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_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
위대한 제국 로마도 결국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영원한 제국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국을 세운 로마보다, 제국을 다시 잃은, 멸망한 로마가 오늘날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로마는 멸망하기를 거부했기에 어쩌면 여전히 오늘날까지 먼 거울 distant mirror로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8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다’ 중에서 미국의 표어는 ‘다양한 것이 합쳐져 하나가 된다, E Plutibus Unum’는 의미의 라틴어다. 하버드 대학교는 ‘진실 Veritas’, MIT는 ‘머리와 손, Mens Et Manus’, 서울대학교는 ‘네 안에 있는 빛은 진실, Veritas Lux Mea’라는 라틴어를 로고에 적어두고 있다. 21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한 모든 인류는 그들이 탄생한 아프리카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갈 때 하나의 보틀 넥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반도 사이의 시나이 반도, 즉 레반트 Levant’다. 26
기원전 6,500~3,800년경 ‘남성적’인 우바이드 문화가 메소포타미아에 등장한다. 이제 인류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만들고 전쟁을 하기 시작한다. 이제 신들도 모두 남성으로 바뀐다. 중요한 점은 성벽을 짓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을 통솔하는 하이어라키hierarchy가 이때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우바이드 문화에서는 이전보다 더 정교한 토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36
영생의 약초를 뱀에게 도난 당하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어차피 죽어야 하는데 왜 살아야 하냐고?” 울면서 묻는 길가메시에게, 46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인 우트나 피쉬팀은 말한다. “길가메시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다시 집에 돌아가 원하는 일하며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거라. 그리고 좋은 친구들과 종종 만나 맛있는 것 먹고 술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라.” 38
에우로파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큰아들 미노스는 후에 크레타의 왕이 되는데, 오늘날 크레타 문명을 미노아 문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50
산토리니의 아크로티리는 남아 있는 유일한 미노아 문명의 도시로,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아틀란티스 전설의 기원일 것이라는 설이 많다. 52
기원전 15세기 문명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도시와 농업과 상업으로 붐비던 메소포타미아 문명, 오늘의 즐거움과 평화를 만끽하던 미노아 문명, 그리고 신과 죽음과 영생에 집착하던 이집트 문명. 그런데 유럽 끝자락 그리스 반도에 새로운 문명이 등장한다. 바로 미케네 문명이었다. 62
보통 그리스 문명을 나눌 때 페르시아 전쟁 전의 아르카익, 페르시아 전쟁 후의 클래식 그리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재위 BC336~323)대왕의 헬레니즘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이때의 조각들은 바로크 양식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장되고 드라마틱한 표현이 특징이다. 만약 박물관에서 조각이 뻣뻣하고 죽어있는 것 같다면 페르시아 전쟁 전, 가장 최고의 작품성을 가졌다면 페르시아 전쟁 후, 조금 과하다고 여겨지면 대체적으로 헬레니즘일 경우가 많다. 74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박트리아는 동양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곳으로 당시 상당한 문명적 발전을 자랑했다. 그러나 헬레니즘 제국의 중간 지역을 페르시아 후손들이 장악함으로써 헬레니즘 제국은 반으로 분할되고, 그 결과 박트리아인들은 그리스 쪽으로 이동할 수 없이 고립되었다. 이때 인도 문명과 결합해 새롭게 탄생시킨 문명이 바로 그레코 박트리안 문명이다. 그레코 박트리안 문명이 동양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 조각을 이곳에서부터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79
로마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유명한 로마의 로물루스 레무스 전설 덕분이 아니었다. 사비니, 움브리아, 에트루스카 등 주변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그만큼 많았던 덕분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문명은 에트루스카로, 그리스 문명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민족이었다. 남부에 있는 캄파니아에는 그리스 식민지들이 있었다. 캄파니아의 나폴리는 당시 네아폴리스로 불렸으며 그 자체가 신도시, 즉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지은 신도시를 의미했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가 정복하고 있었다. 86
로마의 문명은 현실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지금 도움이 된다면 바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로마를 과거 미국에, 그리고 그리스를 유럽에 비유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문명은 그리스, 유럽에서 왔지만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로마였고, 과거 미국이었다는 것 이다. _90
훗날 로마는 세계를 정복한 후 그들 자신의 승리 비결을 용맹함과 전투력에 있었다고 착각하지만 로마의 진정한 승리 비결은 시스템, 무기, 전술 이 세 가지에 있었다. 질서에는 무질서로, 무질서에는 질서로 대응하면서 상황에 맞게 무기를 적절하게 변형한 로마는 전 세계를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96
유대교 신전이 있던 그 장소에 현재는 이슬람의 성지인 바위 동 성당이 있다. 아랍어로 사크라Sakhrah로 불리는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이 바위가 바로 천지창조하신 야훼가 지구에 던진 첫 돌이었으며, 모리아 산의 정상이기도 한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한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 신에게 직 접 받은 십계명을 보관하던 언약궤가 바로 이 바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추후 모하메드 또한 이 바위를 밟고 인간 얼굴과 당나귀 몸을 가진 부락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다 하니, 오늘날 같은 곳을 장악하기 위해 두 종교가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101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로마는 앞선 문명을 통해 지중해 주변의 전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찬란한 로마의 영광도 결코 영원하지는 못했다. 로마는 왜, 언제부터 멸망하기 시작했을까? 과연 로마는 멸망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로마 제국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_113
‘불평등은 몰락의 징조다’
가이우스와 티베리우스 형제가 최초의 포풀라레스로 간주되며, 그 번성을 이끈 중심인물은 마리우스 장군이다. 옵티마테스는 세나투스 주도의 정치를 지지한 사람들로, 대표적으로 술라 장군이 있다. 이때 처음으로 정치가 진보가 보수로 나눠지기 시작한다. 125
로마의 공용 화장실은 원래 베스파시아누스 전까지만 해도 무료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정을 꼼꼼하게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의해 화장실 사용료가 처음으로 징수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여전히 유럽에서는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다. 이를 두고 아들 티투스가 비난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관용적인 표현 Money does not stink으로 사용된다. 145
교수의 절반 이상이 나머지 절반보다 훨씬 더 강의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운전자의 상당수도 본인이 과반수보다 운전을 더 잘한다고 생각한다. 착각은 인간의 본능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조명효과spotlight effect라고 하는데, 우리는 항상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잘하고 다른 사람이 이러한 나에 대해 실제 이상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164
로마를 네 명의 황제들이 통치하는 4두정치, 테트라키tetrarchy는 동로마, 서로마에 각각 정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부제인 카이사르가 있어 총 네 명의 황제들이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형태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동로마와 서로마 부제로 각각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를 임명한다. 테트라키는 통치를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 후계자 선정을 위한 기초가 되는데, 즉 정제가 죽으면 부제가 뒤를 이어 정제의 자리에 오르고 새로운 사람이 다시 부제의 자리에 오르는 방식이다. 만약 정제가 계속해 서 통치할 경우 20년 후에는 은퇴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한 명의 황제만 무너뜨리면 바로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던 반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168
1000년 전 켈트족에게 함락된 후 단 한 번도 점령당한 적 없는 로마. 영원한 제국의 영원한 수도 로마가 함락되다니! 로마가 함락되고 사라진다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인류 역사에 필연적일 것 같았던 로마 역시 하나의 도시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조건은 결국 무의미하다는 말이 된다. 180
‘과거를 동경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로마 멸망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후계자 임명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둘째, 극심한 빈부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셋째, 사회 시스템이 붕괴했다. 사실 로마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군사적인 이유는 개인의 전투력이 아닌 뛰어난 전술과 무기, 인프라 덕분이었다. 로마 군인 개개 인은 야만족들보다 더 뛰어나게 싸움을 잘하지 않았다. 신체적 조건만 보더라도 열세했다. 무기 또한 뛰어났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로마의 승리는 적군의 특징에 맞춰 펼친 전략적인 전술과 무기, 정비된 도로와 뛰어난 의술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와 자원이 모두 합쳐졌기에 가능했다. 200
3세기의 위기로 로마의 내부 사회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생산성 또한 현저히 낮아졌다. 도로는 망가지고 무기 생산도 원활하지 않았다. 로마의 장점인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전쟁은 이제 개인 간의 전투력 싸움으로 바뀌었고, 여기에서 로마가 패권을 거머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로마인들은 이 과정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과거를 동경하며 결국에는 이를 신에 대한 믿음 문제로까지 투사했고, 새로운 종교까지 횡행하기에 이른다. 로마는 그렇게 멸망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멸망 원인을 찾지 못한다. 201
‘정신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잃는다’
중세가 되자 로마 시님의 인구가 급감한다. 150만 명에 달하던 인구는 6세기 후에 천 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도시에 사는 인구의 대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땅에서는 납의 흔적이 사라진다. 이는 곧 철을 생산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문명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가축의 크기도 작아진다. 소의 키는 석기시대 115센티미터였던 것이 로마시대 120cm로 커졌다가 중세기에 112cm로 다시 줄어든다. 석기시대로 역행한 것이다. 중세기는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더 이상의 생산활동도 없으며 글과 예술도 사라진 문명의 암흑기였다. 따라서 중세기인들은 불행한 현실 너머에 신의 세계가 있다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믿음에 의존한다. 219
예술의 재생이나 부활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 문명을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만, 유럽의 세계 정복에 그리스 로마 지식의 재발견은 필요조건일 분 충분조건은 아니다. 오늘날 유럽문명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242
1648년 독립한 후 처음 네덜란드는 세 가지 문제에 부딪친다. 첫째, 영토가 작은데다 그마저도 4분의 1은 해수면보다 낮고 절반 이상은 수시로 홍수가 날 위험성이 컸다. 둘째, 스페인의 왕이 곧 신성로마제국 황제였기에 독립 네덜란드는 유럽대륙과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셋째, 나라 자체가 워낙 작았기에 인구도, 인재의 수도 그만큼 적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나라로 네덜란드를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째, 댐을 만들어 바다를 막아 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탈바꿈했다. 둘째, 세계 무역을 만들어 전 세계와 거래를 했다. 셋째, 개방 사회를 만들어 전 유럽에서 박해 받고 차별 받는 사람들을 수용해 그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모두 받아들였다. 새로운 기술, 개척정신, 사회의 개방, 이 세 가지 성공 공식을 통해 네덜란드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다. 267
네덜란드는 1602년 세계 최초로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1621년 북미 대륙의 독점 무역을 위해 서인도회사를 설립한다. 1624년 지금의 뉴욕인 뉴암스테르담, 1627년 인 도네시아 바타비아, 1634년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 1665년 인도 벵골에 회사가 세워진다.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의 인디언들로부터 자신들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건설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우러스트리트이다. 268
흔히 일본의 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지만, 그보다 앞선 16세기에 이미 아메리카와 유럽에 발을 내디딘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하세쿠라 쓰네 나가다. 269
역사를 되짚어보면 모든 나라가 도약을 위한 기회를 한 번씩은 부여 받는다.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고, 중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271
인간이 가진 자원 중에서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자원은 바로 과거다. 우리는 결코 과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거에 집착하는 나라들은 모두 ‘운명의 바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래는 무한이다. 279
3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고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인류는 도시를 만들었다. 겨우 1만년 전의 일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혁신적인 변화의 출발점이 된 산업 혁명조차도 불과 25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인류의 삶이 산업혁명 후부터 개선되었다고 본다면 인류 역사의 90%이상은 전쟁과 죽음의 공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281
독일 출신의 미국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뉴요커’의 취재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다. 그러나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나 평범한 아이히만의 모습을 접한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도출한다. 참극은 체제에 순응한 평범한 사람이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수행할 때 벌어진다는 것이다. 285 1939년 유대계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가 쓴 ‘문명화 과정’에서, 엘리아스는 전쟁이란 폭력을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는 아주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즉 인간 개인의 폭력성이 너무 크기에 전쟁 또는 전쟁의 위협이 없으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295
스탠퍼드 교수인 오스트리아 출신 역사학자 발터 샤이델 Walter Scheidel은 ‘불평등의 역사’에서 인류는 역사에서 폭력 없이 평화, 정의, 평등을 이룬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한다. 295
미국 철학자 존 롤스는 ‘만민법’에서 국가란 언젠가 농경시대 사람들이 모여서 합의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리 타당하지 않아 보인 다. 독일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국가는 가족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스위스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예술로서의 국가’에서 국가란 예술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계획한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국가의 기원에 관해 현재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막스 베버의 이론이다. 베버에 의하면 국가의 역할은 폭력성의 독점화다. 쉽게 말해 인간이란 원래 폭력적인 존재이기에 가만히 두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므로 이를 국가가 독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296
국가가 독점한 폭력성이 개인들의 폭력성을 모두 합한 것보다 낮을 때에야 국가는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폭력성을 독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키 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에 힘을 더 모아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토마스 홉스도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란 국민 개인이 합쳐진 것이라고 말하며 국가의 통치권과 이를 구성하는 개인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했다. 국가의 왕이 자꾸만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은 독점권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므로 권력을 더 몰아주면 된다는 것이다. 298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그리스어의 없다ou와 장소topos를의미하는 단어를 조합해 ‘어디에도 없다’라는 의미의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를 창조한다. 헨리 8세의 폭 군정치를 모두 정당화시켜야 했던 모어가 이상적인 세상을 상상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03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Pierre Joseph Proudhon은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한 문제를 권력과 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권력은 부에서 나오기에 부의 확률 분포가 다르면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동은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기 위해 부의 소유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부가 특정한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소유는 도둑질이다’에서 처음으로 공유경제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304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 Mikhail Bakunin은 ‘신과 국가에서 God and the State’를 통해 소유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가 개인의 소유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에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304
프로동이나 바쿠닌이 인간의 소유와 부의 개념으로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고자 했다면 클레이스테네스는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특권을 약화시키고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참정권을 부여 받도록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이를 평등을 뜻하는 이소iso와 법을 뜻하는 nomos를 합쳐 ‘이소노미아 isonomia’라고 붙였다. 314
이후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부강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독재주의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보다 단합력에서 월등히 우월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기술과 외교력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314
자유민주주의는 타인의 우위에 서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대신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자유가 보장되는 안전한 사회를 보장한다. 하지만 이제 민주주의 2.0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반성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자유 없이도 경제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중국의 예가 생기면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큰 위기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322
우리는 흔히 인공지능 시대의 일자리 걱정을 한다. 직업의 47퍼센트가 사라진다는 예측에 실질적인 위기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과정을 로마 역사 속에서 봤다. 325
최근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즈’는 ‘자유주의의 가장 뛰어난 적’이라는 글에서 독일 헌법학자 카를 슈미트를 뽑았다. 1차대전 패배 후 독일에서 법대교수 생활을 시작한 슈미트는 역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믿었다. 계몽주의는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오며, 정부는 국민의 권력을 일정 기간 빌려서 이용할 뿐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카를 슈미트는 여기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서로의 적들인 국민이 어떻게 일치된 권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슈미트에게 정의란 강한 자의 승리를 의미하며, 국가주권자는 법적 예외 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자이기에 그의 말 자체가 법이며 정의라는 위험한 주장이었다. 328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세계화 덕분에 이제 전 세계는 하나의 운명이 되어서 자유민주주의와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으로 틀렸다. 기업은 세계화가 되었을지 몰라도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큰 경쟁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경쟁의 구도가 바뀌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가장 큰 핵심은 Anywhere people과 Somewhere people의 싸움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무대로 살 수 있는 20%의 사람들과 내가 태어나 자란 고장에서만 살 수 있는 80%의 사람들의 경쟁이다. 331
자유가 늘어나면 불평등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 중국은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불평등만 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자유는 커지면서 불평등은 막을 수 있는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에 대한 답이다. 애석하게도 노터데임대학 교수인 미국 정치학자 Patrick Deneen은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이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336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보부아르는 인간의 정체성은 ‘경험한 삶’을 통해서만 성립된다고 믿었다. 부유한 백인 남자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가난한 흑인을 이해할 수 없듯,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여성으로서의 불이익과 차별을 직접 경험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여성의 정체성은 유대계 독일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구별한 단순히 외향적이고 무의미한 ‘체험’이 아닌 내면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343
진실의 정의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진실이 사실이었다면 이제는 누구든 진정하게만 주장하면 그것이 곧 진실이 된다. 과다한 정보로 무엇이 진짜 뉴스인지 구별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거짓이라도 진정하게 주장하는 사람의 말이 진실이 된다. 346
찬란했던 로마 제국도 멸망했고 이후 유럽은 1000년 동안 중세기를 살았다. 암흑의 시대가 우리에게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회 발전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발전을 위해 싸우고 노력하지 않으면 역행의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347
오늘날의 전 세계의 움직임은 멸망한 제국의 역사를 좇고 있는 듯하다. 역사를 모르면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역사를 알아도 반복되는 역사를 모두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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