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년 시절의 아놀드 토인비는 고대 로마를 찾아 이탈리아 전역을 자전거로 답사했다.
프롤로그
폴리비우스(그리스인, 포로) - <역사> 저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로마 장군)의 지원
53년
기원전 202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 패배) ~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전쟁(카르타고 멸망)
제1장 로마의 탄생
트로이 함락 - 트로이 왕 트리아모스의 사위 - 아이네아스만
아이네아스만(아프로디테의 아들 (미와 사랑의 여신)
아이네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기원전 753년에 로마에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 - 아이네아스의 자손
귀족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
북부의 에트루리아 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양대세력의 틈바구니 - 로마
제1대 왕 로물루스
원로원: 100명의 장로 - 왕에게 조언
민회: 시민 전원
로마 시민이 대부분 독신 남자 - 여자를 보충하기 위해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여인들은 비록 강탈당한 몸이긴 하지만 노예가 된 것은 아니고,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인 남편에게 애정
-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 - 로마인의 풍습
제2대 왕 누마
사비니족 - 농사와 지식탐구 주경야독
로마의 왕은 신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의 뜻을 구현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이다.
왕위를 세습하지도 않는다. 또한 선거를 통해 뽑힌다.
누마는 출입문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이기도 한 야누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
로마인은 전쟁을 하긴 했지만, 종교전쟁은 하지 않았다.
남의 신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도 차이가 있다. 남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남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제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티우스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 최초의 선거운동 - 에르투니아계
'포로 로마노' 탄생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에르투니아계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사람 - 프롤레타리 (무산자)
제7대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 에르투니아계
세르비우스를 자객을 보내 살해 - 딸 툴리아의 모략
제2장 로마 공화정
법이 지배하는 국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창시자
브루투스(바보) - 자중의 의미/ 선견지명과 실행력을 겸비
발레리우스(푸글리콜라)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2000년 전후에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크레타섬에서 시작되었다. 본토 그리스보다 크레타섬이 선진 문명인 이집트에 가까웠기 때문이리라.
폴리스 - 도시국가
페니키아인의 이주로 건설된 카르타고
나폴리 - 그리스어 '새로운폴리스'
개혁이라는 것은 개혁으로 힘을 얻은 사람들의 요구로 다시 한번 개혁을 강요당하는 숙명을 갖는다.
- 그리스
아나르키아(무정부상태)의 끝은 티라니아(독재정치)이다.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에서 독재정치를 계속했다.
- 클레이스테네스
- 테미스토클레스 (페르시아로 망명)
- 페리클래스
페리클래스는 민주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정치를 교묘히 운영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방식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없다.
- 스파르타
1만명 남짓, 자유시민과 그 가족뿐
도시 한복판에 모여 살았다/ 과묵한 성격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들의 유일한 직업은 군인이었다.
쌍두정치 - 디아르키아 (not 모나르키아)
1) 군인 : 2) 페리오이코이(상공업) : 3) 헬로트(농노) = 1 : 7 : 16 - 스파르타는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폴리스들을 모아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다.
-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vs. 아테네 스파르타 등 200개의 도시국가 연합 (승리)
- 마라톤 전투 10년 후, 기원전 480년, 선왕 다리우스의 뜻을 이어받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30만 대군과 1천척의 군함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 바다에서는 아테네인이, 육지에서는 스파트라인이 주역 - 델로스 동맹 (그리스)
다시 쳐들어올 페르시아와 동맹 -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양립하지 못함
-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 vs. 스파르타 (승리)
호민관 - 이 관직에 앉으려면 평민계급 출신이어야 한다.
- 라틴 동맹 - 로마는 종교와 언어가 같은 인근 부족과 함께 군사동맹
로마 평민의 약점은 단결력 부족이 아니라 명예심이 너무 강한데 있었다.
- 켈트족(북유럽)의 침입, 점령
켈트족 (그리스인이 부르는) = 갈리아인 (로마인이 부르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숲)은 로마를 점령했지만 도시로마의 사용법을 알지 못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켈트족에게 몸값 금300kg을 주고 협상 - 켈트족이 떠남
로마인의 느리면서도 착실한 성격
로마인은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
로마인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한 직접적인 요인은 켈트족이 준 물질적인 피해와 불명예라는 형태의 정신적인 피해였다.
아리스토파네스(희극작가), 아가톤(비극작가), 크세노폰(논픽션작가), 플라톤 - 소크라테스의 청년들(동성애)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왕정국가)로 넘어갔다.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났다.
델포이 신탁 - 전황이 순조롭지 않을 때 사절을 보내는
근본적인 개혁은 개혁을 담당하는 사람을 바꾸어야만 비로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리키니우스 법 - 획기적인 법률 - 소수의 지도체제 - 최초의 평민 출신 정권
무기를 갖지 않은 예언자는 자멸한다 - 마키아벨리
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도로가 국토의 동맥을 것을 2천300년전에 안것은 로마인 뿐이다.
vs. 산악 민족 삼니움족에게 패배
로마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은 명예였다.
로마인은 승전보다 패전을 더 오래 기억하는 민족이었다.
로마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패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재능과 승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재능이다.
로마는 주변민족을 하나씩 제패하여 동맹국으로 만들면서 세력권을 넓혔고, 오랫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삼니움족을 굴복시켰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타렌툼)
-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로마가 융성한 요인
1) 디오니시오스가 거론한 - 종교
2) 폴리비오스가 지적한 - 정치
3) 플루타르코스가 말한 - 포용력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통찰 / 피터 드러커 (0) | 2021.01.21 |
---|---|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1 / 베어드 스폴딩 (0) | 2021.01.21 |
로마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0) | 2021.01.21 |
들뢰즈 사상의 진화 / 마이클 하트 (0) | 2021.01.21 |
의미의 논리 / 질 들뢰즈 (0) | 2021.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