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카리스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카리스마도 때를 놓치면 효과가 없다. 338

 

 

‘국가의 적’으로 선언되었음에도 과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본국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장 머리에 떠오른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동포인 로마인과 싸운 것은 같지만, 싸워서 이긴 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술라는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반면, 카이사르는 공공연히 적대한 사람들도 용서하고 무조건 석방했다. 세베루스는 술라의 방식을 따르게 된다. 다만 일을 추진하는 방식은 술라와 달랐다. 세베루스는 상황이 요구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도 하나의 전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술라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상황을 바꾸었다. 355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인간사회의 진실이지만, 세베루스의 군단병 처우개선책도 그런 사례일 것이다. 인류 역사는 악의라고 말할 수 있는 냉철함 덕분에 성공한 사례와 선의로 시작되었지만 실패한 사례로 거의 뒤덮여 있는지도 모른다. 선의는 자선처럼 즉석에서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인간성 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한 역사를 알면 알수록 우울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394

 

세베루스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형제가 서로 아끼면서 사이 좋게 나라를 다스려라. 병사들을 우대하고, 그것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한 세베루스는 혼자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 가 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해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다 헛된 것 같구나.” 412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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