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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4 / 시오노 나나미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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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법무관(프라이토르)은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집정관 다음의 중요한 공직이다. 해마다 6명이 민회에서 선출된다. 자격 연령은 40세. 원로원 의원이라야 출마할 자격이 있었다. 법무관으로 1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의 한 곳에 총독으로 부임한다. 이 공직을 역임한 뒤에야 비로소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었다. 21

 

초등교육 후기부터 고등교육 초기. 나이로 치면 8,9세부터 16세까지 배우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문법,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 이 일곱 과목이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다. 직역하면 ‘일반학과’이고, 의역하면 인간이 제 구실을 하는데 필요한 ‘교양학과’가 된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어의 ‘아르테 리베랄레’ 영어의 ‘리버럴 아츠’로 남아있다. 이 일곱 과목을 한 사람의 가정교사가 모두 가르친다. 그렇게 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교육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로마에서는 기초과정을 마친 뒤의 수업은 선인들이 남긴 글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문법, 수사학, 변증학, 역사, 지리 모두 호메로스나 투키디데스나 플라톤이나 대 카토의 저술을 읽음으로써 배워 나간다. 다시 말해서 교재는 선인들이 남긴 문장이고, 학생들이 쓰는 공책은 밀랍을 먹인 목판이다. 여기에 철필이나 상아펜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 밀랍 목판은 학생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수첩으로 사용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한 명의 가정교사가 전과목을 가르치면 학과를 과목별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도 모든 과목을 서로 관련 지어 배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교사의 자질이 더욱 중요해진다. 로마사회에서 가정교사의 지위가 높고 급료를 많이 받은 것은 이런 수요를 반영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일곱 과목의 교양학과 이외에 천문학이나 건축이나 음악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34-35

 

아홉 살부터 열한 살 때까지 카이사르의 일상생활은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나라가 아무리 임전태세에 있다 해도 17세 이하의 소년은 징집하지 않는 것이 로마의 관례였고, 45세 이상의 예비역도 수도 방위에 끌려나가는 일은 있을지언정 전선으로 보내지지는 않았다. 군제가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뀐 뒤에도 노예나 해방노예는 병역이 면제되어 있었다. 39

 

리키니우스 법이 국가요직에 앉을 기회를 귀족층과 평민층에 균등하게 인정함으로써 오랫동안 로마를 괴롭혀온 귀족과 평민간의 반목에 마침표를 찍었다면, ‘율리우스 시민권법’은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 취득을 인정함으로써 ‘로마 연합’의 맹주와 동맹자의 처지를 동등하게 만든 점에 의의가 있었다. 40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이 인물의 가장 큰 특징은 좋든 나쁘든 언행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언행이 분명한 이에게 매력을 느낀다. 분명하다는 것은 곧 책임을 진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인물을 적으로 삼지만 않으면 명쾌한 말과 행동에 통쾌함까지 느낄 수 있다. 57

 

술라가 작성한 ‘살생부’에는 80명 가까운 원로원 의원과 1천 6백명의 ‘기사(경제인)’을 포함하여 모두 4천7백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남은 길은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살해된 뒤 재산까지 몰수 당하거나 살해되지는 않더라도 재산을 몰수 당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물론이고 자손까지도 로마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몰수한 재산은 경매에 부쳐졌다. 61

 

변호사라는 직업은 아테네의 전성기에도 있었지만, 아테네식 변론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조각처럼 군더더기는 생략하고 핵심만 강조하는 스타일이었다. 그후 도시국가 아테네의 쇠퇴와 호응하듯,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페르가몬 왕국에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변론술이 생겨난다. 고대 로마인의 말을 빌리면 ‘곱슬머리’ 같은 이 스타일이 로마에 도입되어 기원전 1세기 당시의 로마 법정에서는 지나치게 장식이 많은 이런 투의 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아시아식’이라고도 불린 이 스타일의 대표자는 호르텐시우스인데, 그는 ‘법정의 왕자’라는 찬양을 받고 집정관에 선출될 만큼 명성을 얻었다. 71

 

기원전 70년과 이듬해인 기원전 69년에 카이사르는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다. 로마에서는 군인이나 행정 사무직은 유급이지만, 회계감사관부터 시작하여 집정관에 이르는 국가 요직은 무급으로 되어있다. 무보수로 공직에 봉사하는 인생이라는 의미에서 로마에서는 이것은 ‘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불렀다. ‘명예로운 경력’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주인공 카이사르도 31세에 비로소 ‘명예로운 경력’의 출발점에 서게 된 셈이다. 87

 

기원전 121년에 당시의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때까지 불문율로 지켜져 왔던 것을 명문화하여 하나의 법률로 성립시켰다. ‘셈프로니우스 법’이 그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로마시민권 소유자는 사형선고를 받아도 민회에 항소할 권리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여 이 법률을 짓밟았다. 이 비상사태 선언은 반역 행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재판을 거치지 않고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집정관에게 부여했고, 그 최초의 희생자가 폭도로 몰린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동지들이었다. 113

 

“아무리 나쁜 사례로 간주되고 있는 일일지라도 애당초 그것이 시작된 동기는 선의였습니다. 하지만 미숙하고 공정심이 모자란 사람이 권력을 잡읍 경우에는 좋은 동기도 나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처음에는 죄인임이 분명한 사람을 처형하지만, 차츰 무고한 사람까지도 희생자로 만들게 됩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에 이겼을 때, 30명의 압제자를 아테네인에게 강요했습니다. 그 30명은 반체제 분자로 간주된 자들을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것을 보면서 처형당한 자들은 극형을 당해 마땅하다고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30명의 압제자에 의한 처형은 날로 조금씩 늘어나, 결국에는 죄없는 사람까지 붙잡아서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공포가 아테네를 가득 채웠고 시민들은 노예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천박함을 속죄해야 했습니다. 우리 시대도 이런 천박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을 장악한 술라가 반대파를 죽이기 시작했을 때, 로마 시민들은 그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우리 로마인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이 저택을, 아니 저택만이 아니라 항아리나 옷가지까지도 몽땅 차지하고 싶은 나머지, 그런 물건들의 주인 이름을 밀고하여 술라의 ‘살생부’를 넘치도록 채워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던 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살생부’에 자기 이름이 올라 잇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술라가 자파 사람들을 돈방석 위에 앉혀준 뒤에야 겨우 진정되었습니다

-기원전 62년도 법무관에 선출된 카이사르의 연설(당시 37세). 134-135

 

격전이었지만 시간적으로는 신속하게 끝난 전투였다. 몸소 적진 깊숙이 쳐들어간 카틸리나를 비롯하여 3천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포로가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등에 상처를 입고 죽은 자도 없었다. 하나같이 가슴이나 얼굴을 칼에 찔려 죽었다. 기원전 62년 1월 말이었다. 이것이 ‘카틸리나 역모사건’의 결말이었다. 141

 

여자한테 인기가 있는 것은 남자의 소망이지만, 과거의 여자한테 원한을 사지 않는 것이야 말로 모든 남자가 마음속에 몰래 품고 있는 소망이 아닐까 싶다. 여자가 추문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는 것은 남자가 여자의 금전적 도움을 받고도 무정하게 등돌려버렸 을 때이다.

첫째, 사랑하는 상대를 화려한 선물로 공략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카이사르쪽이다. 둘째, 카이사르는 애인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 그의 애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니, 여자의 남편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비밀도 아니다. 오리엔트에 출정중인 폼페이우스와 가비니우스도 아내가 카이사르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래서는 스캔들이 될 수 없다. ‘공공연’하면 여자는 정실이 아닌 정부에 불과하다 해도, 그것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차례로 관계한 여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하고도 결정적으로 인연을 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53

 

카이사르 자신이 ‘내전기’에서 이렇게 썼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대대장이나 백인대장들한테 돈을 빌려 병사들에게 보너스로 주었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지휘관들은 돈을 못 받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웠고, 총사령관의 선심에 감격한 병사들은 전심전력을 기울여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빚이 막대해진 이유는 도로보수나 검투사 시합이나 선거운동에 돈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도 개인 재산을 늘리는 데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157

 

공화정 치하의 로마에서는 정책을 실현하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인정되어 있었다. 첫째는 기원전 509년부터 내려온 방법으로, 원로원에서 가결하고 민회가 승인하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원로원이 반대해도 민회가 가결하면 정책화할 수 있다고 규정한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경우의 ‘민회 결의’를 나타내는 라틴어 ‘플레비스키툼’은 현대 영어에도 ‘plebiscite, 국민투표’라는 낱말로 남아있다. 182

 

카이사르의 문체는 다음 세 가지로 총괄할 수 있을 것이다. ‘간결함, 명석함, 세련된 우아함’. 201

 

전쟁은 죽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쟁이 죽기 위해 하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도 이성을 잃고 미치기 시작한다. 살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조직의 건전성도 유지된다. 그것을 일개 졸병도 알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식량확보였다. 카이사르는 식량확보의 중요성을 평생 잊지 않았다. 216

 

카이사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적을 용서하는 것은 그 적에게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방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리에스’가 성문을 공격하기 전에 항복했다면, 무장해제를 하지 않은 항복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강화 교섭도 무장해제가 이루어진 뒤에 시작할 수밖에 없다.” 261

 

로마인들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패배는 로마 공화정 700년 역사속에 세 번 있었다.

첫번째는 기원전 390년에 켈트인(로마인들의 호칭으로는 갈리아인)에게 일시적이나마 수도 로마를 점령당한 쓰라린 경험.

두번째는 기원전 321년의 ‘카우디움의 굴욕’. 삼니움족에게 패한 로마군이 무장을 해제당하고 적병들이 꼬나쥔 창 사이를 지나간 끝에 겨우 휴전하는 불명예를 맛보았을 때였다.

그리고 세번째는 기원전 216년에 칸나에 회전에서 한니발에게 당한 완패의 경험이다. 이때 로마군은 7만 명의 병력을 잃고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392

 

설욕은 단순히 기분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파르티아가 로마에 이긴 것은 오리엔트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지금까지 로마 편이었던 아르메니아 왕국이 파르티아 쪽으로 돌아섰다. 또한 기세가 오른 파르티아군은 로마 속주인 시리아를 공격해왔다. 쓸만한 병사를 모두 긁어모아 방어에 힘쓴 카시우스의 노력으로 파르티아군의 침공은 저지되었지만, 그것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패잔병이 잘 싸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파르티아 쪽에 수레나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셀레우키아로 개선하여 한창 의기양양해 있던 수레나스는 축하연에서 마신 술도 채 깨기 전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의 명성이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한 오로데스 왕이 사고를 위장하여 죽여버린 것이다. 경기병을 전력화한 젊은 장군은 이리하여 30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파르티아인들은 낙타와 경기병을 짜맞춘 독창적이고 효율적인 전술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창안한 사람이 죽으면 그가 창안한 것까지 잊어버리는 것은 오리엔트의 결함이다. 옥시덴트(서방)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그가 이룩한 일은 계속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392-393

 

이런 상황에서도 질타와 격려를 되풀이하는 것은 평범한 지도자가 하는 일이다. 카이사르는 대대장이나 백인대장들을 통하여 작업중인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총사령관은 병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헤아려 공성전을 포기할 생각이라고. 그러자 병사들은 일제히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카이사르의 지휘를 받아 싸워왔습니다. 온갖 고난을 견디고, 그래도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 것을 배우면서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고 퇴각한다면 우리의 명예가 더럽혀집니다. 갈리아 놈들에게 배신당해 오를레앙에서 살해된 동포들을 생각하면, 복수도 못하고 퇴각하느니보다 차라리 어떤 어려움도 견디는 편이 낫습니다.”부하들이 의욕을 보였다고 해서 그것을 아무데나 이용하는 자는 평범한 지도자에 불과하다. 공성 준비도 상당히 진척된 어느날, 카이사르는 포로한테서 베르킨게토릭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진영을 비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길가에 매복해 있다가 군량을 조달하러 나가는 로마 병사들을 기습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한밤 중에 몰래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일찍 적진 앞에 도착했다. 적병의 움직임이 한 눈에 보이는 지점까지 접근하자, 전투 태세에 들어가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은 왕성한 의욕을 보이며, 카이사르에게 어서 빨리 공격신호를 내려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공격하기에는 지형이 불리하다. 불리한 지형에서 승리를 얻으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 다음, 총사령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너희들의 의욕이 충분한 것은 알고 있다. 나에게 영광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할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너희들의 목숨보다 나 자신의 영광을 중시한다면, 지휘관으로는 실격이다.’ 이렇게 말한 다음,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진영으로 돌아갈라고 명령했다. 카이사르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높아진 병사들은 총사령관을 따라 퇴각했다. 408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38세의 나이 차이는 있지만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 두 사람은 코르넬리우스와 율리우스라는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때까지 로마 역사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술라와 카이사르라는 방계 가문 출신이라는 점.

둘째,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할 만큼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을 가진 최고의 교양인이었다는 점.

셋째,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품위있는 행동거지로,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는 군계일학의 존재였다는 점.

넷째, 둘 다 조숙한 천재 타입이 아니라, 40대에 들어선 뒤에야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대기만성형의 인물이었다는 점.

다섯째, 돈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개인 재산을 모으는 데에는 거의 무관심했다는 점.

여섯째, 둘 다 목적을 확실히 하는 성격이고, 그 때문에 부하 병사들한테 존경을 받았다는 점.

일곱째, 원로원에는 더 이상 통치력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다만 술라는 원로원 개혁으로 통치력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그런 정도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점에서 카이사르는 혁신적이었다.

여덟째, 둘 다 종래의 사고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이 지극히 대담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술라에게서는 불안이나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카이사르는 그렇지 않았다. 브린디시에 상륙한 뒤에도 군단을 해산하지 않은 술라의 가슴속에는 국법을 어기고 그대로 곧장 로마로 쳐들어가는 데 대한 의심이나 망설임은 티끌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비콘 강 앞에서 카이사르는 망설였 다. 국법을 어기는 행위가 옳으냐 그르냐보다,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루비콘 강을 건넜을 때 일어날 결과나 여파를 생각하며 망설인 것이다. 497-498

 

하지만 내전의 진정한 비극은 내전에 희생된 사망자 수가 아니다. 진정한 비극은 내전에 희생됨으로써 생겨나는 앙심과 원한과 증오가 오랫동안 이어져, 그 꼬리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데 있다. 그것이 공동체에 얼마나 큰 불이익이 되는지, 따라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되도록 피해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는 ‘카틸리나 역모사건’ 당시 37세였던 카이사르가 행한 연설에 이미 나타나 있다. 499

 

굳게 결심하고 이곳까지 달려온 카이사르였지만, 막상 루비콘 강을 건너려 하니 마음 한구석에 떠오르는 께름칙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말없이 강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도 말없이 총사령관의 등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뒤를 돌아본 카이사르는 가까이에 있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그리고는 그를 쳐다보는 병사들에게 망설임을 떨쳐버리듯 큰 소리로 외쳤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장군의 뒤를 따르자!” 병사들도 일제히 우렁찬 함성으로 응답했다. 508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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