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로 치닫는 제국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구절로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불행을 안고 있다.” 이 말을 역사에 적용하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융성의 시대는 어느 민족이나 비슷하지만, 쇠퇴기에 접어들면 저마다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15
후세의 역사가나 연구자들은 대부분 3세기의 ‘위기’를 초래한 요인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의 침입 격화
-경제력 쇠퇴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기독교의 대두. 16
로마 제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기축통화는 크게 나누면 ‘아우레우스 금화’와 ‘데나리우스 은화’와 ‘세스테르티우스 동화’의 세 종류 다. 그중에서도 ‘데나리우스 은화’는 유통 정도로 보아 특히 중요했다. 은본위제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속주에 파견되는 관료의 급료와 군단병의 연봉도 모두 데나리우스 은화로 표시되었다. 52
기원전 23년에 실시된 통화개혁으로 ‘1아우레우스=25데나리우스=100세스테르티우스’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체제가 87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다가 64년에 네로 황제가 조금 손질했다. 52
속주 태생이라도 로마 시민권만 갖고 있으면 어떤 분야에서도 활약할 기회가 주어져 있었으니까 로마 제국은 정말로 국제적인 ‘레스 푸블리카(국가, 공동체)’였다. 또한 로마라는 ‘레스 푸블리카’가 갖고 있는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자신들이 법체계를 만들어놓고도 법률을 사회와 동떨어진 서재의 학문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녀에게 가르치는 교양과목에 수사학, 논리학, 기하학, 역사, 지리 는 있는데 법률은 없다. 법률(lex)은 각기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함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 한 규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9-100
238년이라는 해는, 3년 전부터 황제였던 막시미누스, 그해에 즉위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 거기에다 푸 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합하면 무려 다섯 명의 황제가 나타났다 사라진 해가 되었다. 남은 것은 열세 살의 소년뿐이었다. 일찍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빈정거린 적이 있다. 평소에는 분열해 있지만 자기네한테 해가 미칠 것 같으면 일치단결하는 것이 원로원은 반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그들의 동료인 고리디아누스 부자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죽음을 목격했다. 원로원이 황제로 옹립한 사람이 줄줄이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원로원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로마 원로원은 원로원이라는 명칭이 연상시키는 것과는 달리 공적을 세우고 명성을 얻은 노인들의 집단은 아니다. 건국 초기의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정치체제는 바뀌었 지만, 국가 요직에 내보낼 30세 이상의 인재를 모아두는 기관이라는 원로원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194-195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은 둘 다 중동지역을 북부와 남부로 가르고 있는 타우루스 산맥에서 발원한다. 하지만 많은 지류를 모아 큰 강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티그리스 강은 동쪽, 유프라테스 강은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두 강 사이의 땅’을 뜻하는 메소포타이마를 사이에 두고 티그리스 강은 남쪽, 유프라테스 강은 남동쪽으로 흘러간다. 이 두 강이 가장 접근하는 지대에, 고대에는 바빌론 그 후에는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 그 후 7세기에 이슬람이 대두한 뒤에는 북쪽으로 40Km떨어진 바그다드라는 주요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204
철학이나 예술에서는 그리스인에게 미치지 못하고, 체력에서는 육식민족인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인에게 뒤떨어지고, 기술력에서도 에트루리아인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그 정도의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고, 경제적 재능에서는 카르타고인이나 유대인에게 훨씬 미치지 못한 것이 라틴 민족이었지만, 그 로마인이 이런 민족들을 모두 산하에 넣은 대제국을 세우고, 게다가 오랫동안 그 제국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은 자기가 가진 힘을 합리적으로 철저히 활용하는 데 집착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성공의 진짜 요인이었다. 215
로마 제국에서는 지방의회 의원도 원로원 의원과 마찬가지로 무보수였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혜택받은 사람은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책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보수일 뿐만 아니라 공공사업 비용까지 부담하기 때문에 지출도 따른다.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재산의 사회 환원을 동반한 명예직이었다.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남자들이 무보수로 국가 요직을 맡는 것을 ‘명예로운 경력, (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말했지만, 지방자치단체의 공직은 로마 사회 중산층에 속하는 시민에게 ‘쿠르수스 호노룸’이었다. 이런 실정에서도 치열한 선거를 치르겠다고 출마하는 사람이 부족하지 않은 것은 공화정과 제정의 구별 없이 로마인의 공공심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218
페르시아군은 회전에는 약해도 침입이나 침략에서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그들의 주전력이 중무장 기병이기 때문이다. 중무장 기병 이 전투에서 주역을 맡게 되는 중세를 거쳐 근대가 되면, 창이 소총으로 바뀌고 중무장 기병은 용기병으로 바뀌었다. 현대가 되면 그 용기병도 전차로 바뀐다. 중무장 기병도 전차도 돌격력으로 승부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260년대에 로마 제국의 동방은 페르시아의 ‘전차’에 유린당한 셈이다. 276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은 속주민을 모두 로마 시민으로 만들어, 로마 시민권을 취득권에서 기득권으로 바꾸어버렸다. 오현제 시대의 소 플리니우스는 “로마 시민권은 매력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질 수 잇게 되면 매력 따위는 사라져버린다. 국가에 공헌한 사람에게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권리였던 로마 시민권은 카라칼라 황제 이후 그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군무와 정무를 완전 분리한 갈리에누스의 법률이 로마를 비로마화하는 데 맡은 역할은 카라칼라의 칙령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나는 믿는다. 카라칼라의 칙령은 일반 시민의 의욕을 억눌렀지만, 갈리에누스의 법률은 지도층의 의욕을 억누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295
기독교가 대두한 것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에 양보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회가 로마 제국에 양보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내 가설은 다음 네 가지 사항에 대한 기독교의 대처를 바탕으로 세운 추론이다. (1) 우상숭배 (2) 할례 (3) 제국의 공직과 병역 (4) 회색 지대. 408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대두된 원인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단호하게 일신교를 관철한 것 (2) 영혼불멸로 상징되는 미래의 삶을 보장하는 교리를 세운 것 (3) 초기 기독교회 지도자들이 일으켰다는 수많은 기적 (4)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들의 순수하고 금욕적인 생활방식 (5) 규율과 단결을 특징으로 하는 기독교도 공동체
에릭 도즈(Pagan and Christian in an Age of Anxiety, 1965) (1) 기독교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배타성 (2) 기독교는 누구한테나 열려 있었다는 점 (3)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 (4)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현실 생활에서도 이익을 가져다 준 점 401-404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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