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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10

로마인 이야기 3 / 시오노 나나미 승자의 혼미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양육은 어머니 코르넬리아의 세심한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아 자신도 당시 로마 교양인의 자격인 그리스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보석’이라고 부른 두 아들의 가정교사의 그리스에서 학자를 초빙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고 해서 가정교사나 하인인 노예들에게 두 아들을 맡겨 버린 것은 아니다. ‘자식은 어머니 뱃속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맡아보는 밥상머리에서도 자란다’고 말한 여자였다. 코르넬리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더불어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로마 여인의 귀감으로 칭송받게 된다. 22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채택한 이후 귀족계급과 평민층 사이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4 / 시오노 나나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법무관(프라이토르)은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집정관 다음의 중요한 공직이다. 해마다 6명이 민회에서 선출된다. 자격 연령은 40세. 원로원 의원이라야 출마할 자격이 있었다. 법무관으로 1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의 한 곳에 총독으로 부임한다. 이 공직을 역임한 뒤에야 비로소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었다. 21 초등교육 후기부터 고등교육 초기. 나이로 치면 8,9세부터 16세까지 배우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문법,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 이 일곱 과목이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다. 직역하면 ‘일반학과’이고,..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5 / 시오노 나나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지금까지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을 석방했지만, 코르피니오에서 석방한 요인들 중에는 에노발부스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 에노발부스는 카이사르 후임으로 갈리아 총독에 임명된 인물이고, 따라서 카이사르에게는 당면한 최대의 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 편을 버리는 폼페이우스는 얼마나 다른가!” 28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카이사르 76 피아첸차에 도착..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6 / 시오노 나나미 팍스 로마나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세나투스’, 직역하면 ‘일보’ 또는 ‘원로원 의사록’이라고 불리는 이 법률은 원로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토론 이나 결의를 이튿날 포로 로마노의 벽면에 게시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정보공개법’이다. 22 옥타비아누스는 이 법을 고치는 조치를 취한다. ‘악타 세나투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속기로 기록되어 모두 ‘공문서보관소, 타불라리움’ 에 보관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23 ‘악타 디우르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을 ‘일보’라기보다는 ‘관보’로 번역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으로 바꾼다. 수도 로마에서 결정된 모든 공적 사항, 즉 원로원 의결사항이나 공직선거 결과를 자세히 기록하여 본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의 식민..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악명 높은 황제들 오늘날 카프리 섬은 지중해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라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2천 년 전에는 섬 자체가 황제의 사유지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카프리 섬을 영유하고 있던 나폴리에 이스키아 섬을 주는 조건으로 취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로마 세계의 최고권력자가 면적이 네 배나 되고 온천도 솟는 이스키아를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했던 카프리 섬은 온천의 이점도 잊게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답다. ‘나폴리 만의 진주’라는 별명은 로마시대부터 있었다. 11 이집트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파라오의 유택인 피라미드이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건축은 신들에게 바친 신전인 반면,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들라면 사람들이 현세에서 살아가는 데 유용한 도로, 수도, 다리, 회당, 항만, 목욕탕 같은 사회간접자본이..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0 / 시오노 나나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왜 중국과 로마는 국가 규모의 대토목사업을 시작할 때, 한쪽은 방벽을 건설했고 또 한쪽은 가도를 건설했을까. 물론 고대 중국에 가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시대의 로마에 방벽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중점을 둔 것이 다를 뿐이다. 기술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두 민족 모두 ‘수직’과 ‘수평’을 바꿀 수 있었으니까, 그 점은 분명하다. 또한 로마인과 외적의 침략과 무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결코 국방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팍스 로마나’가 확립되기 이전,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은 줄곧 전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벽보다 가도 건설을 우선한 것이다. 방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가도는 사람의 왕래를 촉진한다. 국가 방위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이..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1 / 시오노 나나미 종말의 시작 26세의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57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세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하는 말로 이 연설을 마무리했다. 당시 22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미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얻어 차기 황제로 결정되어 있었다. “젊은이여, 로마 제국이 앞으로도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가장 고귀한 지위를 차지하게 될 그대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 26 로마인의 가정에서는 갓난아기에게 이름과 함께 다음 두 가지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나는 딸라이다. 가늘고 가벼운 금속 고리에 흔 들면 소리가 나는 방울이 몇 개 달려 있다. 또 하나는 황금으로 만든 부적이다. 악귀를 쫓는 이 부적은 끈을 매달아 목에 걸고, 성년식을 치르는 날까지 늘 몸에 지니고 있어야..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2 / 시오노 나나미 위기로 치닫는 제국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구절로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불행을 안고 있다.” 이 말을 역사에 적용하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융성의 시대는 어느 민족이나 비슷하지만, 쇠퇴기에 접어들면 저마다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15 후세의 역사가나 연구자들은 대부분 3세기의 ‘위기’를 초래한 요인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의 침입 격화 -경제력 쇠퇴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기독교의 대두. 16 로마 제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기축통화는 크게 나누면 ‘아우레우스 금화’와 ‘데나리우스 은화’와 ‘세스테르티우스 동화’의 세 종류 다. 그중에서도 ‘데나리우스 은..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4 / 시오노 나나미 그리스도의 승리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치세는 아버지가 죽은 해인 서기 337년부터 그 자신이 죽는 361년까지 24년이다. 처음 3년은 삼형제가 제국을 나누어 다스렸고 그 후 10년은 동생과 둘이 분담해서 통치했지만, 그 동안 줄곧 콘스탄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였으니까 황제로서의 통치는 거의 4반세기에 이르렀다.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아우구스투스’가 된 뒤의 치세는 25년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무려 반세기 동안 로마 제국을 지배한 셈이다. 7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우대정책이 성직자의 공무 면제, 세금 면제, 독신자에게 불리했던 원수정 시대 세금제도의 폐지로 진행 된 것은 ‘지배의 도구 instrumentum regni’로서 기독교 진흥에 온 힘을 다하기로 결정한 콘스탄티누스에게는 .. 2021. 1. 28.
로마인 이야기 15 / 시오노 나나미 4세기 초의 사람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다른 모든 종교와 똑같이 기독교 신앙을 공인했기 때문에 ‘대제’ 로 존경받았지만, 4세기 말의 사람인 테오도시우스는 이단과 이교를 일절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배척하는 일신교적 사고방식을 강행 했기 때문에 ‘대제’라고 불린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라는 유능한 ‘양치기’의 존재도 크게 작용했다. 23 4세기의 황제들은 제국 서방의 본거지를 로마가 아니라 밀라노에 두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야만족의 침략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중간까지 뻗어있는 제국 방위선에 집중되고 있었다.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달려가려면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로마보다 북부의 밀라노에 있는 편이 유리했다. 둘째, 기독교도가 된 4세기 이후의 로마 황제들에게 ..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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