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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by mubnoos 2021.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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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예술 편,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비례가 객관적일수록 이미지는 사진에 가까워지고, 구성적일수록 디자인에 가까워진다. 두 비례는 이렇게 서로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이 둘이 행복하게 하나로 결합되는 경우도 있다. 예술사에서 다시 찾아보기 힘든 이 현상은 딱 한 번 고대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이집트의 彫像들을 보라. 묘사는 디자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 비례가 실제 인체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집트의 장인들은 조상제작에 ‘카논Kanon’을 사용했다. 18

 

카논만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세 가지 문제.
첫째, 동작이나 자세에 따라 신체의 길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근육이 수축하거나 이완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체의 길이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가령 정면에서 볼 때와 측면에서 볼 때 코의 길이는 다르다.

셋째, 완성된 작품의 경우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길이가 달라 보인다. 가령 10미터 높이의 신상을 아래서 올려다보면 머리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게다. 이렇게 신체의 길이는 자세와 각도, 그리고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나 이런 미세한 변화량까지 카논으로 일일이 정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19

 

이집트 조각은 그다지 실물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제작적 비례에서 비롯된 양식화의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 조각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하다. 제작적 비례를 포기하고 철저하게 ‘객관적 비례’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 예술에 양식화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벨베데레의 아폴론’과 ‘밀로의 비너스’를 측정해보면 상반신과 하반신이 정확히 0.382대 0. 618의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다. 이는 그리스 조각에 남아있는 제작적 비례의 요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조각의 전반적 경향 은 역시 ‘객관적 비례’라고 봐야 한다. 23

 

파르테논 신전이 미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은 이른바 ‘황금률’에 따랐기 때문이라 한다. 황금률은 대략 1:1.618에 해당하는 비율로 꽃잎이나 고동과 같은 자연물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이 때문에 종종 미적 객관주의, 즉 ‘아름다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속성’ 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47

 

미가 수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견해를 미에 대한 ‘형식적 정의’라고 한다.
반면 미의 본질을 수량화할 수 없는 어떤 질적 특성에서 찾는 견해를 미에 대한 ‘실질적 정의’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헬레니즘 시기에 들어와 미의 관념이 형식적 정의에서 실질적 정의로 바뀐 셈인 데 이는 미적 관념의 역사에서 실로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가 도입한 이 새로운 정의가 훗날 중세 문명의 미감을 결정하게 된다. 62-63

 

중세 예술이 가시적인 것을 넘어 비가시적 세계를 드러내려 했다면,
현대 회화 역시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 하려 한다.

 

중세 예술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형식(빛과 색)에 담아 전달했다면 현대 예술에서도 ‘내용은 형식 속에 침전’된다. 81

 

중세예술은 번쩍이는 금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의 빛을 상징하려 했다. 하지만 회화의 임무가 가시적 세계의 재현으로 바뀐 이상, 초월적 빛을 상징하던 금이 화면에 남을 이유도 사라진다. 물감으로 연출한 색채와 광휘는 초월이 아니라 세속에 속한다. 101

 

 

사실 브루넬레스키가 발견하고 알베르티가 이론화한 선원근법은 크게 두 가지 의심쩍은 전제위에 서 있다. 첫째는 세계를 오직 고정 된 한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시각 피라미드의 횡단면에 걸린 모습을 세계의 재현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일상적 체험과는 동떨어진 매우 ‘인위적인’ 조건이다. 왜? 먼저 원근법은 공간의 세 좌표를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크기의 공간이라도 상하 좌우 전후의 어느 쪽이냐에 따라 각각 다르게 지각한다. 또 원근법은 세계를 고정된 하나의 눈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이는 두 개의 눈으로 보기에 우리의 시야는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형에 가깝다. 또 원근법은 시각 피라미드의 횡단면 위에서 이미지를 포착하라고 한다. 하지만 세계를 보는 우리 눈의 망막은 구면이다. 이 생리학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문제들 외에 또 다른 주관적 요인이 첨가된다. 즉 똑 같은 사물이라도 우리는 심리적으로 중요한 것은 크게, 덜 중요한 것은 작게 표상한다는 것이다. 122-123

 

한마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 눈에 비치는 사물의 길이는 선원근법에서 가정하듯이 거리의 함수가 아니라 시선의 각도의 함수 임을 ‘확인’한 것이다. 문제는 일상적 지각이 원근법적 지각과는 다르다는 데 있다. 126

 

실물과 구별할 수 없는 그림, 그것의 역사는 미술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가령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을 생각해보라. 제욱시스 는 포도넝쿨의 환영으로 새의 눈을 속였으나 파라시오스는 작품을 덮은 가리개의 환영으로 ‘새의 눈을 속인 화가의 눈’을 속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눈속임이라는 모티프, ‘눈을 속이다’를 불어로 ‘트롱프뢰유, trompe I’oeil’라고 한다. 미술에서 이 말은 동시에 실물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한 그림을 가리킨다. 187

 

트롱프뢰유를 이용해 건물의 천장이 마치 하늘을 향해 트인 것처럼 연출하는 것이다. 그 가상의 하늘에는 대개 성모나 성자들이 승천 하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그 장관을 16, 7세기에 마니에리스모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제수이트 교회 안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건물의 천장에 환영의 공간을 연출하는 것, 이를 흔히 ‘소토 인 수, sotto in su’라고 한다. 이탈리아어로 ‘아래에서 위로’라는 뜻이다. 소토 인 수의 대가는 역시 안드레아 포조Andrea Pozzo이다. 로마의 산티냐조 성당 천장에 프레스코로 그려진 벽화를 보라. 정말 승천 하는 인물들을 아래서 올려다보는 듯 하다. 하지만 하늘은 가상이다. 그곳은 실은 막혀있다. 빈의 제수이트 교회의 천장벽화는 위로 굽어 올라간 돔으로 보이지만 실은 평면이다. 193

 

독일 낭만주의 화가 루트비히 리히터는 젊은 시절 세 명의 친구와 함께했던 어떤 실험을 회상한다. 네 젊은이는 티볼리라는 곳에서 똑같은 풍경을 그리기로 합의하고 그림을 그릴 때 상태를 조금도 왜곡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실험결과 네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서로 판이하게 달라 보이는 네 장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이 실험을 통해 그는 ‘객관적 시작이란 있을 수 없으며, 형태와 색상은 기질에 따라 다르게 파악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223

 

바로크의 기준에서 볼 때 아름다움이란 결코 완벽하게 파악되는 형태가 아니라, 모호한 기운을 품고 있는 그래서 감상자에게 늘 새로 운 여운을 남기는 그런 형태에서 발견된다. 이 불명료함 때문에 관찰자는 어둠 속에 묻혀버린 대상의 윤곽을 자유로이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이 불명료함이 수학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자. 거기에는 등장인물의 손이 거의 모두 화면에 등장한다. 반면 렘브란트가 그린 직물조합원의 집단초상에는 여섯 명의 인물이 존재하나 화면에 묘사된 손의 수는 다섯 개에 불과하다. 242

 

신고전주의 주창자 빙켈만은 예술의 발전을 유기체의 성장과정에 비유한다. 예술은 탄생하고 성장하여 절정에 이른 후 점차 쇠퇴하여 소멸해간다는 것이다. 뵐플린은 이 선형적 사관을 부정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의 역사는 두 개의 양식의 교체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예술의 역사는 일직선의 진행이 아니라 시계추의 왕복운동에 가깝다는 것이다. 빙켈만의 사관이 역사적이고 통시적이라면, 뵐플린의 관념은 형식적이고 체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247

 

비평문 안에는 반드시, 첫째, 작품의 특성에 대한 기술, 둘째, 작품에 관련한 역사와 이론의 제시, 셋째, 작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세가지가 빠진 글은 비평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비평이 그저 기술과 평가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의 탄생’에서 알베르트 드레스드너는 미술비평을 크게 인식과 평가, 영향의 세 측면으로 구별한다. 인식이란 비평의 記述적 측면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가리킨다. ‘평가’란 비평의 평가적 측면으로 예술적 가치에 대한 주관적 판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향은 비평의 정치적 측면으로 창작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려는 비평가의 시도를 의미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비평의 최종 목적인지도 모른다. 273-274

 

르네상스 이후 이른바 ‘⼤ 이론’으로 서구예술을 이끌어온 고전예술의 이념, 그것도 19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여 20세 기에 들어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 이른다. 회화에서는 재현이 사라지고(추상회화), 음악에서는 조성이 사라지며(무조음악), 문 학에서는 의미가 사라지고(무의미시), 연극에서는 개연적 연결이 사라지고(부조리극), 이른바 현대예술은 겉으로만 봐도 그 이전의 예술과는 현저히 다르다. 345

 

한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 1896-1984)같은 미술사학자는 현대예술에서 어떤 건강하지 못한 몰락의 징후를 본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예술은 자기파괴의 길을 걷고 있다. ‘해체’와 ‘퇴폐’로 향하는 이 병적인 취향은 이제까지 서구예술에 생명을 부여해 주었던 중심, 즉 ‘신을 닮은 인간’이라는 이념이 사라진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화보수주의자는 이 질병에 대한 처방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영원한 인간의 상’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345

 

철학자 칸트는 미적 판단을 다른 판단과 분명히 구별하고 아름다움을 진리나 도덕에 못지 않은 독자적 가치로 선언한다. 이로써 예술의 자율성은 이론적으로도 뒷받침을 받게 된다. 과거에는 ‘예술들’도 자립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세 성당은 일종의 총체예술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건축이자 조각이자, 회화이자, 음악이자 연극이자 문학이었다. 르네상스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개별 장르들은 여전히 그 총체예술의 한 부분으로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18세기말 이래로 이 전체성은 해체되기 시작 한다. 가령 음악은 교회의 예배에서, 회화는 성당의 벽에서 떨어져 나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아예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는 절대음악,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추상회화로 자립화해버린다. 346

 

개별 장르들은 각자 제 길을 걸어 순수회화, 순수음악, 순수문학, 그리고 순수건축이 된다. 예술이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하면서 어디에 그림이 놓여 있고 그 장소가 그 그림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그에 따라 ‘전체 속에서 불가결한 의 미를 지니는 그런 뜻 깊은 형상의 세계를 형성하는 일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사물의 의미마저 상실된 것이다.” 이는 도상해석학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사실 오늘날 회화나 조각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서 과거의 도상해석학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352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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