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지금까지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을 석방했지만, 코르피니오에서 석방한 요인들 중에는 에노발부스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 에노발부스는 카이사르 후임으로 갈리아 총독에 임명된 인물이고, 따라서 카이사르에게는 당면한 최대의 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 편을 버리는 폼페이우스는 얼마나 다른가!” 28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카이사르 76
피아첸차에 도착하여 병사들 앞에 나타난 카이사르는 여느 때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 나는 여러분에게 사랑받는 사령관이기를 원한다. 나만큼 여러분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또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풍족해지고 전사로서의 명예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사들이 무엇이든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둔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지시를 받는 사람이다. 지시를 내리는 자에게는 책임이 있고, 지시를 받는 자에게는 의무가 있다. 스승과 제자,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이 그런 관계다. 모두 각자의 임무를 완수해야만 좋은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에서 공정한 쪽은 나라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나를 따라주었다. 하지만 입장이 아무리 공정해도, 그것을 실천해가는 단계에서 공정함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폼페이우스쪽의 부정을 비난할 자격도 잃게 되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로마 시민이다. 로마 시민인 이상, 올바른 처신을 망각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사방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어서 카이사르는 침묵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여러분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카이사르는 요구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군단의 군율에서는 최고의 중벌로 되어 있는 ‘10분의 1형’까지 언도했다. 드디어 총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10분의 1형’을 취소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형집행은 당분간 연기하겠다’ 79-80
카이사르는 이 패배로 9천 명이나 되는 병사와 40척의 배를 잃었을 뿐 아니라,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빼앗는 데에도 실패했다. 아드리아 해의 맞은편 연안을 확보하고 기다리는 폼페이우스를 공격하기에는 참으로 불리한 정세가 된 셈이다. 이런 지경에 놓였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실패로 끝난 사태를 개선하려고 애씀으로써 불리함을 만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것은 일단 그대로 놓아두고 다른 일에 성공함으로써 정세를 단번에 만회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카이사르는 후자의 대표자라고 해도 좋았다. 89
그러나 카이사르는 남을 증오하는 감정을 거부한 인간이었다. 증오는 자기와 대등하거나 아니면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는 카이사르가 열등한 사람의 감정인 증오감을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자기가 남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카이사르 특유의 자부심도 라비에누스에 대해서만은 조금 약해진 느낌을 준다. 문장에 나타날 정도는 아니고 행간에 감도는 정도이긴 하지만, 15년 동안 동지였고 게다가 단 하나뿐인 동년배였던 라비에누스의 배신을 카이사르도 완전히 삭이지는 못했던 게 아닐까. 136-137
2천 년 뒤 영국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폼페이우스는 전쟁터에서는 카이사르가 상대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디라키움에서 패배한 카이사르는 맨 나중에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던 반면, 파르살로스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맨 먼저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다. 그리고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주는 것은 지성과 정열의 합일인데, 폼페이우스에게는 그것이 모자랐다.” 194
내전은 나라를 양분한 세력이 서로 힘을 겨루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이다. 카이사르는 이런 의미의 내전은 루비콘 도하로 시작되어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비콘 강을 건넌 장면부터 시작되는 ‘내전기’는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끝나지 않고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후에도 ‘폼페이우스파’와의 전투는 계속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내전이 아니라는 카이사르의 ‘선언’이 아닐까. 197
마키아벨리는 민주적인 토론으로 매사를 결정하는 습관이 없는 민족에게 그런 습관을 이식하려고 애써봤자 헛수고라고 말했다. 198
로마세계는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대외관계와 안전보장을 로마에 의존하고 있기 대문에 실질적으로는 속국인 동맹국들과 로마가 직접 다스리는 속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로마가 속주화를 되도록 피한 것은 안전보장비 때문이었다. 속주는 로마가 직접 통치하기 때문에 내외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도 로마가 짊어진다. 속주민은 속주세를 내고 있으니까 안전보장의 의무는 없다. 반면에 동맹국은 형식적이라도 독립국이기 때문에 로마인이 그 나라 국내의 안전까지 보장할 의무는 없다. 따라서 속주세도 들어오지 않지만, 안전 보장비는 어느 시대에나 막대한 법이다. 그리고 동맹관계에 있으니까 로마가 외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에는 상호안전보장의 원칙에 따라 병력 파견까지 요청할 수 있다. 동맹국이 파견하는 지원군의 비용은 그 나라가 지불한다. 로마가 이런 나라들을 ‘로마인의 친구이자동맹자(소키우스 에 아미쿠스 포풀리 로마니)’로 대우한 것은 동맹관계를 맺는 편이 로마에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가 속주로 삼은 지방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에스파냐나 갈리아처럼 수많은 부족이 난립해 있어서 교섭 상대가 될만한 지배계통을 일원화할 수 없는 지방.
둘째, 지배계통은 일원화되어 있지만, 마케도니아나 시리아처럼, 그리고 과거의 카르타고처럼 몇 차례나 로마에 적대행위를 되풀이한 나라들. 200-201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로마세계’는 민족과 종교가 다양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도 많다. 이런 나라를 고대인은 제국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로마도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에 들어가기 200년 전부터, 즉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시대부터 이미 ‘제국(임페리움)’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또는 ‘공화국(레스 푸블리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제국은 패권국이라는 뜻이니까 정치체제가 제정이든 공화정이든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로마제국’에서의 공통 규범은 로마법이었고, 공통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였다. 216
카이사르는 제국주의자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가 일으킨 군사행동에 대해서도 적과 대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팍스(평화)는 우열이 없는 나라끼리의 대화를 통해 성립되기보다는 절대적으로 우세한 나라의 조정이나 판정을 통해, 또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물리적인 힘을 통해 성립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인간세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카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부터가 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217
카이사르와 폰토스왕 파라나케스의 양군은 카파도키아 지방에서도 흑해와 가까운 젤라(오늘날 터키의 질레)에서 마주쳤다. 수는 줄어들었지만 카이사르의 정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제6군단의 맹공 앞에서 오리엔트 병사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에 보낸 전과보고를 다음 세 마디로 시작했다고 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219
마지못해 폼페이우스 편에 선 도시들과는 달리 기꺼이 폼페이우스 편에 선 아테네 시민들에게 카이사르는 딱 한마디 빈정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러분은 죽어 마땅한 죄를 되풀이해서 짓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때마다 눈부신 업적을 남긴 조상 덕택에 용서받는 것으로도 유명하군.” 221
카이사르에게도 제10군단 병사들에게도 1년 만의 재회였다. 연단에 모습을 나타낸 카이사르는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말했다. “무엇을 바라는가?” 병사들은 저마다 제대시켜 달라고 외쳤다. 다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 전선이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북아프리카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제대를 요구하면 카이사르도 일시불이나 급료 인상을 약속하여 타협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들에게는 카이사르가 전쟁을 계속하는 한 제대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카이사르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천만 뜻밖이었다.
“제대를 허락한다.”
예기치 못한 대답에 병사들이 치켜들었던 칼은 저절로 내려가고, 요란한 외침소리도 뚝 그쳤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 덮였다. 그런 병사
들 위에 카이사르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퀴리테스), 여러분의 급료도 그 밖의 보수도 모두 약속대로 지불하겠다….”카이사르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고 자부하는
제10군단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그들을 ‘시민 여러분’이라고 부른 것에 이미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카이사르는 항상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이라고 불렀다. 234
탑수스 회전이 끝난 지 엿새가 지난 4월 12일, 카토는 우티카의 유지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로마인이 손님을 초대하는 저녁식사는 플라톤의 ‘향연’에도 나오듯이 침대형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주제를 정하여 토론하는 자리다. 로마인은 식사와 술을 곁들인 이 대화를 ‘심포시움’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의 ‘심포시온’을 라틴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대화 주제를 정하고 사회를 맡는 것은 초대자, 즉 주인의 역할이었다. 카토가 주최한 향연에서는 탑수스 회전은 화제에 오르지 않았고 오로지 철학적인 명제만 논의되었다. 그날 밤의 주제는 ‘자유란 무엇인가’였다고 한다. 262-263
열흘 안팎의 기간을 사이에 두고 네 차례로 나누어 개선식을 거행한 것은 물론 이틀에 걸친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을 의식한 것이지만, 승리한 상대가 네 나라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누어서 거행할 필요도 있었다. 즉 첫째 날은 갈리아인에 대한 승리를, 둘째 날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공주에 대한 승리를, 셋째 날은 폰토스왕 파르나케스에 대한 승리를, 넷째날은 누미디아 왕 유바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에게 거둔 승리는 개선식이라는 형태로 축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같은 로마인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기 때문이다. 269
“역사는 이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에게는 보편과 특수, 멈춤과 움직임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다. 위기에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에게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부르크하르트의 ‘세계사에 관한 고찰’ 280
로마 특유의 공화정은 해마다 선출되는 집정관 두 사람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기구를 선거를 거치지 않은 엘리트로 구성된 원로원이 보좌하고, 시민권 소유자 전원이 투표권을 갖는 민회에서 최종결정을 내리는 체제다. 행정을 담당하는 대다수가 원로원 의원이기 때문에 과두정(올리가르키아)이라고 불린다. 포에니 전쟁 시대의 그리스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정치체제를 집정관으로 대표되는 군주정(모나르키아)의 이점과 원로원으로 구현되는 귀족정치의 이점과 민회로 상징되는 민주정(데포크라티아)의 이점을 짜맞춘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찬양했다. 281
군사의 천재 한니발과 강대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끝까지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원로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지휘계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에 대한 승리는 로마의 조직력의 승리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전사자 비율도 줄곧 최전선에서 싸운 원로원 계급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282
지구가 태양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365일 6시간이 아니라 365일5시간48분46초라는 사실을 토대로 한 그레고리우스력이 유리우스력을 대신하여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11분 14초의 오차를 판정하는 데 무려 1천627년이나 걸렸으니까, 율리우스력은 그것이 만들어졌을 당시로서는 경이적일 만큼 정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력도 11분14초만 정확해졌을 뿐 달력의 개념은 율리우스력과 똑같다. 290
기원전 202년에 한니발을 무찌른 뒤 갈리아 정복이 끝난 기원전 50년까지 로마는 고도성장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한니발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육체가 먼저 성장해버린 탓에 내장의 발달이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시대이기도 했다. 로마의 내장, 즉 정치체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의 로마를 통치하기에 적합한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가 점유하고 있던 영토는 루비콘 강에서 메시나 해협까지 뻗어있는 이탈리아 반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그 영토가 급속히 팽창했다. 지중해는 외국과의 경계가 아니라 ‘우리 바다(마레 노스트룸)’이자 ‘내해(마레 인테룸)’로 변했다. 그러나 내장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만 영유하고 있던 시대의 통치체제였다. 모순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이 모순을 맨 먼저 지적한 것은 그라쿠스 형제였지만, 그후 로마는 승자의 혼미에 시달리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강대해진 육체에 걸맞는 내장을 로마에 주고자 했다. 바꿔 말하면, 국가 로마를 고동성정기에서 안정성장기로 이끌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297
모든 주민이 속주민의 지위에서 벗어나 로마 시민이 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갈리아인 집단촌에 불과했던 메디올라눔(오늘날의 밀라노)이나 타우리노품(오늘날의 토리노)에도 로마인 도시와 같은 도시계획이 시작되었다. 루비콘 강이나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도 이제 더 이상 본국과 속주를 가르는 경계선은 아니었다. 299
로마의 사법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소권과 배심원이었다. 어떤 죄를 지은 사람도 재판을 하지 않고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은 그라쿠스 형제 가 운데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제안으로 성립되었다. 이 법은 반체제파인 호민관의 제안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원로원파의 반격을 받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비상사태 선포로 대항했다. 그 대상이 된 사람은 반역자로 규정 되어 재판절차도 없이 또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즉각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다. 원로원은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셈이다. 이 무기에 처음으로 희생된 사람이 ‘셈프로니우스 법’의 입안자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였다. 그후로는 ‘원로원 최종권고’가 남발된 반면, 그 와 반비례하여 ‘셈프로니우스 법’은 차츰 유명무실해졌다. 317
인간의 행동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도다. 319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에서 ‘아르테스 리베랄레스(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와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인종도 피부색도 따지지 않는다. 민족과 종교의 차이도 문제삼지 않는다. 조건은 단 하나. 로마에서 교사나 의사로 일 하는 것뿐이었다. 로마 시민이 되면, 우선 속주세로 대표되는 직접세를 면제받는 이점이 있다. 둘째, 로마 법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는 다는 의미도 있다. 339
생전의 카이사르는 이런 말도 했다.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381
브루투스가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카이사르를 제외한 로마인은 모두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뜨렸다. 군중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야유하는 소리도 없었지만 환호하는 사람도 없었다. 브루투스에 이어 킨나가 연단으로 올라갔다. 킨나는 암살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변고를 알자마자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달려가 암살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힌 인물이다. 그 킨나가 카이 사르를 비난하는 연설을 시작하는 순간, 이제까지 침묵하고 있던 군중이 폭발했다. 카이사르의 유해는 장례식도 허용하지 말고 테베 레 강에 던져버리는 것이 폭군에게 어울리는 처사라는 킨나의 말은 당장 일어난 고함소리에 묻혀버렸고, 성난 군중은 킨나와 브루투 스가 서 있는 연단을 향해 몰려갔다. 암살자들은 자기 노예들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 로마노 뒤쪽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통하는 비 탈을 달려 올라가, 전날과 마찬가지로 신전 안으로 도망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385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18세6개월의 젊은이였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아피아 가도 연변에 있는 소 도시 벨레트리의 기사계급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낸 인물이고,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누이동생의 딸이었다. 옥타비아누스 라는 이름은 옥타비우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카이사르에게 옥타비아누스는 누이의 외손자가 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는 외할머니의 오빠니까 종조부가 된다. 387
카이사르의 유해를 목격한 군중은 그제서야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눈물과 함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 후의 광경은 ‘줄리어스 시저’에 묘사된 것과 마찬가지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우는 불길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에도 옮겨 붙어, 카이사르의 장례식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의 죽음을 초래한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자리로 일변했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이 꺼져갈 무렵, 이번에는 세찬 비가 쏟아졌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운 재는 누군가가 미처 긁어 모으기도 전에 빗줄기에 씻겨가버렸다. 398-399
다신교 민족인 로마인은 일신교를 믿는 유대인과 달리 신과 계약을 맺는다는 개념이 없었다. 신들은 인간을 수호하고 도와주는 존재 일 뿐, 인간의 생활방식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가름하는 재판관은 아니었다. 인간의 생활방식을 판가름하는 것은 인간자신이다. 그렇 기 때문에 로마인은 법의 정신을 만든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재판관이 인간 자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말을 믿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다. 로마인은 누구하고나 서약을 나누었지만, 그 서약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었다.
1. 패배자와의 서약-볼모를 잡고 동맹관계를 맺는 서약
2. 채무자와의 계약-담보를 잡고 대출관계를 계약
3. 볼모나 담보 같은 형태의 보증을 개재시키지 않고 오로지 말만 신뢰하는 서약. 말하자면 공적인 효력까지 가진 신사협정.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신사협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암살자들을 포함한 원로원 의원 모두가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와 ‘ 신사협정’을 맺었다. 400
조국의 아버지는 곧 백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원로원 의원에게나 일반 시민에게나 카이사르는 아버지가 되었다. 로마 역사상 전례 가 없는 일이지만, 카이사르가 모든 시민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주라고 유언한 것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산을 남겨주는 것과 같다고 카이사르 자신도 생각했고, 유산을 받은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부친살해는 로마에서는 최고의 중죄였다. 신사협정 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일반 시민이라도 부친 살해는 이해한다. 그들은 카이사르를 죽인 자들을 암살자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증오와 슬픔과 분노에 찬 민중이 브루투스 일당에게 내뱉은 말은 ‘파리키다(아비를 죽인 놈)’였다. 402
“그들은 이렇게 말했소. ‘우리가 암살을 결행하지 않았다면 당신들도 조만간 카이사르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게 무슨 오만 이오!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 고뇌하기는커녕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카이사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조차 금지하려 하고 있으니 말이오. 노예조차도 두려움이나 기쁨이나 고뇌를 느끼는 것은 자유인데, 폭군한테서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자칭하는 자들은 개인의 감 정까지 지배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소? 나한테는 어떤 협박도 효과가 없을 거요. 아무리 내 지위를 위협해도, 나한테서 인간성 과 친구로서의 의리까지 빼앗을 수는 없소. 죽음으로 협박해도 소용없소. 카이사르의 죽음을 보고,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 지고 죽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소. 이제는 내 죽음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것 같소….카이사르는 내가 누구를 찾아 가든, 누가 나를 찾아오든 상관하지 않았소. 설령 그 사람이 그의 적이라 해도, 나한테 그 사람을 사귀지 말라고 말한 적도 없을 뿐더러 불쾌감조차 내비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나한테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빼앗아간 자들은 내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금지하려 하는 거요? 이런 정신 분야까지 참견하는 독재는 오래 계속될 리가 없소” -부자이며 옥타비아누스에게 거액을 빌려준 마티우스가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서. 413-414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성격과 재능을 이미 파악한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를 카이사르와 비교해보았을 테니까. 여자라면 누구 나 평생에 한번은 부닥치는 문제에 그녀도 직면했을지 모른다. 뛰어난 남자는 여자 뜻대로 되지 않고, 여자 뜻대로 되는 남자는 그 아래에 있는 남자뿐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후의 생활방식이 결정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좋으니 뛰어난 남자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역량과 재능은 일급이 아니더라도 자기 뜻대로 되는 남자를 택할 것인가. 클레오파트라는 후자를 택했다. 461
기원전 46년 북아프리카의 탑수스에서 폼페이우스파를 무찌르고 귀국한 카이사르가 시정의 기본방침으로 삼은 것은 ‘클레멘티아(관용)’였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귀국하여 16년 전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 누스는 시정의 기본방침으로 ‘팍스(평화)’를 내걸었다. 로마에 의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의 시작이었다. 515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육신은 죽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정말로 죽은 것은 기원전 30년이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33세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열린다. 아니, 이제는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카이사르가 타 도한 공화정 로마를 대신하는 제정 로마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516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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