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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3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는 것으로 시작된 로마 제정을 역사에서는 ‘원수정’이라고 불러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절대군주정’ 과 구별한다. 라틴어의 ‘프린켑스, Princeps’를 ‘원수’라고 번역했지만, 원래의 뜻은 ‘로마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일 뿐 국가 로마의 주권자라는 의미는 없다. S.P.Q.R는 로마를 나타내는 약어인데, 이것은 ‘로마 원로원 및 시민’이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바로 국가 로마의 주권자다. 75-7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각 황제의 담당 구역을 다시 ‘디오케시diocese,관구’롸 나누고, 황제 대리를 의미하는 ‘비카리우스, vicarius’가 각각의 관구를 다스리도록 행정조직을 개편했다. 하지만 앞의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인구가 적었던 1700년 전이라 해도, ‘황제대리’가 맡는 지역이 너무 넓다. 그래서 ‘디오케시’를 다시 ‘프로빙키아’로 세분했다. 88

 

로마도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이상, 주역은 시민이다. 시민의 권리는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고 의무는 무기를 들고 공동체를 방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역이 ‘피의 세금’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래서 고대인은 패배자가 되지 않는 한 직접세를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고대는 본질적으로 간접세 사회였다. 이 사회에서 ‘넓고 얕게’를 실현하려면 승자인 로마인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 일을 해냈으니까,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세제는 고대에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는 ‘팍스 로마나’를 확립하고 오랫동안 유지한 공적은 압도적으로 강하고 기능적이었던 로마제국의 방위력 못지않게 세제에도 있다고 확신한다. 세제는 단순한 세금 이야 기가 아니라 정치의 잘잘못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편성한 로마제국의 제제는 기본 방침도 간단 했지만 세금의 종류도 간단했다. 102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유일한 최고 권력자였다. 최고 중의 최고인 그가 ‘이익의 사회환원’에 열을 올리자, 그 열의는 수평적으로는 속주에 전염되었고, 수직적으로는 원로원 의원들만이 아니라 로마사회에서 성공한 해방노예에까지 전염되어갔다. 이리하여 로마식 ‘노블레스 오블레주’는 제정 시대에 더욱 활발해졌다. 112

 

전혀 진정되지 않는 인플레이션에 절망했는지 통화개혁을 단행한지 6년이 지난 301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인류 역사상 최초 의 가격 통제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로마 제국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모든 물산과 용역의 상한가를 정하고, 그 이상의 액수로 거래한 자는 엄벌에 처하기로 한 것이다. 가격 단위가 모두 옛 화폐인 데나리우스 은화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밀도 포도주도 상하 등급은 구별된다. 다만 교사나 변호사에 대한 보수에는 상하 구별이 없다. 능력 차이가 보수에 반영되지 않는 것은 통제경제의 특징일까 123

 

 

그리스 로마의 종교가 다신교인 것은 인간이 신의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분야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고, 유대교나 기독교가 일신교 인 것은 인간을 관리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절대 권위는 유일신이 가져야만 비로소 절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127

 

제1차 ‘사두정치’에 참여한 네 사람과 제2차 ‘사두정치’에 부제로 임명된 두 사람을 합한 여섯 명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1) 3세기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가 ‘제국의 방위능력을 재는 시금석’이라고 썼을 만큼 중요한 도나우 방위선에 가까운 발칸 지방 출신이라는 것. (2) 모두 로마 사회에서는 하층계급 출신이라는 것 (3) 모두 젊은 나이에 입대한 로마군에서 잔다리를 밟아 출세했다는 것. 154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태어난 곳은 아드리아해에 면한 달마티아 지방의 도시 살로나로 여겨지지만, 그가 여생을 보낼 곳으로 선택한 땅은 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외떨어진 스팔라툼이었다. 로네상스 시대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기지로 삼았기 때문에 스팔라토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크로아티아에 속해 있고, 이름도 슬라브식으로 스플리트라고 불린다. 157

 

전투를 앞두고 전략과 전술을 세울 때는 몇 가지 기본적인 것만 결정해두고 나머지는 전쟁터에서 전황을 보아가면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법이다. 미리 면밀하게 세부까지 결정해두면 거기에 속박되어, 전쟁터에서 자주 일어나는 뜻밖의 전개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리키니우스는 부제도 지내지 않고 단번에 정제로 발탁된 경력 때문인지, 전쟁터라는 수라장을 실제로 충분히 체험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정제에 취임한 뒤에도 그는 계속 전투를 피했다. 그런 사람이 생애 최대의 결전을 앞두고 미리 면밀한 전략전술을 세웠겠지만, 그것도 필경 책상머리에서 짠 작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지휘한 병력은 16만 5천명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그 대군이 세부까지 결정된 작전대로 움직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래서는 난전으로 발전하기 쉬운 전쟁터에서 장병들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261

 

 

역사가들 중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도래와 함께 로마사 서술을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때부터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는 이 유 때문이다. 공화정과 제정 시대를 통해 로마적이라고 여겨진 많은 특질들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결정적으로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미 3세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질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한 일은 로마적인 ‘특질’을 완전히 매장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더 이상 로마사를 서술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265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로마에 있는 전차경주용 ‘경주장circus’도 없고, 육상경기용 ‘경기장stadium’도 없었지만, 구조는 ‘경주장’과 똑 같은데 ‘히포드로무스, hippodromus’라고 불린 것은 있었다. 라틴어가 아니라 경마장을 뜻하는 그리스어 이름으로 불린 것은 정말 경마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로마 시대에는 가장 인기가 있었던 네 마리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경주에도 사용되었는지, 그리스어권이라서 그리스식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272

 

수많은 부족의 연합체였던 왕정 시대의 로마에서 300명이나 되는 부족장을 모아서 왕에게 조언이나 권고를 하는 기관으로 설치한 것 이 로마 ‘원로원’의 시작이다. 따라서 원로원은 로마가 건국된 기원전 753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바뀐 뒤 원로원의 역할은 완전히 달라졌다. 왕정을 폐지하기 위해 움직인 사람이 유력한 원로원 의원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 화정에서는 원로원이 주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276

 

원로원 의원은 무급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재력과 재능도 있는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여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의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보수로 국가 요직을 맡는 것을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렀다. 카르타고와 사투를 거듭한 포에니 전쟁 에서 로마가 고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한니발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최전선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사는 1년마다 교대해도 그들만은 최전선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그들의 태반이 승리를 보지 못하고 전사했다. 사령관급과 병사급이 전사한 비율의 차이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원로원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는 정치와 군사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까지도 선택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원로원이 주도했다. 277

 

 

또한 원로원의 존재이유 가운데 하나인 입법기관 역할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황제의 생각은 원로원의 의결을 거치 지 않고 칙령이라는 형태로 곧장 국가정책이 되었다. 원수정 시대라면 ‘잠정조치법’이라고 번역해야 할 라틴어 낱말은 이제 ‘칙령’이라 고 번역하는 편이 더 적절해졌다. 그리고 황제 혼자서 국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가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법안은 황제 마음대로 폐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법치라는 면에서도 로마는 확실히 중세화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비법치국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282

 

어쩌면 황후와 그 의붓아들의 불륜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파우스타는 친오빠 막센티우스의 나이로 추측하면 이 무렵 마흔 살 안팎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략결혼 상대인 콘스탄티누스와의 사이에는 세 아들이 태어났다. 다만 세 아들의 아버지인 남편은 권력 투쟁이라고는 해도 황후의 아버지와 오빠를 죽였다. 그래도 모든 것을 가슴에 숨기고 콘스탄티누스의 아내로 2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파우스타보다 적어도 열 살은 젊은 크리스푸스가 그런 황후를 동정하여 살갑게 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년여자의 사랑은 젊은 여자의 경우처럼 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서 태어난다. 들키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296

 

대제라는 뜻의 ‘마그누스Magnus’를 붙여 부르는 역사상 인물은 머리에 얼른 떠오르는 사람만해도 세 사람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고 샤를마뉴다.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젊은 영웅 알렉산드로스를 빼면, 서기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와 9세기 초의 샤를마뉴는 기독교와 관계가 깊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이고, 로마 제국이 존재했던 시대에는 북방 야만족의 한 부족이었던 프랑크족의 왕 샤를은 서기 800년에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을 받은 사람이다. 305

 

‘밀라노 칙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명기되어 있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마치 18세기에 나타날 계몽주의 시대의 인권선언을 선취한 느낌이지만, 그 계몽주의 시대에서 다시 300년이 지난 21세기가 되어도 그것을 읽을 때마다 감개가 새로운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종교를 기치로 내걸고 싸움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읽게 하고 싶다. 게다가 ‘밀라노 칙령’은 제국의 각 지방에서 실제로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장관에게 말하는 부분에서 그 주된 취지를 다시 한번 되풀이 하고 있다. ‘기독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똑같이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그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그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16

 

일신교에서는 교조의 언행이 가장 중요한 교리가 된다. 그 교리는 그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설명하는 사람을 통해 비로소 일반 신자와 연결된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는 다신교에는 전업 제관이나 성직자가 필요 없는 반면, 일신교에는 성직자 계급이 필수불가결한 것은 그 때문이다. 교회 재산의 필요성은 우선 그 성직자들을 부양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두 번째 필요성은 물론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사업이다. 기독교가 침투하기 전의 로마인도 불우한 사람에 대한 자선행위를 ‘카리타스 caritas’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도 기독교 관계자들의 이런 비영리 자선사업을 ‘카리타스’라고 부른다. 318

 

지방의회 의원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직업선택의 자유도 없이 아버지의 직업을 세습해야 한다. 게다가 부유층으로 간주되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그 세금은 금화로 바꾸어 내야 한다. 환전할 때마다 재산은 줄어든다. 성직자가 되기만 하면 이런 불리함은 모두 사라진다.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누스가 성직자의 세금을 전액 면제해 준 것이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생활비도 교회가 대준다. 그래서 교 회에도 재산이 필요했지만. 316

 

하지만 기독교도가 아닌 나도 심위일체설을 선택한 기독교 성직자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진실에 이르는 길을 들은 것만으로는 진심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구원까지 바라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진실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가 있다. 예수가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끝났다면, 자신의 생각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점에서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와 동격이 된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인간 예수는 그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구원을 체현하게 되었다. 부활 과 승천을 통해 ‘불가지’한 존재가 된 예수는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인간에게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335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전해주는 플라톤의 ‘대화’와 신약성서는 둘 다 베스트셀러지만, 지난 2천 년 동안 팔린 부수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차이는 진실에 이르는 길을 말해주는 책과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책이 일반 선남선녀들에게 갖는 수요도의 차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4세기에 아리우스의 설보다 ‘삼위일체’설을 선택한 기독교회의 판단은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믿느냐 안 믿느냐에 기반을 두는 종교조직으로서는 참으로 적절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설을 채택했기 때문에 세계종교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이것을 결정한 것이 콘스탄티누스가 주도한 니케아 공의회였다. 335

 

누가 한 말인지는 잊었지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로마인은 세 번 세계를 지배했다. 처음에는 군단으로, 다음에는 법률로, 마지막에는 기독교로.” 336

 

요시다 시게루(吉⽥茂, 1878-1967), 일본의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후 격동기에 여러 차례 총리를 지내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했으며, 최후의 병상에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자기는 ‘천국 도둑’이라는 농담을 남기고 타계했다.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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