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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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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승리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치세는 아버지가 죽은 해인 서기 337년부터 그 자신이 죽는 361년까지 24년이다. 처음 3년은 삼형제가 제국을 나누어 다스렸고 그 후 10년은 동생과 둘이 분담해서 통치했지만, 그 동안 줄곧 콘스탄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였으니까 황제로서의 통치는 거의 4반세기에 이르렀다.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아우구스투스’가 된 뒤의 치세는 25년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무려 반세기 동안 로마 제국을 지배한 셈이다. 7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우대정책이 성직자의 공무 면제, 세금 면제, 독신자에게 불리했던 원수정 시대 세금제도의 폐지로 진행 된 것은 ‘지배의 도구 instrumentum regni’로서 기독교 진흥에 온 힘을 다하기로 결정한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지나칠 만큼 당연한 방 향이었다. 100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2대에 걸쳐 실시한 기독교 진흥책을 시대순으로 구분하면 다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 기독교를 공인하여 다른 모든 종교와 동등한 지위에 놓는다.
제2단계: 기독교만 우대하는 쪽으로 확실히 방향을 튼다.
제3단계: 배격하는 표적을 로마의 전래 종교로 명확하게 좁힌다.
제1단계와 제2단계의 본질적인 부분까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제2단계의 나머지와 제3단계까지는 아들인 콘스탄티우스가 맡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104-105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에서는 속주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을 동경했고, 사회 하층계급 출신의 꿈은 지방의회 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군단 출신과 해방노예가 지방자치단체의 공직에 앉을 수 있는 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미 열어 놓았다. 그런데 제국 후기에 이르자 지방의회 의원이 되려는 사람이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 정책을 계승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직업세습제를 시행하여,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거부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제국 후기의 독특한 탈세수단을 낳았다. 탈세를 위해 성직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기독교회에 속한 성직자의 세금을 면제하기로 결정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유력자 계층이 눈사태라도 난 것처럼 일시에 기독교화한 진짜 원인 은 여기에 있었다. 152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개인 사이의 약속을 지키느냐 마느냐는 신의의 문제지만 국가 사이에 이루어진 협정을 지키느냐 마느냐는 국익의 문제다. 255

 

야만족은 제국 서방 전역에 걸쳐 침입을 되풀이했지만, 그래도 발렌티니아누스는 그들을 격파하여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을 틈도 없이 각 전선을 뛰어다니며 계속 진두지휘를 맡았다. 유능한 인재는 출신 민족을 문제 삼지 않고 발탁하여, 혼자서 는 다 소화할 수 없는 지방의 전투를 맡겼다. 그 자신이 북방 야만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10년 동안 로마군 장수들 가운데 야만족 출신의 비율은 계속 높아졌다. 다만 특기할 만한 것은 그런 야만족 출신 장병들이 로마 제국을 위해 같은 야만족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을 배신한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하다.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에서는 속주 출신들이 로마화의 열의를 보여주었지만, 로마 제국 후기에도 로마인이 되려는 야만족 출신의 열의는 뜨거웠다. 로마의 이런 매력이 무엇에서 유래했는지는 한번 생각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렌티니아누스도 로마인이 되려고 애쓴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296-297

 

공화정이나 원수정 시대의 로마를 모르는 야만족 출신에게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부터 계속 기독교 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로마였고, 그런 로마제국에서 로마화란 곧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었다. 그라티아누스가 교육에서 얻은 ‘플러스 면’은 라틴어밖에 몰랐던 아버지 발렌티니아누스와 달리 그리스어도 습득했다는 것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제국을 동생과 양분했을 때, 풍요로운 동방을 동생 발렌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방을 맡은 것은 동방의 공통어인 그리스어에 서툴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299

 

4세기를 4분의 1쯤 남겨둔 이 무렵이다. 훈족에 대해 동시대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훈족은 야만족 중의 야만족이다. 음식도 불로 요리할 줄 모르고, 다른 것을 넣어서 요리할 줄도 모른다. 말을 몰 때 사타구니 사이에 끼워서 숙성시킨 고기를 날것으로 먹는 다. 키는 작지만 체격은 건장하고 동작은 팔팔하고 재빠르다.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납작한 고깃덩어리이고, 검은 점 두 개가 움직이고 있어서 그것이 두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염은 거의 없다. 그 원인은 어머니 젖을 빨고 있을 무렵부터 단검으로 얼굴의 털을 항상 깎아서, 상처나 피에 익숙해지도록 키우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땅에 꽂힌 칼을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경한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갖고 있지만 짐승처럼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 훈족은 옛날부터 숲 속에 살고 있었던 악령과 고트족한테 쫓겨난 마녀의 결합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다. 301

 

서기 379년 1월 19일 중부유럽 특유의 겨울비가 섞인 찬바람이 살을 에는 날이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참패를 당한지 다섯 달 뒤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어 기독교회가 ‘대제’라는 존칭을 바치게 된 또 한 사람의 로마 황제는 이렇게 등장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처형된 죄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자기 부하가 없었다. 로마군 장병들 앞에 낙하산으로 내려오듯 나타난 ‘최고사령관’이었다. 게다가 그는 로마화의 역사가 제정의 역사와 겹칠 만큼 오래된 에스파냐 출신이다. 317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결단을 내렸다. 고트족을 도나우 강 북쪽으로 몰아내지 않고 도나우 강 남쪽에 정착지를 주기로 한 것이다. 여기 에는 그라티아누스 황제도 동의했기 때문에, 이 결정은 두 황제의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서고트족에게 주어진 지방은 트라키아 북부, 도나우 강 하류에 접해있는 일대였다. 이곳은 오늘날의 불가리아에 해당한다. 나중에 이주 대열에 합류했지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에서 서고트족과 함께 싸운 동고트족에게는 도나우 강 중류 유역에 있는 판노니아주의 동부 일대가 주어졌다. 이곳은 오늘날의 세르비아 ­ 몬테네그로에 해당한다. 321 ‘자기 땅을 경작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아그리쿨토르 agricultor’는 사라지고, ‘남의 땅을 경작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콜로누스 colon us’가 된 것이다. 농민도 아니고 노예도 아닌 ‘농노’라고 번역한 것은 절묘하다. 전에도 농사에 종사하는 노예는 있었지만, 농노는 자유 시민이면서 일의 내용과 법적 지위는 노예와 똑같았다. 땅 주인이 농지를 팔 때는 농노도 함께 딸려서 매매되는 것이 예사가 되었다. 325

 

이탈리아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 가운데 ‘우오모 디 투테 레 스타조니 Uomo di tutte le stagioni’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모든 계절 에 적합한 남자’인데, 어느 시대나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고 게다가 그 속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암브로 시우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나는 먼저 이 표현이 머리에 떠오른다. 327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시즌 개막일이12월 7일인 것도 암브로시우스의 주요 취임을 축하하는 데에서 유래했다. 330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벌충 하는데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장래의 번영을 쌓아올 리는 데에도 이미 번영을 이룩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과거는 우리 조상들이 경의를 바 쳐온 신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별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같은 우주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밑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의지하는 지주가 달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겠습니까. 그렇게 큰 삶의 비밀을 풀어주는 길이 단 하나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355

 

기독교회가 기독교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의 창안자인 콘스탄티누스에게 준 ‘대제’라는 존칭을 테오도시우스에게도 준 것은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비로소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의미한 ‘이교’가 ‘사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교라면 자기가 믿는 종교와는 다른 종교를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사교라면 부정하고 해로운 종교라는 뜻이고, 그 나라의 제도나 도덕에 어긋나는 정교로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종교가 된다. 363-364

 

서기 393년에는 이교와 기독교의 투쟁 역사상 로마 원로원의 유피테르 유죄 판결 못지않게 상징적인 법률이 공포되었다. 그것은 올림피아 경기대회를 완전히 폐지하기로 결정한 법률이다.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4년에 한번 개최된 이 경기대회가 제우스(라틴어로는 유피테르)신에게 바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느 때에는 늘 다투기만 하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올림피아에 모여 승자와 패자의 구별 없이 기량을 겨루는 것이 고대 올림픽의 특징이었다. 제1회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무려 1169년 만에 막을 내렸다. 따라서 서양역사에서는 서기 393년이라는 이 해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공식적으로 끝난 해’라고 불린다. 나는 전쟁 중인 나라나 패배한 나라의 선수를 배척하는 근대 올림픽을 고대 올림피아 경기대회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375-376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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