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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0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왜 중국과 로마는 국가 규모의 대토목사업을 시작할 때, 한쪽은 방벽을 건설했고 또 한쪽은 가도를 건설했을까. 물론 고대 중국에 가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시대의 로마에 방벽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중점을 둔 것이 다를 뿐이다.
기술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두 민족 모두 ‘수직’과 ‘수평’을 바꿀 수 있었으니까, 그 점은 분명하다. 또한 로마인과 외적의 침략과 무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결코 국방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팍스 로마나’가 확립되기 이전,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은 줄곧 전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벽보다 가도 건설을 우선한 것이다. 방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가도는 사람의 왕래를 촉진한다. 국가 방위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이민족과의 왕래를 차단할 것이냐, 아니면 자국 내의 왕래를 촉진할 것이냐. 두 민족의 사고방식 차이는 결국 중국과 로마라는 고대의 두 강국의 운명까지 결정하게 된다. 22

 

 

로마인은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것을 문명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문명을 뜻하는 말은, 영어도 프랑스어도 이탈리아어도 모두 라틴어의 ‘키빌리타스 civilitas’를 어원으로 삼고 있다. 29

 

로마가 강대해진 요인은 승자인 로마가 패자를 동화시킨 데 있다고 주장한 것은 ‘플루타크 영웅전’이라는 통칭으로 알려진 ‘對⽐列傳’ 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다. 승자가 패자를 동화시키는 데 다시 말해서 승자와 패자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운명체를 형성하는데 다른 어 떤 수단보다도 크게 이바지한 것이 바로 로마가도다. 33

 

 

독일과 발칸 반도에서 이집트까지 퍼져 있었던 로마 제국 전역으로 뻗어가는 동안, 의무적으로 돌을 깔아 포장해야 했던 간선도로만 해도 무려 375개로 늘어나고, 그 전체 길이는 8만 Km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다 자갈로 포장된 지선을 합치면 15만 Km나 되는 혈맥 이 로마 제국이라는 몸에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길의 선두주자가 아피아 가도였다. 50

 

기원전 220년 그 해의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비니우스는 아피와 가도와 더불어 로마 역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플라미니아 가 도 Via Flaminia’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피아’가 가장 중요한 남행 노선이라면, 가장 중요한 북행 노선은 ‘플라미니아’다. 전체 길이 는 아피아가 540Km인 반면에 ‘플라미니아’는 340Km에 불과하지만, 주로 평원을 달리는 아피아 가도와는 달리 플라미니아 가도가 지나는 곳은 대부분 산지다.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리미니까지 340Km를 차도와 인도를 합하여 10미터 너비로 뚫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난공사였을 것이다. 56

 

피라미드를 쌓은 이집트인과 도로망을 간 로마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집트인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재가 있으면 멀리서라도 가져다가 사용한 반면, 로마인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피라미드는 단 한 사람의 내세를 위한 공사 였지만, 가도는 많은 사람의 현세를 위한 공사였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로마의 공공사업이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내구성과 기능성, 그리고 아름다움이었다. 로마의 건축술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건축론 De Architectura’의 저자 비트루비우스의 말을 빌리면 ‘fir mitas, utilitas, venustas’다. ‘견고함, 편리함, 아름다운’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62

 

 

로마인은 다리를 가도의 동생이라고 불렀다. 가도는 여성명사니까 ‘누나’이고, 남성명사인 다리는 ‘남동생’인 셈이다. 오누이인 이상 비로소 내구성과 기능성과 아름다움도 실현할 수 있다고 로마인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만들어진 로마의 다리는 동시대에 타민족이 만든 다리에 비해, 또는 중세부터 근세까지 만들어진 다리에 비해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석조다리라는 점
둘째, 홍예교(무지개다리)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지리가 아니라 수평으로 놓인 다리였다는 점
셋째, 가도의 연장선상에 건설되었다는 점
넷째, 다리도 그것과 이어진 가도와 같은 재료로 포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 돌로 포장된 간선도로와 이어져 있는 다리는 돌로 포장되고 자갈로 포장된 지선도로는 다리도 자갈로 포장되었다는 이야기다.
다섯째, 다리에서도 차, 인도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
여섯째, 다리 양쪽에 개선문 형태의 아치문이 서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 이것은 다리의 출입구인 동시에 장식이기도 했다. 73- 74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경험에서 배운다는 격언이 있다지만, 나는 역사와 경험 양쪽에서 배우지 않으면 정말로 배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지식이지만 그것을 피가 통하는 산지식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3

 

팍스 로마나는 결코 적국이나 야만족의 습격에서 로마제국을 지키는 것만은 아니었다. ‘로마에 의한 평화’는 세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국경 밖의 적으로부터 로마제국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
둘째, 제국의 내분을 수습하는 것. 팍스 로마나의
세 번째 요소는 치안이었다. 115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인정했지만 다른 종교를 금지하지는 않은 반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서기 392년에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그런 이교를 철저히 배제했다. 4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지도에 기독교 대성당과 이교의 신전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은 그런 역사적 사정이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313년부터 392년까지 80년 동안 로마제국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시리아와 이집트의 신들, 일신교인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들이 지위가 역전되기는 했지만 모두 공존하고 있었다. 194

 

당시의 로마는 주변 부족들과 줄곧 전쟁만 했기 때문에 집정관은 군단을 이끌고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많다. 자연히 집정관 대신 재무관이 내정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재무관의 임무가 많아졌다. 게다가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인데 재무관의 임기는 5년이나 된다. 이것이 아피우스가 1년으로는 끝나지 않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입장을 활용한 것은 아피우스가 처음이었다. 220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를 가까이 관찰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플리니우스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의사는 남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을 이 용하여, 환자의 위험과 희생 위에 자신의 경험을 쌓아가는 직업이다. 오직 의사만이 사람을 죽이고도 책임을 면할 수 있다.” 300

 

 

마르티알리스의 풍자시에서 두 구절만 인용해보자. “물론 나는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심마코스여, 그대가 백 명이나 되는 제자를 거느리고 진찰하러 나타나 북풍처럼 차가운 백 개의 손으로 나를 만지게 한 결과, 열이 없었던 내가 고열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안드라골라는 우리와 함께 목욕을 했다. 그리고 나서 함께 유쾌하게 식사도 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는 죽어 있었다. 파우스티누스여, 이 돌연한 죽음의 원인이 뭔지 아는가? 혹시 의사인 엘모크라테스가 나오는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전에는 안과의사였던 그대가 지금은 검투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전에는 진료실에서 하고 있던 일을 지금은 투기장에서 하고 있을 뿐이다.” 300

 

 

로마인의 묘비는 D와 M이라는 두 글자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死者를 양쪽에서 부축하여 하늘로 데려가는 두 천사에게’라는 의미를 가진 약자다. 로마 서민들은 자기가 죽으면 두 천사가 데리러 와서 두 팔을 잡고 하늘로 데려갈 거라고 믿고 있었다. 312

 

한 로마인의 묘비에 새겨진 구절이다. “나는 죽어서 여기에 묻혀 있다. 이제 나는 한 줌의 재에 불과하지만 재는 흙이 된다. 흙은 대지로 침투하여 인간세계의 토대를 이룬다 . 그렇다면 나는 죽지 않고 세계 안에 살아 있는 게 아닐까.” 다른 묘비명. “목욕과 술과 여자가 ⾧壽의 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목욕과 술과 여자가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쉰 두 살까지 살았지만, 이제 그것도 끝났다.” 312

 

 

기원전 3세기 이후 로마의 유력자 집에서는 그리스인 교사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가지만, 가정교사에도 ‘브랜드’가 있었다. 최 고로 알려진 브랜드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공부한 그리스인이다. 그 다음은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소아시아의 페르가 몬이나 에페소스, 로도스 섬,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그리스인이다. 물론 브랜드에 따라 사례금에 도 차이가 생긴다. 318

 

 

로마제국의 교육제도에서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모두 사립인 것이 특징이다. 교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직접세인 속주세를 면제해주고, 이런 특혜를 받는 대신 적절한 수업료를 받고 교육에 종사하라는 것이 카이사르 법의 의도였다. 국정교과서나 커리큘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교재선택이나 교육법도 모두 교사에게 일임했다. 교육효과가 좋지 않으면 부모는 다른 학원에 아 이를 보내게 되니까. 이것은 자유시장의 자유경쟁체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331

 

 

하지만 이 로마제국에서 초등교육도 중등교육도 고등교육도 공영으로 바뀌는 시대가 온다. 기독교의 지배가 강화되는 것과 교육제도의 공영화는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교사자격도 시험을 통해 주어진다. 시험대상은 지식이나 교육능력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였다. 교재도 교회가 지정한 책 이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로마의 고전 따위는 사교도의 작품이기 때문에 논할 거리도 못되고, 사용이 허가된 것은 성서를 비롯한 성인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뿐이다. 교회는 가르치는 방법도 주의 깊게 감시했다. 다만 교사들은 정해진 봉급을 받게 되었고, 학생들의 수업료도 무료다. 의료제도가 공영화되었듯이, 교육제도도 공영화된 것 이다. 이상하게도 제국의 경제력이 왕성했던 시대에는 의료도 교육도 민영이었는데, 경제력이 쇠퇴해버린 시대에 공영화되었다. 331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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