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제의 세기
소 플리니우스는, 로마 황제란 “원로원과 로마 시민, 군대, 속주, 동맹국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통치를 위임 받은 유일한 존재이며” 그 목적은 “오직 만민의 자유와 번영과 안전보장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만민에 대한 통치자는 만민 가운데 선택된 자여야 한다”고 말 한다. 이 한마디-라틴어 원문으로는 “Imperaturus omnibus eligi debet ex omnibus”-는 계몽주의를 거친 근대 서유럽 국가의 위정 자들에게도 “늘 명심해야 할 말”이 된다. 이 구절은 영국 하원 의사당에서 라틴어 그대로 말해도 누구나 당장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 만큼 유명한 구절이다. 51
그러면 후천적으로 강대한 권력을 부여 받은 황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소 플리니우스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주인으로 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전제군주가 아니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라고.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쾌활한 동시에 진지하고, 소박한 동시 에 위엄이 있고, 상냥하면서도 당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52
트라야누스의 후임 황제인 하드리아누스 시절의 일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제사를 거행하러 신전으로 가는 길에 한 여자가 황제를 불러 세웠다. 여자는 황제에게 무언가를 청원하려고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지금은 시간이 없다”고 대답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는 황제의 등에 대고 외쳤다. “그러면 당신은 통치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발길을 돌려 여자에게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52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먼저 도발해서도 안됩니다.” 라틴어로는 ‘Non times bella nec provocas’다. 이 구절은 오늘날의 사관학교에서도 가르치는 격언이다. 55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미묘한 존재여서, 호평을 받은 일은 계속하고 악평을 받은 일은 그만두면 그걸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계속하다 보면 싫증을 내고, 악평을 받은 정책을 그만두고 정반대의 정책을 택하면 그때까지 비난을 퍼붓는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뒤늦게 이전의 정책의 필요성을 깨닫고 부활을 요구하는 일이 일어난다. 56 증세에 대한 불만 때문에 속주민이 봉기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를 피하기 이해서라도 로마는 우선 세율을 올 리지 않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둘째. 사회간접자본을 정비하여 속주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로써 속주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려고 애썼다. 세 번째 속주대책은 철저한 지방분권이다. 161
로마제국이 오랫동안 게다가 상당히 만족스럽게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 절묘한 균형을 우리며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모순되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짜맞추느냐는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었다. 로마는 ‘지방’의 내정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맡기되, 그 지자체들이 속해 있는 속주는 ‘중앙’이 통치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속주 총독은 중앙인 로마에서 파견되었다. 속주민은 이 총독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의무만 부과하고 권리를 주지 않으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로마는 총독의 통치에 불만이 있으면 중앙에 고발할 수 있는 권리를 속주민에게 인정했다. 고발은 속주 총독의 임무수행에 대해 고발이라는 형태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임기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62
타키투스와 플리니우스는 둘 다 원로원 의원이고, 둘 다 혹평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밑에서 공직경력을 쌓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보결 이긴 하지만 집정관에 당선된 것도 공통점이다. 연상인 타키투스는 네르바 황제 밑에서,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집정 관을 지냈다. 하지만 속주 총독을 지낸 것은 플리니우스 뿐이다. 타키투스는 끝내 공직 경력의 마지막을 총독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쳤다.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 속주에 파견될 당시 타키투스는 아직 건재했는데도, 그리고 둘 다 자식이 셋은 커녕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자녀를 둔 원로원 의원 우대법’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은 법률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조건도 같았는데도 플리니우스만 총 독을 지낸 것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이 법률은 지도층의 ⼩⼦⼥化 방지책이다. 관직선거에서도 셋 이상의 자녀를 둔 사람이 우선된다. 또한 모든 관직에는 몇 년의 휴직기간이 설정되어 있었지만 셋 이상의 자녀를 둔 사람에게는 그것도 면제되었다. 173
서기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 황제는 눈을 감았다. 64세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20년간에 걸친 치세를 끝낸 것이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간소한 화장이 끝난 뒤, 아내 플로티나와 생질녀 마티디아와 근위대장 아티아누스가 유골을 안고 로마로 여행을 계속했다. 대망을 가슴에 품고 동방으로 떠난 뒤 4년 세월이 지났다. 귀국한 황제를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장례식이 아니라 개선식으로 맞이했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 위에 안치된 것은 유골을 담은 항아리였다.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을 869년의 로마 역사상 처음이었다. 209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는 서기 76년 1월 24일 고대에는 시스파니아라고 불린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같은 도시 태생인 트라야누스보다 스물세 살 아래다. 기원전 3세기 말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시대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 퇴역병을 이주시켜 세운 것이 이탈리카니까, 이탈리카 태생 로마인의 기원은 모두 본국 이탈리아라고 생각해도 좋지만, 트라야누 스의 조상이 이탈리아 어디 출신인지는 알 수 없는 반면 하드리아누스의 조상은 알려져 있다. 아드리아 해와 가까운 중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하드리아다. 아드리아해라는 이름은 이곳 하드리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13
연상의 여자가 ‘약해지는’ 연하의 남자는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첫째는 아름다움이다. 단순히 용모가 준수하다기보다 아름답구나!하고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둘째는 젊음이다. 이것도 나이만 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함이 피어 오르는 풋풋한 젊음을 가리킨다. 이런 싱그러운 젊음을 전혀 느끼게 하지 않는 젊은이도 많은 반면, 생기발랄한 중년 남녀를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 번째 조건은 명석한 두뇌다. 지식보다 지력이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연상의 여인은 다음 세대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젊은이를 사랑하는 법이다.
네 번째 조건은 풍부한 감수성이다. 자칫하면 감수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남편이나 동년배 남자들한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그 마음을 자제하려고 애쓰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마지막 조건은 야심이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여자의 마음까지 자극하려면, 출세하고 싶다거나 부자가 되고 싶다는 따위의 시시한 야심이 아니라, 야심을 품고 있는 본인이 누구보다도 그 야심의 실현에 불안을 느낄 만큼 커다란 야망이어야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227-228
라틴어에 ‘인 엑스트레미스(in extremis)’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도 영어나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 그대로 쓰이는 말인 데, ‘마지막 순간에’라는 뜻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은 그야말로 ‘인 엑스트레미스’로 이루어졌다. 234
공정한 세제란 넓고 얕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라고 바꿔 말할 수 있지만, 연구자들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그것을 현실화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조세제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로마 황제들은 세율인상을 신경질적으로 피했다. 관세가 ‘20분의 1,vicesima’, 매상세가 ‘100분의 1,centesima’, 국유지 임차료(거의 영구 임대이기 때문에 세금이라고 생각해도 좋다)가 ‘10분의 1, decima’이었는데, 각각의 세율을 일컫는 라틴어가 그 세금의 통칭으로 정착한 것은 세율이 바뀌지 않았다는 가장 좋은 증거다. 256
사람들이 누구나 지니고 있는 통화는 로마 위정자들이 정책 선전에 활용해 온 광고매체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통화에 자신의 통치이념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 넣었다.
‘관용, Pietas’
‘화합, Concordia’
‘정의, Justitia’
‘평화, Pax’ 257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기간은 21년이다. 그 가운데 그가 본국 이탈리아에 있었던 것은 세 차례에 걸쳐 7년밖에 안 된다. 게다가 4 5세부터 58세까지의 13년간은 거의 줄곧 속주를 순행하면서 보냈다. 289
에스파냐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드리아누스가 숙소인 총독 관저의 정원을 혼자 거닐고 있는데, 노예 하나가 칼을 들고 덮친 것이다. 도움도 청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습격자를 제압한 황제는 변고를 알고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범인을 넘겼지만, 범인이 정신병 환자라는 것을 알고는 벌을 주지 말고 치료해주라고 명령했다. 299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엘레우시스의 비교가 예로부터 널리 퍼진 디오니소스 신앙에 필적하는 민간신앙이었지만, 디오니소스(라틴어로는 바쿠스)에게 바치는 제의는 노래하고 춤추는 유쾌한 것인 반면, 저승과 관련된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은 한밤중에 조용히 거행되었다. 또한 신자도 엄격하게 골라 뽑았다.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중적이라면 이쪽은 엘리트적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이익을 기 대할 수 있으니까 믿는 것이다. 엘레우시스의 비교가 신자들에게 보장된 것은 죽은 뒤의 안식이었다. 로마 황제는 ‘최고제사장’도 겸하고 있으니까 로마의 수호신들을 섬기는 최고책임자일텐데, 그들 중에도 이 비교의 신자가 된 사람이 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그렇다. 307
로마의 군단기지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군단기지, 보조부대기지, 성채, 감시용 요새와 망루로 이루어진 군사적 ‘방벽’ 바로 안쪽 에는 기지촌이라 해도 좋은 ‘카나바이’, 제대병들이 정착한 ‘식민도시’, 로마가 자치권을 부여한 원주민의 ‘지방공동체’ 등이 산재해 있 고, 이런 지역들이 모두 로마 가도로 연결되어 훨씬 높은 기능을 발휘하는 커다란 유기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광대한 제국을 15만 명 안팎의 군단병으로 방위할 수 있었고, 제국 전역에 도시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9
법률은 ‘선과 공정의 기술, ars boni et aequi’이란 말은 하드리아누스가 이 대사업을 맡긴 법률학자 유벤티우스 켈수스가 남긴 말이다. 321
6세기 중엽에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로마법대전, Codex Justinianus repetitae Praelectionis’을 편찬하기 400년 전에 이미 로마인은 자신들의 법령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오리엔트적, 기독교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조차도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세 법률가가 정리하여 집대성한 법령이나 판례를 엄청나게 많이 전재했다는 것이 로마법 학자들의 정설이다. 324-325
연구자들은 하드리아누스가 로마 제국 안에서도 자기 취향에 맞는 지방을 티볼리 별궁에 재현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취향에 맞는 자신의 세계를 별궁 내부에 만들려고 한 하드리아누스와 취향에 맞든 안 맞든 세계 자 체가 자신에게는 집이라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도 속주 태생 로마인과 토박이 로마인의 차이일까, 아니면 두 사나이의 ‘비르투스, 그릇’의 차이일까. 341
오리엔트에 사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 헬레니즘 시대에 오리엔트 일대를 지배한 것은 그리스인이었고, 유대 인은 오랫동안 그 지배를 받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게다가 양쪽 다 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민족인 만큼, 이해관계가 상충해 있었다 는 이유도 있다. 그리고 로마가 지배자가 된 뒤에 그리스인은 로마에 협력했는데 유대인은 종교적 이유를 내세워 협력하지 않은 것이 세 번째 이유다. 유대인이 지배자 로마에 요구한 것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평등화였지만, 그것은 사회 안에서의 평등화가 아니라 경제활동 면에서의 평등화였다. 사회 안에서의 평등화를 요구하면, 권리에는 반드시 따라다니는 의무도 완수해야 한다. 그 의무는 공무 와 군무에 종사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로마 황제에 대한 복종을 선언해야 하고, 그런 짓을 하면 자기네 신한테만 복종하도록 규정되어 잇는 유대교 교리에 어긋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의무가 부과되지 않는 경제활동 면에서의 평동화만 확보되면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방식이 의무를 완수함으로써 로마제국에 협력하고 있는 그리스계 주민의 반감을 샀다. 363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에도 ‘무세이온’을 가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그리스 아테네와 소아시아 서부의 페르가몬, 로도스 섬과 더불어 로마 세계의 최고학부였다. 아니, 인문계가 주류인 아테네나 로도스섬과 달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인문계와 자연과학 계를 망라한 종합대학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365
독일의 역사가 몸젠이 ‘로마 역사상 유일한 창조적 천재’로 평가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모국어인 라틴어에서부터 당시 국제어였던 그리스어, 생각이나 시야를 넓히는 철학과 역사, 논리적 사고와 전달방법을 익히는 논리학과 수사학, 조화와 감각을 기르는 수학과 음악 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네이티브’가 아닌 갈리아인에게 배운 셈이다. 이런 카이사르였기에 의료업에 종사하는 의사와 교육에 종사 하는 교사에게는 민족이나 종교나 피부색과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준다는 법을 최초로 제정하여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경제 적 혜택(로마 시민권을 가지면 속주세를 낼 의무가 없었다)을 주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366
서기 131년 가을에 일어난 유대 반란에는 지도자가 두 명 있었다. 바르 코크바Bar Kokhba와 라비 아키바Rabbi Akiba가 그들이다. 코크바는 구세주를 바처하며 반란을 선동했고, 유대교회 사제인 아키바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성전이라고 주장하여 종교면에서 코크바를 지원했다. 바르 코크바는 히브리어로 ‘별의 아들’을 의미했기 때문에 구세주를 자칭했지만, 라비 아키바는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절규한다. “바르 코크바야말로 유대의 왕이고 구세주다!” 유대사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회에서 되풀이되는 현상이지만, 과격파가 세력을 갖기 시작하면 온건파는 자취를 감춘다. 379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이미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같은 유대인인데도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절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 132년부터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서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적대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감정은 20세기까지 계속된, 아니 어쩌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비극적 적개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기 134년 초, 느리지 만 착실히 그물을 끌어당기는 느낌으로 진행되던 유대전쟁도 예루살렘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예루살렘은 64년 전과 똑같이 불 타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384
‘디아스포라Ddiaspora’라는 말은 ‘씨뿌리기’라는 뜻도 있으니까 반드시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유대인은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옛날부터 ‘디아스포라’의 경향이 강했다. 이익이 된다고 여겨지면 어디로든 이주하고, 거기서는 반드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왔다. 다른 민족이 건설한 곳으로 이주하기는 할망정 그 민족과 융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주는 자발적인 ‘이산’이지 강제된 이산은 아니었다. 386
로마의 종교에는 경전이 없다. 따라서 전문 사제계급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전을 일반신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주는 것이 사제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경전이 주도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사제계급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정치도 경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경전이 없고 따라서 전문 사제계급도 존재하지 않는 로마에서는 자연스럽게 정교분리가 정착되어 있었다. 388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주창한 폼페이우스나 키케로나 브루투스 같은 공화파가 승리했다면 로마는 계속 공화국으로 남았겠지만, 그 와 동시에 후세의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본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형태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한 것은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로마는 본국과 속주가 일체화함으로써 공동운명체가 되어가는 보편 제국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389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그 아름다움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나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신들에게만 나체로 표현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래서 현실의 인간이라도 나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으면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화살통을 매단 가죽띠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메게 하면 아폴론 신이 되고, 포도송이를 들게 하면 디오니소스 신이 된 다. 이 생각을 계승한 것이 로마인이다. 405
하드리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황제묘가 ‘만원’이 되었다는 이유로 새 황제묘를 짓기 시작했다. 이 묘(Mausoleum)는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청 성채로 개조되어 ‘카스텔 산탄젤로’라고 불리게 되었고, 지금도 테베레 강 서안에 우뚝 솟아있다. 412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지도자에게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이 필수불가결하다. ‘역량 Virtus’과 ‘행운 Fortuna’, 그리고 ‘시대적 필요성 Ne cessita’이다. 역량이 있고 행운을 만나도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재능이 부족하면 좋은 지도자는 아니라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424
한때 일본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마다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내세우고 싶은 사람을 뽑자’는 말이 나오곤 했지만, 이 말은 지금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것 같다. 이 기준에 비추어보면, 트라야누스 황제는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과 ‘내세우고 싶은 사람’의 비율 이 반반인 타입인 듯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분명 백 퍼센트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백퍼센트 ‘내세우고 싶은 사람’이라 해도 좋다. 하자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내세우고 싶은 사람’으로도 충분히 해나갈 수 있었던 시대에 제위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424
하루는 아내인 파우스티나가 남편의 인색함을 불평했다. 그러자 황제는 이런 말로 아내를 나무랐다. “당신도 참 어리석군. 제국의 주 인이 된 지금은 전에 가졌던 것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오.” 어쨌든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이다. “국가 소유로 돌려야 할 재산을 필요하지 도 않은데 소비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진 안토니누스 피우스인만큼 황제 즉위를 시민들과 함께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나누어주는 ‘일시 하사금’도 선대 활제들 처럼 황제금고에서 지출하지 않고 개인 돈으로 냈다. 428
하루는 아들 안니우스(미래의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정교사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 아들’에게 말했다. “현인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이 사나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참을 수밖에 없다.” 440
카르타고 출신 철학자 프론토는, 그 젊은이가 성장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으로 제위에 오르자, 옛 제자에게 편지를 써 서 보냈다. 이 편지에서 프론토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를 비교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에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를 대할 때면 그 명석한 사람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치 전쟁의 심 마르스나 저승의 신 플루토 앞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바싹 긴장하고는 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느냐 고? 애정을 품으려면 자신감과 친밀감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친밀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앞 에서는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 할 수 없다. 안토니누스는 정반대다. 나는 해를 사랑하듯, 달을 사랑하듯, 아니 인생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듯이 그도 나에게 친밀한 애정을 느낀다고 언제나 확신할 수 있었다.” 441
그리스인의 역사와 로마인의 역사를 구분짓는 가장 명호가한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스인의 역사는 도시(폴리스)들 사이의 항쟁의 역 사이고, 로마인의 역사는 내부의 권력투쟁은 있었지만 도시나 부족들 사이의 항쟁은 없었다는 점이 아닐까. 로마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를 애호하는 네로 황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올림피아식 경기대회를 로마 에 이식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4년에 한번은 도시들이 전쟁을 멈추고 올림피아에 모여 신체적 기량이나 글재주나 음악적 재능을 겨룬다는 이념이 로마인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452
같은 로마 황제지만,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통치자로서 치세를 마쳤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아버지 역할로 일관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묘사한 안토니누스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이 아닌가. 453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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