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란 어려워야만 하고, 오직 어려움만이 고상한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불안의 개념 The Concept of Anxiety
- 5개의 불안
1_원죄의 전제로서의 불안
2_원죄 그 이전의 불안
3_죄의식이 없는 죄의 결과로서의 불안
4_죄의 결과인 불안
5_신앙을 통한 구원인 불안
목사가 되려는 철저한 신앙인이 교회와 신과의 극한 대립 (실존주의)
서론ㆍ13
단독자(개인)의 죄가 온 인류의 죄로 퍼지는 한, 죄의 속성은 도저히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려움은 더욱더 커져서 윤리적으로 점점 수수께끼가 깊어져 갔다. 거기에 교의학이 나타나 원죄라는 원조를 해 준 것이다. 새로운 윤리학은 교의학을 전제로 삼음과 동시에 원죄를 전제로 삼았으며(교의학은 원죄를 전제로 하므로), 이렇게 하여 원죄에 의해 단독자의 죄를 설명한다. 22
인간의 본성이 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진실이다. 그러나 이 죄의 가능성을 죄의 현실성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것은 윤리학의 노염을 사는 일이며, 교의학에 있어서는 독설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자유는 결코 가능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는 존재하는 순간 현실적이 된다. 옛날 어떤 철학에서 신의 존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필연적(명증적)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23
제 1 장 원죄의 전제로서의, 또 원죄를 그 기원으로
소급해 설명하는 것으로서의 불안
- 원죄 개념에 대한 역사적 시사점
개인이 그 자신임과 동시에 인류라는 것은 모든 순간을 통해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상태(인류의 발전이 개인에게 구체화된 상체)로서 보일 경우의 인간의 완전성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모순(인간은 자신이면서 동시에 인류라는 사실)이며, 모순은 항상 과제(자신을 인류와 결합시키고 세대에 기여하는 역사적 운동의 과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32
- 최초의 죄 개념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면 아담의 최초의 죄와 개개인의 최초의 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아담의 죄는 결과로서의 죄의 속성에 대한 전제조건이 되고 있지만, 각자의 최초의 죄는 인류의 다양한 발전이 개인에겐 구체화된 상태로서의 죄의 속성을 조건으로서 존재한다. 만약 그런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아담은 사실 인류 밖에 놓이게 되고, 인류 또한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동시에 출발점을 인류 밖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모든 개념에 위배된다. 33
- 순진무구함의 개념
아담이 가책으로 순진무구함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인간도 순진무구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만약 그가 순진무구함을 잃은 것이 성스러운 계약의 파기, 즉 파계
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잃은 것은 순진무구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파계를 하기 전에 순진무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파계를 행하는 자
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39
인류에는 자신의 역사가 있고, 이 역사 속에서 죄성은 끊임없이 양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진무구함은 언제나 개인의 질적인 비약에 의해서만 상실된다. 인류의
진보인 이 죄성은 개개인이 그 행위에 의해 떠맡는 것이므로, 각 사람에게 있어 크든 작든 소질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많다든지
적다든지 하는 양의 규정이지 죄의 질적 개념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41
- 타락의 개념
죄성에 대해 심미적으로 걱정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순진무구함의 몸으로 죄성에 대해 걱정한 사람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한 것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몸소 자진하여 전 세계의 죄를 지고 그 벌을 받는 것으로서였다. 이것은 결코 미학적인 규정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개인 이상의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42
- 불안 개념
무는 불안을 낳는다. 순진무구가 동시에 불안이라는 것, 이것이 순진무구함이 갖는 심오한 비밀이다. 꿈을 꾸면서 정신은 꿈속에 자신의 현실성을 투영한다. 그러나 이 꿈의 현실성은 무이므로 다시 이 무는 스스로의 밖에서 쉴 새 없이 순진무구함을 보는 것이다. 45
순진무구함은 금단된 것과 번뇌의 관계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다. 순진무구함에 있어 죄는 없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는 순진무구함이 상실된 것 같은 불안이 있다. 49
- 원죄의 전제로서의, 또 원죄를 그 기원으로 소급해 설명하는 것으로서의 불안 죄성은 결코 감성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 없이는 性도 없고, 성 없이는 역사도 없다. 그런 한편, 완전한 정신이라면 성도 역사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에 있어서 성적 구별이 없어지고(마가 12:52), 또 그러므로 해서 천사 역시 역사를 갖지 않는 것이다. 52
논리적인 체계 속에서는,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말로 하는 일이 아주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거기에는 중간 규정이 필요하다. 이 중간 규정이 불안이며, 이 불안은 질적 비약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또 이 비약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불안은 필연성의 규정도 아니거니와 자유의 규정도 아니며, 그것은 속박된 자유이다. 이때 불안에서의 자유는, 그 자신에 대해 자유가 아니라 속박되어 잇는 것이다. 만약 죄가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면(이런 일은 모순이지만), 불안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52-53
제2장 원죄 그 이전을 설명하는 것으로서의 불안ㆍ58
죄는 불안을 따라 들어왔다. 그러나 그 죄가 또 불안을 데리고 온 것이다. 다시 말해 죄의 현실성은 존속하지 않는 현실성이다. 한편에서 죄의 연속성은 사람을 불안에 빠뜨리는 가능성인 동시에, 또 한편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역시 無인데, 사람은 그것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한다. 개인적 존재와 가능성의 관계는 언제나 그런 것이다. 구원이 현실에 정립되는 순간, 그때 비로소 이 불안이 극복된다. 59
- 객관적 불안
객관적 불안과 주관적 불안의 구별은, 이 세상과 후대에 태어난 개인의 순진무구한 상태를 고찰할 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관적 불안은 개인의 순진무구함 속에 있는 불안이므로 그것은 아담의 불안에 대응하지만, 세대 간의 양적 규정에 의해, 아담의 불안과는 양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객관적 불안이란 말은, 세대 간의 죄성이 온 세계에 반영됨을 의미한다. 62
- 주관적 불안(A. 세대 관계의 결과 B. 역사적 관계의 결과)
불안이란 자유의 현기증이므로, 정신이 종합(영혼과 육체의)을 정립하려고 하자 자유가 자신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다가 그 몸을 의지하기 위해 유한성을 붙잡을 때 일으키는 현기증인 것이다. 이 현기증 속에서 자유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여기서부터 심리학은 앞으로 가지도 못할뿐더러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은 변하고, 자유가 다시 몸을 일으킨 순간에는 자신이 죄가 있는 몸임을 알게 된다. 이 두 순간 사이에 비약이 있으며, 그 비약에 대해서는 어떠한 학문도 설명한 일이 없고, 또 설명할 수도 없다. 불안 속에서 죄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양의적인 것은 없다. 불안은 일종의 여성적인 나약함으로, 자유는 그 안에서 힘을 잃는다. 66
죄로 인해 감성은 죄성이 되었다. 이 명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죄에 의해 감성이 죄성으로 된다는 것과, 아담에 의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규정들은 반드시 서로 받쳐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진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성이 일찍이 죄성이 되었다는 것은 세대의 역사이지만, 감성이 죄성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질적 비약인 것이다. 68
역사적인 연결고리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자연의 인과는 지금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77
감성이 죄성은 아니지만 죄가 정립되었고, 정립됨으로써 죄가 감성을 죄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죄성이 동시에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81
몇 백만이라는 그러한 자아가 살아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학문도 그 자아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을 잊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학문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데에 인생의 불가사의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적 명제 ‘너 자신을 알라’의 깊은 뜻이다. 83
제3장 죄의식이 없는 죄의 결과로서의 불안ㆍ88
순간은 운동과 정지 사이에 놓여 있어서 그 어느 시간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순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은 정지로 옮아가고, 정지하고 있는 것은 운동으로 옮아간다는 기묘한 존재(아토폰, 이것은 아주 적절한 그리스어이다)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순간은 이행의 범주가(메타폴레) 된다. 왜냐하면 플라톤도 순간은 하나에서 모든 것으로, 모든 것에서 하나로, 또 동일성에서 부동성으로 이행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하나’도 없거니와 ‘모두’도 없고, 한정도 되지 않거니와 혼화도 되지 않는 순간이라는 것을 똑 같은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누어지는 일도 없거니와 합쳐지는 일도 없다. 최근의 철학에서는(헤겔) 추상화는 순수 존재에서 정점에 이른
다. 그러나 순수 존재는 영원에 대한 가장 추상적인 표현이므로 무로서는 바로 순간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도 또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밝혀지고 있다. 즉 이 범주에 의해 영원과 순간이 양극의 대립적 관계를 벗어나고, 처음으로 영원이 자신의 본질적 의의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의 마술이 영원과 순간이 같은 것을 의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비로소 감성, 시간성, 순간이 올바르게 이해된 것도 그리스도교에서만 비로소 영원이 본질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116
현재는 바로 무한하게 사라지는 무한히 공허한 것으로서만 시간의 개념이다. 이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현재의 것을 제아무리 신속하게 사라지게 하였더라도 현재를 정립한 것이 되며, 일단 정립하면 그것은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이라는 규정 속에 존재시키는 것이 된다. 이에 반해 영원은 현재적인 것이다. 사유에 있어서 영원은 지양된 연속이므로 현재적인 것이다(시간이란 지나가는 것의 연속이다). 표상에게 영원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행이다. 영원이 표상에게는 무한히 내용이 풍부한 현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은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에 대한 구별을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는 지양된 연속으로서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91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종합은 제2의 종합이 아니라, 인간은 정신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육체와 마음과의 종합이라고 하는 첫 번째 종합의 표현이다. 정신이 정립되자마자 곧 순간이 눈앞에 나타난다. 93
후대의 각 개인은 아담과 똑 같은 방법으로 시작한다는 것, 그러나 그 유일한 차이는 세대 관계나 역사 관계의 결과로서 오직 양적인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아담에게는 후대의 개인과 마찬가지로 순간이 존재한다. 심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종합은 정신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신은 영원의 것이다. 그것이 영원인 까닭은 정신이 제1의 종합인 동시에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인 제2의 종합을 정립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정립되지 않는 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단순한 경계로서만 존재한다. 이때 순진무구함의 정신은 오직 꿈꾸는 정신의 상태로서만 규정되므로 영원한 것은 미래의 것으로서 나타난다. 95
불안은 죄에 선행하는 심리 상태이며, 그것은 가급적 죄 가까이에 접근하여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질적 비약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죄를 설명할 수는 없다. 죄가 정립되는 그 순간에 시간성은 죄성이 된다. 우리가 시간성을 죄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감성이 죄성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96
- 무정신의 불안
무정신에는 아무런 불안도 없다. 불안을 느끼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행복하고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나 무정신적이다. 이것은 참으로 슬퍼해야 할 이유이다. 그리고 이 교가 무정신과 다른 점은, 이교는 정신을 ‘향하는 방향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무정신은 정신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99
- 변증법적으로 운명으로 규정되어 있는 불안
운명이란 바로 필연성과 우연성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맹목이다, 라는 말에서 이것의 의미가 더 깊게 표현되고 있다. 맹목적으로 정진하는 사람은 우연적인 동시에 필연적으로도 전진해 가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갖지 못하는 필연성은 다음 순간이 되면 그 자신이 사실상 우연성이 된다. 운명은 이래서 불안 상태의 무이다. 그것은 무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정립되자마자 불안이 제거되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섭리도 정립되므로 운명 또한 제거되기 때문이다. 101
천재는 일종의 전능한 即自(인간의 인식형식과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므로, 그 자체로서 천재는 온 세계를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천재와 함께 또 하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운명은 무이다.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천재 자신이며, 천재가 심오하면 심오할수록 더욱더 심오한 운명을 발견해 낸다. 이유는 그 운명의 모습이 단지 섭리의 징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03
그래서 천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때 불안에 빠진다. 보통 사람은 위험한 순간에 비로소 위험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들은 태연하다. 그리고 위험이 지나가면 또다시 그들은 태연해진다. 천재는 위험한 순간에 가장 힘이 강하다. 그의 불안은 오히려 그 전의 순간과 그 뒤의 순간, 즉 운명이라 불리는 그 위대한 미지의 것과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몸이 떨리는 그 순간에 생긴다. 105
- 변증법적으로 가책으로서 규정된 불안
‘죄가 불안의 대상인 한, 죄는 무이다’라는 것은 옳다. 이 양의성은 그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죄가 정립되자마자 불안(불안은 죄가 정립되기 직전까지만 존재한다)은 사라지고 거기엔 뉘우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불안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항상 공감적이고 반감적이다. 107
자유가 죄를 두려워할 때 자유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죄가 정립되자마자 곧 뉘우침으로서 돌아온다. 그러나 가책에 대한 자유의 관계는 우선 하나의 가능성이다. 113
제4장 죄의 불안, 혹은 단독자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인 불안 120
질적인 비약에 의해 죄는 이 세상에 들어왔다. 또 이렇게 해서 죄는 계속 이 세상에 들어오고 있다. 이 비약이 정립되자 마자 사람들은 곧 불안은 없어지는 걸로 느낄지도 모른다. 불안이란 가능성에 의해서 자유가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 대해 나타내는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질적 비약은 확실히 현실성이므로, 현실성인 한 확실히 가능성과 함께 불안은 지양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첫째는 현실성이라는 것만이 유일한 요인이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는 정립된 현실성이 부적격한 현실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은 또 다시 정립된 것과 미래에 와야 할 것의 관계 속에 들어오게 된다. 20
- 악에 대한 불안
죄의 궤변을 진실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앙이고, 상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죄임을 믿을 수 있는 용기이고, 불안 없이 그 불안을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뿐이다. 그러나 신앙이 불안을 완전히 없애준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젊음을 영원히 지킴으로써 불안이라는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125
- 선에 대한 불안(악마적인 것)
악마적인 것은 善에 대한 불안이다. 순진무구함에서는 자유가 자유로운 것으로서 정립되어 있지 않고, 그 가능성이 개인에게 있어 불안이 되었다. 악마적인 것에서는 이 관계가 반대이다. 자유가 부자유한 결과로서 정립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가 상실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가능성은 이 경우도 또 불안이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자유의 가능성이 여기서는 부자유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데, 이 부자유는 자유에 이르는 규정인 순진무구함과는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131
악마적인 것은 어떤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이처럼 부자유가 바로 제 자신을 갇힌 자로 만드는 점에 존재의 비밀스런 의미가 있다. 132
아무리 큰 절망도, 또 어떠한 악에 대한 공포도, 한 마디만 가지고서는 침묵만큼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언적인 것은 그 자체가 돌발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돌발적인 것을 묘사할 수가 있다. 139
1) 육체적ㆍ심리적으로 잃어버린 자유
2) 정신적으로 잃어 버린 자유
불신도 미신도 다 신앙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불신은 부자유(악마적, 폐쇄적인 것)의 능동성에서 시작되고, 미신은 부자유의 수동성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듯 미신의 수동성만 고찰되는 한, 미신은 미적 윤리 범주나 윤리 범주로 적용됨으로써 별로 중요성이 없게 보이거나 혹은 그다지 죄가 없는 것 같이 여겨지거나 한다. 미신에는 사람의 동정을 살만한 나약함이 있다. 그러나 뭐라고 해도 미신에는 항상 자기의 수동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능동성이 반드시 있다. 미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불신적이며, 불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미신적이다. 151
영원에서는 이와 반대로 모든 모순이 제거되고, 시간성은 영원성에 의해 충만한 것이 되고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극적인 것은 흔적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원성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만 불안해 한다. 그 불안은 수많은 곳에다 도피처를 획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악마적인 것이다. 160
제5장 신앙을 통한 구원인 불안 166
인간이 동물이나 천사였다면 불안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이기 때문에 불안해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 불안은 외적인 것, 즉 인간의 외부에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불안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다(마태 26:38)라고 하고, 다시 유다에게 ‘하고자 하는 일을 지금 곧 하라(요한 3:27)고 말한 것은 이런 이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66
인간이 불안에 의해 신앙으로 육성될 때, 불안은 스스로가 낳은 것을 근절시켜 버린다. 불안은 운명을 발견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이 운명을 신뢰하려고 한다면, 불안은 돌변하여 운명을 제거해 버린다 왜냐하면 운명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불안은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마녀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171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Unto Death
서론ㆍ181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죽음은 모든 것의 최후이기에, 생명이 있는 동안만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은 절대로 모든 것의 최후가 아니며, 죽음은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한 영원한 생명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는 단순히 인간적 의미에서 생명이 있다는 것보다도 더 많은 건강과 힘을 죽음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82
인간이란 보다 큰 위험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언제든지 보다 작은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갈 용기를 가지는 법이다. 하나의 위험을 무한히 두려워할 때는 그 밖의 다른 위험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인이 배워서 터득한 무서워해야 할 것이란,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183
-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 자기 자신에게 있는 병으로서, 거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절망해서 자신이 자신의 소유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즉, 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지 않는 경우,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경우. 185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다. 그러나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이다. 혹은 그런 관계에 있어서의 그 관계가 또 그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란 관계 그 자체가 아니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이요,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이요,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종합이라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가 아니다. 185
(절망이라는)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이 병에 주의하고 있다는 것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그리스도 교인들의 장점이다. 이 병에서 치유되었다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더 없는 행복인 것이다. 이처럼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장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무한한 장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최대의 불행이요 비참함일뿐만 아니라, 그것은 파멸이다. 187
절망이란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인 인간 그 자신에 대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이다. 그러나 종합 그 자체는 분열이 아니고, 그것은 단순한 가능성(마음과 육체의 종합에 의해 남성적 정신의 가능성과 여성적 정신의 가능성이 생긴다-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에서)에 불과하다. 바꾸어 말하면 종합 속에는 분열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종합 그 자체가 분열한다면, 절망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때의 절망은 인간의 본성 안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이 되고 말 것이다. 188
절망은 누워서 죽음과 싸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을병에 걸려 앓고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도록 앓고 있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살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죽음이라는 최후의 희망까지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희망을 잃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0
절망하는 이에게 있어 절망이 자신을 녹여 없애지 않는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게 아니고, 반대로 그 위로는 진정한 고뇌요,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죄를 살려 생을 계속 죄로 향하게 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절망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녹여 없앨 수가 없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피할 수 없으며, 무로 될 수 없고, 절망했다기보다 계속 현실적으로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절망의 제곱 공식이며, 이 자기의 병에 있어서의 열의 상승이다. 191
자기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따라서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절망의 제2형태는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제1형태로 환원될 수 있지만, 우리는 앞에서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 형태를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형태로 회귀시켰다. 절망하는 자가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면, 그는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는게 아닌가. 193
소크라테스는, 육체의 병이 육체를 녹여 없애는 것과는 달리, 영혼의 병은 영혼을 녹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고 한 데서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망은 절망하는 사람의 자기(정신)를 녹여 없앨 수 없다는 데서 그것이 곧 절망에 있어서의 (죽을 수 없는) 모순의 고뇌라고 하는 데서, 인간 내부의 영원한 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194
제2장 이 병(절망)의 보편성
제3장 이 병(절망)의 여러 형태
‘자기’는 무한성(가능성의 개입)과 유한성(현실성)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이 종합은 하나의 관계이므로, 게다가 그것은 파생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로서, 이 관계는 바로 자유이다. 자기(정신)란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변증법적인 것으로, 가능성 및 필연성(명증성)이라고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 203
자기에게는 유한성과 무한성(아페이론-페라스 : 아페이론은 한정되어 있지 않은 것, 페라스는 한정된 것을 의미)이 속해 있듯이 가능성과 필연성 또한 속해 있다. 아무런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기는 절망하고 있는 것이며, 또 아무런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기 역시 마찬가지로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210
자기가 자기 자신인 한 자기는 필연적인 것이고, 자기가 장차의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인 한 자기는 가능성인 것이다. 그런데 가능성이 필연성을 뒤로 하고 혼자서 독주하면,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필연적(명증적)인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능성의 절망이다. 이와 같은 자기는 추성적인 가능성이 된다. 211
한 인간이 기적적으로 구원이 되느냐의 여부는, 그가 본질적으로 구원이 불가능한 것을 지성의 어떠한 정열을 가지고서 깨닫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원해 준 힘에 대해 그가 얼마나 성실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 어느 쪽도 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구원을 발견하고자 자기 지성의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해 보지도 않고,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은혜를 저버리고 거짓말을 한다. 215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신, 자기(정신),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와 깊은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란 일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즉, 일체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감동되어 일체가 가능함을 깨달은 정신의 사람만이 신과의 관계에 이르렀다고 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의지가 인간에게 실현가능성이 있음으로써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신의 의지가 필연적인 것일뿐이라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같이 언어를 갖지 않는 존재로 있을 것이다. 217
숙명론과 결정론에는 긴장을 완화하는 가능성, 필연성을 조절하는 가능성, 즉 완화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고, 속물근성은 무정신성으로 인해 각성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속물근성은 가능성을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18
무지는 절망의 가장 위험한 형태일 수 있다. 무지하기 때문에 절망자는, 이것이야말로 그 스스로의 파멸이지만, 절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어떤 작용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절망의 수중에 몸을 맡긴 채 아주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221
나 그 대신 자신은 환상이 더 이상 없는 가장 높은 입장에 있는 듯이 생각하여 이 입장에서 청년의 환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묘한 환상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236
지상적인 것에 관한 절망, 또는 지상적인 어떤 특정의 것에 관한 절망이 절망인 한, 사실 그런 절망들은 또한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것이 모든 절망의 정식이기 때문이다. 239
지상적인 것이 자기로부터 떠나 버림으로써 자기가 절망하는 경우, 그 절망은 개인적인 것으로서 밖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자기가 자기 절망에 관해서 절망하는 경우의 이 새로운 절망은 자기로부터의 내적 억압(즉 반동)으로서 간접적 또는 직접적으로 자기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자기로부터 직접적(외적 영향)으로부터 오는 반항과는 다르다. 마지막으로 또 여기에는 다른 의미에서긴 하지만, 또 하나의 진보가 있다. 이 절망은 보다 더 강도가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선 구원에 더욱 가까이 가 있다. 240
최초에 지상적인 것(전체적, 일반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개별적, 개인적인 것)에 관한 절망이 있고, 다음으로 영원한 것,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것에 관한 절망이 온다. 그런 다음에 반항이 나타난다. 이것은 영원한 것의 힘을 의식한 절망이기 때문에, 이 반항은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그런 자기가 자기 속의 영원한 것을 절대적으로 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항은 영원한 것의 힘에 의한 절망임으로 해서 진리의 가까이에 있게 된 것이지만, 또 강력한 진리의 바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반항은 진리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신앙을 향한 통로인 절망도 역시 영원한 것의 힘에 의한 절망으로서, 거기서 자기는 영원한 것의 힘에 의한 자기 자신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용기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반항에 있어서의 자기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에서 시작하려 하지 않고, 지상적인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것이다. 246
우리는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다고 하는(신앙으로 향하는 것과 같은, 자기체념적 약함의 절망), 가장 낮은 형태의 절망에서 시작했다. 악마적인 절망은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기를 바란다고 하는, 욕망 중 가장 그 도를 강하게 한 형태의 것이다. 이 절망은 스토아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도취하거나 자기를 신격화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빗나간 것이긴 하다. 하지만 어느 의미에서도 자기의 완전성을 목표로 삼는 스토아적인 절망과는 다르다. 여기서의 악마적 절망은 인생을 증오하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것이고, 자기의 비참한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것이다. 253
제2편 절망은 죄다ㆍ264
제1장 절망은 죄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보면(미학이 뭐라고 하든) 시인의 생활방법은 모든 것이 죄이다. 존재하는 대신 시를 짓고, 공상에 의해 선과 진에 간계할 뿐, 선과 진에 힘을 쓰지 않는, 즉 선과 진으로 살고자 노력하지 않는 죄인 것이다. 264
- 자기의식의 여러 단계(‘신앞에서’라는 규정)
아이들은 부모를 척도로 삼아왔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국가를 척도로 삼게 되면서부터 자기가 된다. 그러나 신을 척도로 삼게 된다면 얼마나 무한한 악센트가 자기 위에 놓이겠는가! 이렇듯 자기를 재는 척도는 항상 인생의 단계에 따라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동질의 자기 바로 그 자체이다. 267
절망의 정도는 자기 의식에 비례하여 강해진다. 그리고 자기의 정도는 자기를 재는 척도에 따라 강해진다. 신이 척도가 될 경우에는 한없이 강하게 된다. 신의 관념이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자기도 증가하고, 자기가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신의 관념도 증가한다. 자기가 그러한 단독적 자기로서 현실적으로 신 앞에 있는 것을 의식할 때, 그때 자기는 무한의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자기가 신 앞에서 죄를 범하고 의식하는 것이다. 268
죄란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거나, 또는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정의가 어떤 의미에서는 몇 가지 장점을 틀림없이 지니고 있다고 인정된다 하더라도(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점은 유일하게 성서에 따른다는 것인데, 성서를 항상 죄를 불복종으로 정의하고 있다), 너무 지나치게 정신적이 아닐까? 269
죄의 반대가 덕이라고 사실 종종 생각되어 온 일이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은 상당히 이교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죄를 단순히 인간적인 척도로 달게 받아들여, 죄가 무엇인지를, 또 모든 죄가 신 앞에 있다는 것을 결코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반대는 덕이 아니라 신앙이다. 270
부론 : 죄의 정의는 절망의 가능성까지도 지니고 있다. 절망에 대한 일반적 사변
그 인간을 위해, 또 그 인간 때문에 신은 세상에 온 것이며,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움을 겪고 죽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난의 신이 그 인간을 보고 제발 구원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구걸하다시피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세상에 바른 정신을 잃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이 신 앞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수난의 신 앞에서 감히 그것을 믿고 받아들일 만한 겸허한 용기를 지니지 못하는 자는 누구나 좌절하는 것이다. 273
도대체 좌절이란 무엇일까? 좌절이란(숭고한 상대에 대한) 불행한 결단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질투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기하는 자 자신이 품는 질투이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더 짓궂게 자기 자신에게 맞서는 질투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좁은 마음으로는, 신이 그에게 주고자 했던 특이한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좌절하는 것이다. 274
좌절도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의 경탄은 질투이던 것이,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는 예배, 즉 좌절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적인 지혜를 한마디로 말하면(summa summarum), ‘도를 지나치지 마라(ne quid nimis), 지나침은 못미침이나 같다’라는 그 ‘황금의’ 지혜인 것이다. 274
그리스도 교도이면서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자는 아직도 그것을 믿은 일이 없는 자이다. 만일 그가 믿고 있다면 신앙의 감격이 있을 뿐이지 변호 따위는 아예 없을 것이다. 아니 그 감격은 공격이며 승리이다. 믿는 자는 승리자이다. 275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옳은 일과 좋은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를 실행할 것이다.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을 이행하지 않는 일은, 옳은 일과 좋은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부정을 저지르고 좋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德은 知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무지는 부덕, 즉 죄인 것이다. 296
소크라테스적으로는, 만일 죄와 무지가 같다면, 사실상 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오직 의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에 무지한 상태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그 경우 죄는 현실적(의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무지를 죄라고 한다면, 반대로 사람이 올바른 일 또는 부정한 일을 알면서 죄를 행하는 일은 물론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며, 소크라테스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적인 정의가 올바르다고 한다면, 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278
어떤 사람이 올바른 일을 하면, 물론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것을 정말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곧 그를 움직이게 하여 그 올바른 일을 하도록 시켰을 것이며, 당장에 그를 그 이해와 일치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무지는 죄와 같다(즉 우리 시대에 윤리적 교정을 거친 소크라테스적 윤리이다). 282
그리스도교는 또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즉 죄가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해명하려면 신으로부터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는 인간이 올바른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284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더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말한다. 그것은 그가 올바른 일을 이해하려고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 그가 올바른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뒤이어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올바른 일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일을 행한다(이것이 본래의 듯으로 본 절망의 반항이다). 또는 올바른 일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고. 간단히 말해서 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전적인 힐책이며 고소이다. 신이 고발자로서 인간에 대해 제기하는 고소장이다. 285
- 죄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죄가 소극적(신에게로의 귀의 등)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창조적 반항)인 것이라 함은 정통파인 교의학과 일반적인 정교가 그 옹호를 위해 계속 싸워온 것이다. 일반적 정교는, 죄를 단순히 소극적인 것, 즉 약함, 감성, 유한성, 무지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죄의 정의는 모두 범신론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물리쳐 왔다. 286
A의 부론 : 죄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희귀한 것이 아닐까?
“신의 계시에 의해 죄가 무엇인가에 관한 해명이 된 이후에,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거나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일” 이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291
대부분의 인간, 더욱이 거의 모든 인간이 절망하고 있으며, 단지 그 절망의 강도가 낮다는 것뿐이다. 물론 높은 정도로 절망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공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미적으로 보면 단지 우월성에 착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정도가 강한 절망은 정도가 낮은 절망보다 훨씬 구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안긴 생활은 변증법적인 것에 무관심하게 영위되므로, 선(신앙)에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도 무정신적(직접적)이어서 죄라고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무정신적이므로 절망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291
제2장 죄의 계속
모든 죄는 상태에 따라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계속되는 그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표현되어야 하며, 또 이하에서 정확하게 표현되겠지만, 죄 속에 있는 각 상태는 각자 새로운 죄이고 죄 그 자체이다. 300
영원은 단지 두 개의 공간 밖에 갖고 있지 않다. 신앙이냐, 죄이냐. 즉 “신앙에 의해 행하지 않으면 다 죄가 된다.” 회개할 수 없는 죄는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죄가 회개되지 않고 있는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300
‘죄의(일관성의) 계속’이라는 경우 개개의 새로운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 속에 머문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그 자신 속에서 죄의 정도를 강하게 하는 셈이다.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식하면서 죄의 상태에서 있게 됨으로, 죄의 정도가 높아져가는 그 운동의 법칙은 여기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면을 향해 점점 의식의 강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304
자기의 죄에 관해 절망하는 죄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죄(좌절)
죄란 신 앞에서의 절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가 강화된 것이 죄에 관한 절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신은 죄의 용서, 즉 화해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은 절망한다. 그러므로 절망은 보다 심각하게 표현되고, 이 절망은 마침내 신과 어떤 식의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관련이 생기는 것은 절망이 보다 더 신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이며, 보다 더 강하게 죄 속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신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모습은 마치 그가 신에게 덤벼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죄의 용서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311
신의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죄이다. 유대인은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려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좌절했고, 그것은 유대인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신앙인이면 물론 그리스도가 신이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을 테지만)이 죄를 용서하려 할 때, 비신앙인이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도의 자기정신 상실(즉, 보통 그리스도교계에서 볼 수 있는, 나약함에 의한 신으로의 귀의)이 필요하다. 다음에는 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일에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정신 상실(약함의 절망)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일이다. 313
신은 일반적으로 질서의 친구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신 자신은 모든 장소에 모든 순간에, 임하고 존재한다. 이것은 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의 칭호로서 교과서 안에서 취급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저 심심하면 조금식 생각해볼 뿐, 결코 온갖 순간들을 통해 그것을 생각해보려고 하진 않는다. 신은 곳곳에 편재한다. 318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좌절이다. 그리고 좌절이란 절망의 정도가 강화된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좌절은(아직 좌절의 가능성인 단계에 비하여) 오히려 죄로 꼽히질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에 간해서는 말할 수 없으며, 아직 좌절되지 않은 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절이 죄의 정도가 진전된 것이라고 생각될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적 죄는 신앙에 맞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덕에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322
소크라테스적으로는, 만일 죄와 무지가 같다면, 사실상 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오직 의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에 무지한 상태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그 경우 죄는 현실적(의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무지를 죄라고 한다면, 반대로 사람이 올바른 일 또는 부정한 일을 알면서 죄를 행하는 일은 물론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며, 소크라테스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적인 정의가 올바르다고 한다면, 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278
어떤 사람이 올바른 일을 하면, 물론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것을 정말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곧 그를 움직이게 하여 그 올바른 일을 하도록 시켰을 것이며, 당장에 그를 그 이해와 일치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무지는 죄와 같다(즉 우리 시대에 윤리적 교정을 거친 소크라테스적 윤리이다). 282
그리스도교는 또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즉 죄가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해명하려면 신으로부터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는 인간이 올바른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284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더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말한다. 그것은 그가 올바른 일을 이해하려고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 그가 올바른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뒤이어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올바른 일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일을 행한다(이것이 본래의 듯으로 본 절망의 반항이다). 또는 올바른 일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고. 간단히 말해서 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전적인 힐책이며 고소이다. 신이 고발자로서 인간에 대해 제기하는 고소장이다. 285
- 죄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죄가 소극적(신에게로의 귀의 등)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창조적 반항)인 것이라 함은 정통파인 교의학과 일반적인 정교가 그 옹호를 위해 계속 싸워온 것이다. 일반적 정교는, 죄를 단순히 소극적인 것, 즉 약함, 감성, 유한성, 무지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죄의 정의는 모두 범신론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물리쳐 왔다. 286
A의 부론 : 죄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희귀한 것이 아닐까?
“신의 계시에 의해 죄가 무엇인가에 관한 해명이 된 이후에,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거나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일” 이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291
대부분의 인간, 더욱이 거의 모든 인간이 절망하고 있으며, 단지 그 절망의 강도가 낮다는 것뿐이다. 물론 높은 정도로 절망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공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미적으로 보면 단지 우월성에 착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정도가 강한 절망은 정도가 낮은 절망보다 훨씬 구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안긴 생활은 변증법적인 것에 무관심하게 영위되므로, 선(신앙)에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도 무정신적(직접적)이어서 죄라고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무정신적이므로 절망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291
제2장 죄의 계속
모든 죄는 상태에 따라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계속되는 그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표현되어야 하며, 또 이하에서 정확하게 표현되겠지만, 죄 속에 있는 각 상태는 각자 새로운 죄이고 죄 그 자체이다. 300
영원은 단지 두 개의 공간 밖에 갖고 있지 않다. 신앙이냐, 죄이냐. 즉 “신앙에 의해 행하지 않으면 다 죄가 된다.” 회개할 수 없는 죄는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죄가 회개되지 않고 있는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300
‘죄의(일관성의) 계속’이라는 경우 개개의 새로운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 속에 머문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그 자신 속에서 죄의 정도를 강하게 하는 셈이다.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식하면서 죄의 상태에서 있게 됨으로, 죄의 정도가 높아져가는 그 운동의 법칙은 여기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면을 향해 점점 의식의 강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304
자기의 죄에 관해 절망하는 죄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죄(좌절)
죄란 신 앞에서의 절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가 강화된 것이 죄에 관한 절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신은 죄의 용서, 즉 화해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은 절망한다. 그러므로 절망은 보다 심각하게 표현되고, 이 절망은 마침내 신과 어떤 식의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관련이 생기는 것은 절망이 보다 더 신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이며, 보다 더 강하게 죄 속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신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모습은 마치 그가 신에게 덤벼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죄의 용서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311
신의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죄이다. 유대인은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려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좌절했고, 그것은 유대인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신앙인이면 물론 그리스도가 신이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을 테지만)이 죄를 용서하려 할 때, 비신앙인이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도의 자기정신 상실(즉, 보통 그리스도교계에서 볼 수 있는, 나약함에 의한 신으로의 귀의)이 필요하다. 다음에는 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일에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정신 상실(약함의 절망)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일이다. 313
신은 일반적으로 질서의 친구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신 자신은 모든 장소에 모든 순간에, 임하고 존재한다. 이것은 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의 칭호로서 교과서 안에서 취급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저 심심하면 조금식 생각해볼 뿐, 결코 온갖 순간들을 통해 그것을 생각해보려고 하진 않는다. 신은 곳곳에 편재한다. 318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좌절이다. 그리고 좌절이란 절망의 정도가 강화된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좌절은(아직 좌절의 가능성인 단계에 비하여) 오히려 죄로 꼽히질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에 간해서는 말할 수 없으며, 아직 좌절되지 않은 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절이 죄의 정도가 진전된 것이라고 생각될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적 죄는 신앙에 맞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덕에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322
유혹자의 일기 The Seducer’s Diary
나의 코델리아!
나는 무엇일까요? 당신의 성장을 함께 호위하는 다소곳한 기록자입니다. 당신이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상을 할 때, 당신 아래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날아다니느라 피곤해졌을 때 잠깐 동안 앉아서 쉬었다 가는 나뭇가지 입니다. 열광적인 높은 음의 소프라노 속에 끼어들어 그 소프라노를 더욱 아름답게 들리게 하는 베이스입니다. 나는 무엇일까요. 당신을 대지에 붙들어 매는 지상의 중력입니다. 그러면 나의 정체는 무엇인지요? 육체, 물질, 흙, 먼지, 재입니다. 나의 코델리아, 당신은, 당신은혼이고 정신입니다. 당신의 요하네스. 458
여성은 나에게는 고찰할 점이 무진장으로 있는 소재요, 영원히 범람하는 관찰대상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여성에 대한 연구에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는 될지언정 완전한 인간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심미적인 사람은 아니다. 미학이 아름다운 것에만 관계됨은 미학의 영광이며, 미학이 신성함을 지녔다는 증거이다. 미학은 본질적으로 문학과 여성 이외에는 문제 삼지 않는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나는 즐겁고 기쁘다.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태양은 한없이 다양한 광선을 방사하여 언어의 흩어짐(창세기)처럼 퍼지고 여성은 제각기 그 흩어진 광선의 일부, 즉 여성 전체의 일부분을 갖고 있다. 바로 그 부분을 중심으로 여성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이 조화를 잘 형성하는 것이다. 483
타인을 위한 존재인 여성은, 일반적으로 모든 여성적인 모든 것에 의해서 자연과 공통점을 지닌다. 즉, 자연 전체는 단순히 타인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 하나하나의 특수한 부분이 다른 특수한 부분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목적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자연 전체가 타인을 위해서 즉 정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개개의 자연도 마찬가지다. 가령 식물의 생명은 참으로 천진난만하게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을 열어 놓고, 다만 타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수께끼도, 글자도, 비밀도, 목소리도, 또 그 밖의 것도, 모두 다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485
나의 코델리아!
지금이야말로 나는 당신을 진정으로 나의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당신이 내 소유물이라는 점을 생각나게 하는 표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차 나는 당신을 정말로 내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내가 손으로 당신을 꼭 붙잡고 당신이 포옹으로 나를 안을 때, 우리에게는 서로가 상대편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반지 따윈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포옹이야말로 표적 이상의 반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반지가 우리를 견고하게 둘러쌀수록, 우리를 더욱 밀접하게 결합시키고, 자유는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유는 당신의 나의 것이라는데 있으며, 나의 자유는 내가 당신의 것이라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요하네스. 497
밤은 고요하다. 시간은 12시 15분 전이다.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이 교외를 향해 축복의 나팔을 분다. 그 소리가 블레그담이 있는 쪽에서 메아리 쳐온다. 그는 성문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나팔을 분다. 그 소리가 아까보다 더 먼 데서부터 메아리 쳐온다. 모든 것이 평안하게 잠들어 있다. 다만 사랑만이 깨어 있다. 자아! 일어나라! 그대들의 신비한 사랑의 힘 들이여. 이 가슴속에 깃들어라! 밤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한 마리의 새가 울음소리와 함께 날개를 치고 침묵을 깨뜨린다. 새는 이슬이 내린 들판을 나직이 떠서 성곽 밖 시내의 경사진 둑이 있는 쪽으로 날아간다. 저 새도 아마 연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다. 나는 그것을 전조라고 생각한다. 자연 전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려주는 징조로 가득 차 있는가. 새의 비상, 울음소리, 둥둥 떠서 날뛰는 물고기,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아득히 울려 퍼지는 수레 소리, 멀리서 메아리 쳐오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나는 전조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밤의 한때에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유령이 아니다. 나는 일찍이 있었던 것을 보는 게 아니고, 미래에 오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있다. 모든 게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의 신화인 것이다. 501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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