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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6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팍스 로마나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세나투스’, 직역하면 ‘일보’ 또는 ‘원로원 의사록’이라고 불리는 이 법률은 원로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토론 이나 결의를 이튿날 포로 로마노의 벽면에 게시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정보공개법’이다. 22

 

옥타비아누스는 이 법을 고치는 조치를 취한다. ‘악타 세나투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속기로 기록되어 모두 ‘공문서보관소, 타불라리움’ 에 보관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23

 

‘악타 디우르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을 ‘일보’라기보다는 ‘관보’로 번역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으로 바꾼다. 수도 로마에서 결정된 모든 공적 사항, 즉 원로원 의결사항이나 공직선거 결과를 자세히 기록하여 본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의 식민도시 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알리는 ‘관보’가 된 것이다. 24

 

‘악타 세나투스’와 ‘악타 디우르나’ 그리고 5백년이 넘도록 계속 기록된 국가 로마의 공식 기록인 ‘아날레스 막시미, 최고 제사장 연대 기’가 로마인의 공식 정보원이다. 정확한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로마인인 만큼, 이 세 가지는 로마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계속 존재하게 된다. 24

 

한몸에 집중되어 있던 모든 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은 공화정 체제의 로마 시민으로서는 칭찬받아 마땅한 행위였지만, 실제로 옥타비아누스가 누린 특권은 무엇이었을까.

1. 삼두정치권(트리움비라투스)
2. 이탈리아 서약(코뉴라 디오 이탈리에)
3. 세계적 합의(콘센수스 우니베르소룸) 29

 

옥타비아누스가 포기하지 않은 권리, 집정관직 유지와 함께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였다. 로마에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을 부르는 경칭이었다. 이 칭호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은 것은 카이사르였지만, 카이사르라면 위와 같은 의미에서도 어울리는 칭호였을 것이다. 32

 

 

기원전 27년은 당시의 많은 로마인들이 공화정 복귀를 경축한 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반세기쯤 살았던 후세인들에게 기원전 27년은 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가 된다. 그 해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정식 명칭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41

 

6백명으로 정원을 줄여 원로원 재편성을 결행한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36세가 되자마자 ‘콘실리움 프린케피움(제일인자 보좌위원회 )’을 창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요즘 말로 하면 내각인데, 그 구성은 프린켑스(제일인자)인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집정관 두 명, 오늘날의 각부장관에 해당하는 법무관(프라이토르),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 재무관(켄소르), 안찰관(아이딜리스), 여기에 원로원의원 들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15명이 추가된다. 자문위원회를 뜻하는 영어 낱말 council의 어원이기도 한 이 콘실리움에서 이루어진 결 정은 ‘원로원 권고’와 똑 같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47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14년 동안 갈리아에서는 로마군 병사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내전이 끝난 뒤에도 아우구스투스 는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기원전 27년 까지 갈리아를 방치해 두었으니까 그것까지 합하면 17년이 된다. 그런데 로마는 그렇게 오랫동안 갈리아를 방치해두고도 갈리아인의 반란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카이사르의 전후 처리가 그만큼 교묘했기 때문이다. 그러 면 그것은 어떤 것이었는가. 카이사르는 정복당한 민족이 반기를 드는 것은 민중이 자주적으로 봉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층이 민중을 선동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지배층이 불만을 품는 것은 타민족에게 정복당하여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59

 

 

호민관 특권이란 호민관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리를 말한다.
1. 신변 불가침권
2. 평민 대표로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지위
3. 평민집회 소집권
4. 정책 입안권
5. 거부권(베토) 79

 

아우구스투스는 정치가로서는 카이사르보다 완벽하고 적절한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가 많다. 나중에 역사가 타키투스가 평했듯이, 아우구스투스는 유일한 승자가 된 뒤에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가지씩 권력을 수중에 넣어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한’ 반면, 카이사르는 유일한 승자가 되자마자 당장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고 억지로 혁명을 추진한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이 차이를
첫째는 두 사람의 성격차이,
둘째는 카이사르가 54세에야 비로소 ‘혁명’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아우구스투스는 33세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는 연령 차이,
셋째는 카이사르 암살에서 교훈을 얻은 아우구스투스가 절대로 죽음을 당해 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갖게 된 점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차이점도 생각해보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른바 ‘귀골’로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88

 

 

로마의 유력자들은 옛날부터 외출할 때는 ‘노멘클라토르’라고 부르는 노예를 동반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력자니까 포로 로마노를 걷고 있으면 다가와서 인사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의 이름을 전부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쪽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이면, ‘노멘(이름)’을 ‘클라토르(알려주는 자)’의 역할을 맡은 노예가 얼른 주인에게 이름을 속삭인다. 그래서 유력자도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아닌가? 참 오랜만일세.” 99

 

 

기원전 1세기 말의 로마에서는 자식을 적게 낳는 풍조가 뚜렷해졌다. 기원전 2세기까지만 해도 로마의 지도층 집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처럼 자녀를 10명이나 낳아서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카이사르 시대에는 두세 명의 자녀를 낳는게 보통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아예 결혼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 기원전 1세기 말의 로마가 가난하고 장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그와는 정반대였다. 다만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 외에도 쾌적한 인생을 보내는 방법이 늘어났을 뿐이다. 158-159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는 두 가지 법안을 제출한다. 원로원에서는 상당한 반대를 받았지만, 45세의 최고 권력자는 한 걸음도 물 러서지 않고 누구보다 강력한 권위를 내세워 그 법안을 정책화하는데 성공했다.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 법’ -정식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 법’ 160

 

자식이 없는 독신 여성은 50세가 넘으면 어떤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독신여성이 5만 세스테르티우스 이 상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 50세가 넘자 마자 이것을 유지할 권리마저 잃게 된다. 몰수되어 국고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 에게 양도해야 한다. 자녀를 낳아 키움으로써 국가에 봉사하지 않았으니까, 즉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까. 사유재산 보호를 이념으로 삼고 있는 로마법의 기본권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일까. 그러나 독신여성의 불리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남자는 직접세 면제의 혜택을 계속 누리는 반면, 2만 세스 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여자는 50세 이전이라도 남편감을 찾아 결혼할 때까지는 해마다 재산에서 들어오는 수입의 1퍼센트 를 국가에 바치도록 규정되었다. 독신여성에게만 부과되는 이 직접세는 결혼만 하면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첫아이와 둘째아이를 낳 을 때까지는 여전히 부과되다가 세 번째 아이를 낳아야만 비로소 그 의무가 사라진다. 162

 

자유와 질서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다. 자유를 지나치게 존중하면 질서가 파괴되고, 질서를 지키는데 지나치게 전념하면 자유가 사 라진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양립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169 국토의 상징이 여성인 것은 거기서 태어나 자라서 나라를 떠났다가 죽어서 돌아오는 남자들에게 국토는 어머니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이다. 194

 

가는 끈으로 묶은 도끼(파스케스, fasces)는 고대 로마에서는 공권력의 상징이었다. 이것을 어깨에 멘 길라잡이 바로 귀에는 아그리파 의 모습이 보인다. 17세때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어 실전에 서투른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 된 인물이다.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오늘 날의 아우구스투스도 없었을 것이다. 195

 

시민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은 군사제도의 변혁까지 낳게 되었다. 사회의 상층부 사람들로 이루어진 기병대 대신, 중견 시민들로 구성된 중무장 보병대가 군대의 주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고대 다음에 오는 중세에는 군대의 주력이 다시 기병대로 돌아갔고, 근대에는 다시 보병으로 바뀌었다. 마키아벨리의 ‘전략론’은 자국 국민으로 구성된 보병 전력의 복권을 주장한 책 이었다. 200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 다섯 가지다.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불굴의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 고 있었다.” -이탈리아 고교 교과서. 255

 

로마인들은 공직을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포로 로마노의 벽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도, 로마의 공식 기록인 ‘최고 제사장 연대기’에 이름이 오르는 것도 공직을 맡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영예다. 그것을 모두 희생하고 원로원 계급으로 출세하는 것까지도 포기했으니, 일생을 아우구스투스의 그림자로 살기로 작정한 마이케나스의 결의는 특이할 만하다. 259

 

 

아우구스투스는 비밀 교섭 역할을 폐업한 마이케나스에게 문화와 홍보를 맡겼다. 이것 또한 마이케나스에게는 딱 알맞은 역할이다. 후세에 문화예술을 옹호하는 것을 ‘마이케나스’, 프랑스어로 ‘메네나’라는 말로 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원래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다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으로 이집트에 토지를 사서 큰 부자가 된 마이케나스는 그 재산을 문화육성에 아낌 없이 쏟아부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시인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라틴 시문학의 거장으로 불리게 된 베르길리우스 와 호라티우스가 잘 알려져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나중에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을 순회하는 안내자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261 ‘경찰청장(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집정관 경험자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중요한 관직으로 여겨졌다는 증 거다. 경찰청장 밑에는 당연히 경찰관을 두었다. 경찰관은 3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1개 대대의 구성인원은 1천 명이니까, 수도 로마의 치안은 3천 명의 경찰관이 맡고 있었던 셈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소방청(프라이펙투라 비길룸)’을 설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방관은 7개 대대로 조직되었고, 1개 대대의 구성인원 은 역시 1천 명이었다. 수도 로마의 14개 구를 7개 대대가 맡았으니까, 1개 대대가 2개구의 소방을 맡은 셈이다. 소방관으로는 해방 노예가 많이 채용되었고, 소방대장에는 로마군단에서 백인대장을 지낸 사람이 만기 제대한 뒤에 취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방청장에 는 원로원 의원이 취임하는 예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도 로마의 위정자가 소방을 중시한 증거였다. 인구 100만 명의 도시치고 는 놀란 만큼 대화재가 적은 것도 일찍부터 소방체계가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청장이나 국장이나 담당관은 선거로 뽑히는 관직이 아니라, 황제가 주재하는 내각이 추천하고 원로원이 승인하는 임명직이었다. 따라서 임기도 1년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치는 것 이 보통이고 그 동안의 급료도 보장되었다. 요컨대 순수한 행정관료였다. 제정 로마의 정치인과 관료는 무급이냐 유급이냐로 구분할 수도 있다. 285

 

고바야시 히데오(일본의 문예비평가, 1902-1983)에 따르면 정치는 ‘어떤 직업도 아니고 어떤 기술도 아니며, 고도의 긴장을 필요로 하는 생활’이라고 한다. .. 정치인에 필요한 자질은 우선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꿰뚫어보는 인식력이다. 여기에는 자기 능력의 한 계를 깨닫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둘째는 하루하루의 노고를 쌓아 올리는 것이야 말로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믿고, 노고를 아끼지 않는 지속력이다. 셋째는 적당한 낙천성이고, 넷째는 어떤 일도 극단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균형감각이다. 60대에 접어든 뒤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이 모든 자질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318

 

훗날 마키아벨리가 주목한 특징이지만, 로마인은 위기가 찾아 들면 그때까지 적대했던 사람들끼리도 당장 일치단결하여, 실력을 인정 받은 자에게 전권을 맡기는 성향이 있다. 339

 

이듬해인 서기 7년 봄에 시작된 로마군의 반격을 총지휘하는 임무는 티베리우스에게 맡겨졌다. 이것도 역시 마키아벨리가 칭찬한 점 이지만, 로마에서는 일단 총지휘를 맡겨서 전선으로 내보낸 사람에게는 본국 정부가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전선의 총사령관에게는 무엇이든 혼자서 결정해도 좋은 문자 그대로의 ‘절대지휘권’이 주어지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340

 

전사자는 한 사람도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관계없이 로마식 장례를 치러주었다. 부상자들은 최고사령관 전속 군의관이 앞장서서 조직한 의료진의 치료를 받았다. 최고사령관 전용마차와 가마도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데 사용되었다. 티베리우스 자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줄곧 말을 타고 다녔다. 휴식도 희생한 셈이다. 최고사령관 전용 목욕시설도 부상병들에게 제공 되었고, 티베리우스 전속요리사들도 부상당한 병사들의 식사준비를 맡았다. 344

 

그래도 아우구스투스는 체념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직계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자란 아그리피나를 게르마니쿠스에게 시집 보냈다. 아그리피나는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둘째딸이고, 티베리우스의 양자인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안토니아의 아들이니까, 두 사람은 육촌남매사이다. 이 결혼에서는 3남3녀가 태어나게 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이고, 칼리굴라의 누이동생은 제5대 황제인 네로를 낳는다. 348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만 병실로 불러들여 단둘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우 구스투스 자신은 1년 전부터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서기 14년에 들어서자마자, 동시대 사람이나 후세에 알리고 싶은 것만 적 은 ‘업적록’을 마무리했다. 티베리우스에게도 자기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하여,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줄 준비도 끝냈다. 장례식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한 지시도 문서로 만들어놓았다. 후계자 지명을 포함한 유언장도 완성되어 있었다. 죽을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던 셈이다. 티베리우스와 이야기한 지 얼마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평생 동안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평온하고 조용한 죽음이었다. 서기 14년 8월 19일, 77세 생일을 한달 앞둔 날이었다. 373

 

고지식할 만큼 꼼꼼하고 자질구레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던 로마제국 초대 황제는 남의 윗자리에 서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철저히 법을 지켜야만 아랫사람에게도 법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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