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기

로마인 이야기 15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728x90

 

4세기 초의 사람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다른 모든 종교와 똑같이 기독교 신앙을 공인했기 때문에 ‘대제’ 로 존경받았지만, 4세기 말의 사람인 테오도시우스는 이단과 이교를 일절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배척하는 일신교적 사고방식을 강행 했기 때문에 ‘대제’라고 불린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라는 유능한 ‘양치기’의 존재도 크게 작용했다. 23

 

4세기의 황제들은 제국 서방의 본거지를 로마가 아니라 밀라노에 두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야만족의 침략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중간까지 뻗어있는 제국 방위선에 집중되고 있었다.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달려가려면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로마보다 북부의 밀라노에 있는 편이 유리했다. 둘째, 기독교도가 된 4세기 이후의 로마 황제들에게 로마는 이교적인 색채가 너무 짙었다. 41

 

잃는 것은 자유와 독립이다. 하지만 농노는 물건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노예가 아니다. 농장이 팔리면 거기서 일하는 농노도 함께 딸려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직업의 세습제로 말미암아 농민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자유와 독립보다 안전과 식량을 보장받는 것을 우선했다고 해서 국력 쇠퇴에 따른 폐해를 가장 강하게 받은 이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유산 상속 등으로 주인이 바뀌는 것이 걱정이라면,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기독교 교회 소유의 농장에서 농노로 일하면 된다. 교회나 수도원 소유의 농장도 당시의 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이런 농장에 몸을 의탁하여 안전과 식량을 보장받는 것은 당시에는 효과적인 선택이었을 것이 다. 중세의 농업을 떠받치게 된 지방 호족과 교회 소유의 장원은 이렇게 태어났다. 84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로마 제국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생산자 수의 감소와 생산성 저하에 반비례하듯 비생산자 수가 늘어난 데 있었다. 지금까지 양대 비생산자는 군인과 관료였지만, 이제 로마 제국은 기독교회 관계자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85

 

기독교 국가가 된 뒤에도 개선식은 남아있었지만, 전과는 색깔이 달라졌다. 우선 백마 네 마리를 개선장군이 손수 모는 스타일은 완전히 사라졌다. 말은 여전히 백마였지만, 네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로 바뀐 듯 하다. 그 두 마리도 마부가 모는 것이 통례가 된다. 또한 개선장군이 얼굴에 붉은 물감을 칠하는 관습도 사라졌다. 얼굴을 붉게 칠하는 것은 로마에서는 신이라는 표시다. 개선장군이 적을 무찔러 백성의 안전을 지킨 공로로 그날 하루만은 ‘신’이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하지만 일신교인 기독교는 설령 하루라 해도 유일신 이외의 신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하루만의 신’을 패지하자, 전 에는 민중의 환호에 답하는 개선장군 바로 뒤에 서서 ‘모멘토 모리(죽음을 잊지 말라)’를 되풀이해 속삭이던 노예도 사라졌다. 하루뿐 일망정 ‘신’으로 만들어 놓고 동시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임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이 교묘한 균형감각이야말로 기독교화하기 전 의 로마인이 가진 특질이었지만, 로마도 이제는 그런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는 국가가 되어 있었다. 승리자의 증표였던 월계관도 자취를 감추었다. 월계수 잎을 엮어 만든 월계관은 그리스 올림피아 경기대회의 승자나 로마 황제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과 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교적인 것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기독교 국가가 된 이후 로마의 화폐에서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초상은 찾아볼 수 없다. 113

 

카이사르는 의원으로 선출되는 자의 자격연령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해놓았다.
1. 병역 무경험자-30세 이상
2. 군단병으로 병역에 종사한 자-23세 이상
3. 기병 및 백인대장으로 병역을 경험한 자-20세 이상 로마에서는 17세가 되어야 비로소 성인으로 여겨지고, 그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군대에 지원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명확히 제도화된 군단병의 만기 제대는 입대한 지 20년 뒤로 정해졌다. 그렇다면 군단병이 만기 제대하는 것은 37세에 서 40세 사이가 될 것이고, 23세나 20세에 제대하는 것은 병역에 종사하는 도중에 다치거나 병이 났기 때문이라는 이유밖에 찾을 수 없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 다치거나 병이 드는 바람에 만기 제대했을 때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도니 병사한테까지도 애프터서비스를 잊지 않은 최고사령관이었다. 119

 

나는 3세기 초에 카라칼라 황제가 로마 시민권을 기득권으로 바꾼 것과 4세기 초에 강행한 문관과 무관의 완전 분리가 로마 군사력을 쇠퇴시킨 두 가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로마는 이런 200년을 거쳐 5세기 초를 맞이했다. 스틸리코가 방위책임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던 5세기 초는 200년 동안 조금씩 굳어진 이 경향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고정되어버린 시대였다. 원수정 시대의 지도자들이 이런 로마제국을 보았다면, 그것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스틸리코를 동정하지 않았을까. 122

 

바그너의 대표작인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루어진 4부작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로마 제국 말기의 야만족으로서 로마 영토에 되풀이 침입한 부르군트족이다. 독일 서부와 남부는 고대에는 로마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바그너가 태어난 라이프치히는 로마 제국이 정복을 단념한 게르마니아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중세에 비로소 생겨난 도시다. 덧붙여 말하면,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와 베토벤이 태어난 본은, 고대처럼 게르만 지역과 로마제국으로 분류하면 로마 쪽에 들어간다. 127

 

인간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객관성이 없다. 따라서 법률로 다룰 수도 없고, 종교로 가르칠 수도 없다. 개개인이 자기한테 좋다고 생각하는 생활방식일 뿐, 만인 공통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은 아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스틸루스 stilus’, 이탈리아어로는 ‘스틸레’, 영어로는 ‘스타일’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중요하지 않아도 자기한테는 그 스타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손을 대면 자기가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67

 

황궁에 도착한 스틸리코는 스스로 칼을 풀어 하인에게 건네주었다. 지금까지 13년 동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되풀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의 앞에 황제의 거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23세의 황제는 48세가 된 충신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스틸리코 앞에 나타난 것은 올림피우스였다. 이 궁정관료는 황제가 내린 사형선고를 차갑게 낭독했다. 이유는 야만족과 공모하여 로마제국을 타도하려 한 죄였다. 원수정 시대에는 국가반역죄를 지은 사람도 변호인이 딸린 재판을 받을 수 있었지만, 후기 제정 시대에는 재판도 인정되지 않고 그날 바로 처형이었다. 서기 408년 8월 23일 당일, 참수형이 집행되었다. 170

 

동로마제국의 호아궁은 겉보기만 오리엔트 전제군주국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 알맹이도 비슷해져 있었다. 하렘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였을 것이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폐쇄적이 되는 것은 인간성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폐쇄된 공간에서는 공적인 자격을 갖지 않은 사람도 공적인 자격을 가진 사람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갖게 된다. 황제의 근친자, 특히 가까운 여자에게 는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216

 

이튿날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에 가서,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이티우스를 죽였다고 해명했다. 듣고 있던 원로 원 의원 하나가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폐하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자신의 왼팔로 오른팔을 잘라 버렸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296

 

서기 408년에 황제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를 처형한 것은 410년에 서고트족의 ‘로마 겁탈’을 초래했고, 서기 454년에 황제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이티우스를 죽인 것은 455년 6월에 반달족의 ‘로마 겁탈’을 초래하게 된다. 서로마제국이 오른팔을 잃은 것은 로마인보다 야만족이 더 잘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296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소년의 이름이 로마를 건국한 왕과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 분이다. 오레스테스는 죽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변경에 사는 로마인일수록 로마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갖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아들 로물루스를 제위에 앉힐 때 이름을 또 하나 붙여주었다. 덕분에 서로마제국 최후의 황제는 로마 건국 시조의 이름과 함께 로마제국 시조의 이름도 갖게 되었다. 그 이름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였다. 331

 

로마 제국은 이렇게 멸망했다. 야만족이라도 쳐들어와서 치열한 공방전이라도 벌인 끝에 장렬하게 죽은 게 아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 길도 없고 처절한 아비규환도 없고, 그래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소년 황제가 퇴위한 뒤 오도아케르가 대 신 제위에 오른 것도 아니고, 오도아케르가 다른 누군가를 제위에 앉힌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황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반세기 저 인 410년의 ‘로마 겁탈’ 당시에는 제국 전역에서 터져 나왔던 비탄의 목소리도 476년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332

 

어느 교과서도, 어느 로마사 권위자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해는 말하지만, ‘달’과 ‘날’은 말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아도 9월 언제쯤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게 끝이다. 그래도 건국한 해로 되어 있는 기원전 753년부터 헤 아리면 1,229년 뒤에 로마는 멸망했다. 그것은 622년 전인 기원전 146년에 일어난 카르타고의 멸망에 비해 얼마나 어이없는 종말인가. 333

 

브리타니아에서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 66년 전인 서기 410년에 이미 로마가 패권국의 책무를 포기해버렸다. 3세기가 넘게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가 버림받은 브리타니아는 로마군단이 철수하자마자, 전부터 자주 침입을 시도했던 북부의 스코트족만이 아니라 후세의 독일 북부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색슨족과 후세의 덴마크에서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는 앵글족의 위협까지도 더욱 강하게 받게 되었다. 로마 군단이 철수한 뒤, 로마화한 켈트계 브리타니아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산지가 많은 웨일스나 콘월 지방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하드리아누스 방벽 이남의 브리타니아는 게르만계 색슨족과 앵글족에게 점령되었다. 얼마 후에는 콘월 지방에도 이 게르만계 야만족의 위협이 미치게 되었고, 살 땅을 잃은 켈트계 브리타니아인은 바다를 건너 갈리아 북서부로 이주한다. 이 지방이 브르타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브리타니아인이 정착했기 때문이다. 347-348

 

수에비족이 정착한 북서부, 바스크족이 틀어박혀 있는 피레네 산맥을 제외하면 로마 시대에 히스파니아라고 불린 이베리아 반도의 대 부분은 서고트족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있었다. 히스파니아가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된 시기는 갈리아가 속주화한 것보다 200년이나 이르다. 그리고 히스파니아에서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로마제국 전성기에 제국을 다스린 오현제 가운데 무려 세 명이 배출되었다. 352

 

‘팍스 바르바리카’는 오도아케르 치하의 17년과 테오도리크 치하의 33년을 더하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직후부터 반세기나 지속되 었다. 50년 동안 야만족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고 만족할 만한 선정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이탈리아 반도가 모든 면에서 생기를 되 찾은 것도 당연했다. 자산의 3분의 1은 잃었지만 토지 임차료만 내면 땅을 계속 이용할 수 있었고, 임차료를 내야 하는 이상 전처럼 땅을 빈터로 놓아둘 여유는 없다. 387

 

만한 넓이의 작은 수도원과 ‘비바리움, Vivarium’이라고 이름붙인 배움터였다. ‘비바리움’은 원래 못자리나 양어장을 뜻하는 낱말이지 만, 그곳에서 키우는 것은 초목이나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이다. 함께 먹고 자면서 배우는 것은 그리스 로마의 저작을 교재로 한 ‘아르 테스 리베랄레스’ 전반이다. 자유로운 정신을 터득하는 데 필요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399

 

카시오두르스가 ‘비바리움’을 설립한 것과 같은 시기에 베네딕투스도 나폴리 근처의 카시노 언덕 위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곳은 카시 오도루스의 ‘비바리움’과는 달리 순수한 수도원이었고, 수도사들이 절대 복종이라는 대전제 아래 하루를 기도와 노동으로 양분한 공동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베네딕투스가 혁명적이었던 것은, 이제까지는 명상에만 몰두하여 세상과 단절된 존재로 여겨졌던 동방의 수도자상을 배제하고, 속세 와도 적극적으로 접촉하는 새로운 수도자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도 어부를 비롯하여 각자 직업을 갖고 있었다는 게 노동을 중시한 베네딕투스의 생각이었다. 401

 

베네딕투스는 수도원의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 생활의 일과표까지 결정했다. 해뜰녘부터 오전 10시까지는 노 동, 10시부터 정오까지는 소리 내어 기도하고, 그 후 가벼운 식사를 하고, 오후 3시까지 휴식을 취한다. 이 시간에도 기도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한다. 오후 3시부터 해질녘까지는 다시 노동을 하고, 해가 진 뒤에는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등 불을 켜려면 돈이 많이 드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드는 것은 성직자도 세속인도 마찬가지였다. 402

 

금욕적인 일상은 ‘비바리움’도 ‘베네딕투스 수도원’과 다를 바 없었지만, 역시 몇 가지 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노동이다. 카시 오도루스 학원의 학생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동할 의무는 부과되지 않았다. 둘째는 기도였다. 402

 

동로마 제국에서는 원로원 의원과 하층계급 여자가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도 원로원 의원이 되어 있었지만, 아름답고 도도하고 현명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아내로 삼기 위해 제국의 법률까지 바꾸어버렸다. 황제가 된 뒤에도 그의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테오도라를 황제의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황제와 거의 동격인 아우구스타로 삼는 조치를 강행하여 중신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406

 

로마제국 황제인데도 후세가 ‘대제’라는 존칭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세 사람 밖 에 없다. 후세는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한 시대니까 그들에게 ‘대제’라는 존칭을 바친 것은 기독교회다. 다시 말해서 위의 세 황제는 기 독교회가 좋아하고 인정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407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업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1. 하기아 소피아 성당 건립
2. 로마법대전 편찬
3. 옛 로마제국 영토 수복. 408

 

‘로마법대전’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긴 중세를 거친 뒤 서방에서 그 위력을 재인식하게 된다. 중세 유럽의 공통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은 모두 기독교 국가였다. 따라서 기독교 국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필터가 그대로 통용되었다. 고대 로마의 법률을 되살린 유스티니아누스를 유럽인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414

 

중부 이탈리아의 참상에 대해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비서관, 프로코피우스의 서술. “나도 실제로 그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글로 남기고 싶다. 우선 비쩍 마르고 안색이 누렇게 변한다. 음식을 보급받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육체는 옛 사람 말마따나 ‘자기 살을 먹는’ 방법으로 목숨을 이으려 하기 때문이다. 모든 기관의 기능이 떨어지면 담즙이 기관들을 침범할 만큼 퍼지게 되어, 피부색도 누렇다기보다 다갈색으로 변한다. 이 상태가 심해지 면 피부가 원래 갖고 있던 수분을 잃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건조해져서,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처럼 쭈굴쭈굴 주름이 새겨지고 그것 이 뼈에 직접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는 동안 다갈색은 납빛으로 변하고, 더욱 심해지면 검은색으로 변한다. 여기까지 오면 인간의 몸뚱이는 불에 타서 검게 변한 나무 촛대처럼 된다. 눈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저 놀란 듯이 크게 뜨여 있을 뿐이고, 대개는 그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너무나 굶주려서 체력도 극도로 떨어져 있고, 어쩌다 풀이라도 발견하여 캐 먹으려 해도 풀을 뽑을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풀을 뽑으려던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땅바닥에 고꾸라진 모습으로 죽는다.” 457

 

 

mubnoos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