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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 이즈미야 간지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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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한번 제대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 생활에 공백이 생기는 게 싫어서 일정을 빽빽하게 짜 넣는다. 출퇴근 때에도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아 경제신문을 읽으며 정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어학 파일을 들으며 외국어 실력을 높이는 데 힘쓴다.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고 모바일 메신저나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로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자 한다. 집에 있는 동안에는 보지 않더라도 항상 텔레비전을 켜놓는다. 시간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게임이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 이러한 일들은 모두 우리 내면에 자리한 공허와 마주하지 않으려고 무의식중에 하는 수동적인 행동이다. 현대인은 공백, 무익, 무음에서 공허를 느끼기 쉬워서 이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모여든다.

 

  • 많은 사람을 두루 사귀며 교류한다거나 하루하루 뜻깊게 보내거나 자신이 발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소중하게 쓰는 등 학교에서라면 크게 장려할 법한 이러한 행동이 사실은 공허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수동의 한 형태일 뿐이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에 내걸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표어가 찍힌 사진이다. 물론 이 표어가 새빨간 거짓말이며 이곳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 포로들은 벌레와 다를 바 없이 착취당해 많은 사람이 병들어 죽거나 가스실로 보내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 이는 상당히 특수한 상황 아래서 벌어진 대학살이었지만, 노동교가 지배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표어는 결코 연관 없는 역사상의 유물이 아니라 통렬한 풍자로 다가온다. 우리도 어느새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거짓된 표어에 휘둘려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루터는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일에 종사하는 것은 모두 소명이다’라고까지 확대해석하고 이것을 ‘천직’이라고 불렀다.
  • 기독교적인 금욕주의를 시발점으로 하여 천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자 일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좁혀졌고, 그것이 거꾸로 돈을 버는 일이 찬양 받는 자본주의를 등장시킴으로써 어느새 천박한 욕망을 자극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이 괴물이 우리의 신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노동교의 정체다.
  • 우리는 이미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봉사하고 있으며 ‘개인’ 으로서 자신에 대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기실현이다.

 

  •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미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이라는 명목으로 ‘본연의 나’에 어울리는 직업을 찾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스벤젠은 이러한 현대인의 상황을 비꼬아 ‘낭만주의적 변형’이라고 지적한다.

 

  • 우리는 삶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특이한 성질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말’이라는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정교하고 섬세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으며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살아가는 의미’를 묻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도 생겨났다.

 

  • 인간은 원초적 유대로 독립하더라도 본래는 ‘자발성’에 기초한 애정과 일에 의해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할 때 사람은 ‘설령 자유를 잃는다 해도 이러한 자유에서 벗어나 불안에서 구해줄 수 있는 인간이나 외부 세계에 복종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가 결과적으로 나치즘을 탄생시켰다고 날카롭게 고찰했다.

 

  • 도덕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 오스카 와일드

 

  • ‘살아가는 의미’는 무언가를 얻거나 성취해서가 아니라 인생에 의미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느낀다.

 

  • ‘현재를 살아가는 일’을 희생하고 그만큼 무언가를 차곡차곡 모아서 장래를 멋지게 살아보려는 이 비루한 ‘머리’의 발상은 우리의 장래가 미지수라는 데 대한 불안으로 잘도 파고들어 수많은 금융상품과 보험상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대비책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장래에 대비한다면 이는 본말전도일 뿐이다. 지금 다시 한 번,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걸려 있던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표어가 얼마나 허위로 가득 찬 말인지를 떠올려보자.

 

  • 무엇을 위해서 돈을 버는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오직 생계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서만 살아간다.

 

  • 어떻게 일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가 아닌 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존은 현실적인 것이다. 의미도 모른 채 무턱대고 일한다면 그것은 수동적인 인간이다. 소비인으로서 공허함만 느낄 뿐이다.

 

 

  • 산업혁명은 모든 일을 노동으로 전환시켰다. 물건은 일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의 산물로서 소비되는 운명으로 바뀌었다. 노동의 분업화는 기쁨과 행복 대신 허무감, 허탈함을 초래하였고 모든 것은 소비재로 전락하였으며 현대사회(소비자 사회)에서 일은 ‘예술’ 정도만 남았다. 관조 생활이 없어지고 노동하는 동물로 전환됐다. 노동하는 동물의 여가 시간은 소비에만 사용하게 됐다. 시간이 남으면 남을수록 탐욕만 커져갔다.

 

  •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산기계처럼 인식해 성과에 따라서만 가치를 매긴다면 인간의 정신은 깊이가 사라지고 영혼이 없는 로봇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주체성을 가질 수 없고 의미를 추구할 여유조차 없이 의무에 얽매여 매일같이 그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뒤쫓아가느라 급급해진다.

 

  •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의의를 추구하는 삶에 지쳤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다시금 의의를 물어본다고 해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도 않다.

 

  • 생산기계처럼 항상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온 우리의 의의 있는 일을 하라는 주술에 꽁꽁 묶여 초조해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의미를 느끼며 사는 삶을 상상할 여유조차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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