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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by mubnoos 2021. 1. 28.

라스꼴리니코프 = 로쟈 = 로지온 로마노비치 (주인공: 살인-자수, 8년형)

  • 합리주의자·무신론자
  • 선악을 초월하고 나아가서 스스로가 바로 법률이나 다름없는 비범하고 강력한 소수인간과 인습적 도덕에 얽매이는 약하고 평범한 다수인간으로 분류
  • 그는 자신이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 마리의 이에 불과한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인다. 그리고 또한 그 장면을 목격한 여동생, 리자베타도 같이 죽이게 된다.
  • 꿈 속에서 아시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유럽으로 퍼지는 광경을 보다 – 사람다마 자기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전염병

소냐 = 매춘부 = 성녀(구원자)

 

‘죄’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죄의식 양심에 따라 절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벌’- 죄에는 반드시 (자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벌이 따른다.

 

 

상권

 

7월초 굉장히 무더울 때, 저녁 무렵에 한 청년이 S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쓰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듯 천천히 K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계단에서 주인 아주머니와 마주치는 것을 용케 피했다. 그의 골방은 높은 5층 건물의 지붕 바로 밑에 있어서 사람 사는 방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벽장 같았다. 11

 

거리는 푹푹 찌는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힐 듯 갑갑하고 혼잡했으며 곳곳에 석회 가루, 목재, 벽돌, 먼지, 그리고 별장을 빌릴 만한 여유가 없는 페테르부르크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훤히 알고 있는 저 여름날의 악취가 가득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러잖아도 가뜩이나 심란해진 어린 청년의 신경을 한꺼번에 불쾌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도시의 이 구역이 유달리 많이 있는 술집에서 풍기는 참을 수 없는 악취, 평일인데도 심심찮게 마주치는 술 취한 사람들 때문에 이 풍경은 한층 더 혐오스럽고도 서글픈 색채를 띠었다. 깊디깊은 혐오감이 한 순간 청년의 섬세한 얼굴선 위로 드리워졌다. 13

 

그의 옷차림은 다른 사람 같으면, 심지어 이런 일이 다반사인 사람도 대낮에 이런 누더기를 걸치고 거리를 나다니는 것이 창피할 정도로 후줄근했다. 하긴 이 구역 자체가 옷차림에 놀라는 일은 좀처럼 없는 곳이었다. 센나야 광장도 가깝고 그렇고 그런 알 만한 업소가 지천에 널려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를 이루는 이곳 거리와 골목에 공장 노동자나 수공업 종사자가 밀집해 있고 가끔씩 온갖 희한한 양반들이 통째로 장관을 이루었기 때문에 무슨 특이한 인물과 마주쳐도 놀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법했다. 14

 

심장이 얼어붙고 신경질적인 전율이 이는 가운데 그는 한쪽 벽은 운하를, 다른 쪽 벽은 이 거리를 향해 있는 몹시 거대한 건물로 다가갔다. 이 건물은 자잘한 셋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재봉사, 기술공, 식모, 다양한 독일인들, 몸 파는 아가씨들, 하급 관리 계층 등 온갖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해서,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건물의 양쪽 대문과 양쪽 마당을 바삐 오가고 있었다. 이곳을 지키는 문지기도 서너 명이나 됐다. 청년은 그들 중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것에 몹시 만족하며 대문에서 눈에 띄지 않게 곧장 오른쪽 계단으로 숨어들었다. 어둡고 비좁은 ‘뒤’ 계단이었지만, 이미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또 연구한 만큼 그는 이런 정황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16

 

얼마 후 문이 빠끔히 열렸다. 집주인은 방문객을 대놓고 수상쩍어하면서 문틈으로 훑어보았고, 어둠을 뚫고 보이는 것은 그녀의 번쩍거리는 두 눈 뿐이었다. 하지만 층계참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내어 문을 활짝 열었다. 청년은 문지방을 넘어 어둠 침침한 현관으로 들어섰는데, 거기에는 손바닥만 한 부엌을 가려 놓은 칸막이가 있었다. 노파는 그 앞에 말없이 서서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예순 살쯤 된 조막만하고 말라빠진 노파였는데, 못됐게 생긴 날카로운 눈에 코는 작고 뾰족했으며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쓰고 있지 않았다. 별로 세지 않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는 번들번들 기름이 발려 있었다. 닭의 발목처럼 앙상하고 기다란 목에는 플란넬 쪼가리 같은 것을 두르고 어깨에는 이렇게 무더운데도 죄다 너덜너덜해지고 누렇게 빛바랜, 헐렁한 털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노파는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대고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청년이 그녀를 어딘가 독특한 시선으로 쳐다본 탓인지, 그녀의 눈에도 갑자기 또 아까처럼 수상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17

 

“…그러다 5시가 넘자, 보니까, 소네치카가 일어나서 숄을 두르고 망토 코트를 걸친 다음 집을 나갔고 8시가 좀 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곧장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가서는 그녀 앞의 식탁 위에 30루블어치 은화를 말없이 올려놓더군요. 힐끗 쳐다보긴 했지만 말 한마디 없이 오직 커다란 초록색 모직 숄을 집어 얼굴과 머리에 푹 덮어쓰고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 채 침대에 누웠는데, 오직 어깨와 몸만 바들바들 떨리더군요…. 하지만 나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봤습니다. 젊은 양반, 그러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역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소네치카의 침대로 다가가 저녁 내내 그 애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그 애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봤지요. 숫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요. 그러다가 둘이 서로 껴안은 채 잠이 들더군요…. 둘다….둘다….예…그런데도 나란 놈은….술에 취해 누워있었지요.” 마르멜라도프는 목이 메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황급히 술을 따라 쭉 들이마시고 꺼억 소리를 냈다. 38

 

“오늘 소냐에게 갔습니다. 술값이나 좀 얻으려고 간 거였지! 헤-헤-헤!” “정말 주던가?”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중 누군가가 한쪽에서 이렇게 소리치며 목청껏 웃기 시작했다. “바로 이 보드카 반 병이 그 애 돈으로 산 것이랍니다.” 마르멜라도프는 전적으로 라스콜니코프만 상대하며 말했다. “30코페이카, 그러니까 갖고 있던 돈을 전부 탈탈 털어서 제 손으로 내줍디다.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지요…. 이런 건 이 지상이 아니라 저어기… 그곳에서는 사람들로 인해 애가 타서 울기도 하지만 책망하지는 않지요. 책망은 무슨! 한데 책망하지 않을 때 마음은 더 아픈 법, 더 아프지요…! 30코페이카, 그렇습니다. 하지만 돈은 지금 그 애에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 45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셨고 또 모든 이들과 모든 것을 이해하셨던 그 분만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다. 그분 만이 유일한 분이자 심판관이니까. 그분께서 그날에 오셔서 물어 보실테지. ‘못된 폐병쟁이 계모를 위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위해 자기 몸을 팔았던 그 딸은 어디 있느냐? 지상의 자기 아버지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주정뱅이를, 그의 짐승 같은 행각에 경악하기는 커녕 오히려 불쌍히 여긴 그 딸은 어디 있느냐?’ 그러고는 말씀하시겠지. ‘자, 이리 오너라! 나는 이미 너를 한 번 용서했다… 한 번은 용서했노라… 지금도 너의 많고 많은 죄가 용서되리라. 많고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니…’ 그러고는 나의 소냐를 용서해 주실 거야. 용서해 주시고 말고. 용서해주시리라는 것을 나는 벌써 알고 있어…” 47

 

그들은 마당으로 들어가 4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은 올라갈수록 어두워졌다. 벌써 거의 11시가 다 됐기 때문에, 원래 이 무렵의 페테르부르크에는 진짜 밤다운 밤이 없음에도, 계단 위쪽은 몹시 어두웠다. 계단 끝, 맨 위쪽에 연기에 그을린 작은 문이 열려 있었다. 양초 토막이 누추하기 짝이 없는 방을 비추고 있었는데, 방 크기가 열 걸음 정도밖에 안 돼 현관에서도 방 안이 전부 다 보였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고 특히 아이들의 온갖 걸레쪽 같은 옷가지가 뒹굴고 있었다. 안쪽 구석에는 구멍투성이가 된 침대보를 둘러쳐 놓았다. 그 뒤에 침대가 있는 모양이었다.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의자 두 개,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방수포 소파, 그 앞에 놓인, 아무 칠도 하지 않고 식탁보도 덮지 않은 낡은 소나무 식탁뿐이었다. 식탁 끝에는 거의 다 타버린 수지 양초토막이 철제 촛대에 꽃혀 있었다. 그러니까 마르멜라도프는 방구석이 아니라 독방을 쓰는 셈이었으나, 그것은 통로로 사용되는 방이었다. 이어 거의 닭장 수준의 쪽방이 아말리야 리페베흐젤의 아파트를 쭉 가르며 펼쳐졌는데 마침 그쪽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곳은 떠들썩하고 시끄러웠다. 49-50

 

“더 이상 갈 데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하시냐고요, 형씨?” 갑자기 마르멜라도프가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어디든 갈 데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갑자기 그는 몸서리를 쳤다. 역시나 어제부터 들었던 한 가지 생각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하지만 그가 몸서리를 친 것은 이 생각이 스쳐 갔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스쳐가리라는 것’을 알고 도 예감하며 이미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생각이란 어제 든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데 차이가 있다면 한 달쯤 전, 아니 어제만해도 한낱 몽상에 불과했던 생각이 이제는… 이제는 갑자기 몽상이 아니라 뭔가 새롭고 무시무시한, 전혀 낯선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며 그 자신도 갑자기 이 점을 의식했던 것이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88

 

라주미힌이 훌륭한 까닭은 또, 어떤 실패에도 절대 당황하는 법이 없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붕 위에서도 살 수 있고 지옥 같은 굶주림과 이례적인 혹한도 견뎌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몹시 가난했고,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그야말로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샘물을, 물론 일감의 샘물을 무수히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겨울 내내 방에 불을 전혀 때지 못하면서도 추우면 잠이 더 잘 오기 때문에 이편이 더 기분 좋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지금은 그도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다지 오래가지 않을 것이고, 또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서둘러 상황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라스 콜니코프는 벌써 넉달은 족히 그의 집에 가지 않았고, 또 라주미힌은 그의 집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두 달쯤 전 어쩌다 길거리에서 마 주칠 뻔한 적도 한 번 있었지만 라스콜니코프 쪽에서 상대가 자기를 못 알아보도록 얼굴을 돌리고 아예 다른 쪽 길로 건너가 버렸다. 라주미힌은 그를 알아보긴 했지만 친구 녀석을 괜히 심란하게 만들기 싫어서 그냥 지나쳐버렸다. 99

 

그가 센나야 광장을 지나간 시각은 9시경이었다. 판매대는 좌판이든, 큰 노점이든 작은 노점이든 상인들은 모두 가게 문을 닫거나 상 품을 치우고 정리한 뒤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낮은 층에 위치한 싸구려 음식점 근처, 센나야 광장의 건물들의 더럽고 악취 나는 마당, 무엇보다 선술집 주변에는 온갖 종류의 수공업자와 비렁뱅이가 수없이 우글대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별 목적 없이 거리에 나올 때면 이곳이나 이 근처의 골목 하나하나가 유달리 좋았다. 여기서는 그의 누더기에 거만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으며 누구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입고 다녀도 됐다. K골목의 모퉁이에서 한 소시민과 아줌마, 즉 그의 아내가 두 개의 판매대를 앞에 둔 채 실, 노끈, 사라사 스카프 등의 상품을 팔고 있었다. 115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해체에서 구하는 거지. 하나의 죽음과 백 개의 생명을 서로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이나 바퀴벌레의 목숨, 아니, 그 만도 못한 목숨이야. 남의 목숨을 좀먹고 있거든. 얼마 전에도 홧김에 리자베타의 손가락을 깨물었는데,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려 나갈 뻔했지!” 123

 

그의 신념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이런 이성의 혼미와 의지력의 저하가 인간을 병마처럼 사로잡아 점차 진전에 진전을 거듭한 뒤 범행 직전에는 최고의 극점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범행의 순간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에 따라서는 그 이후에도 몇 시간은 족히 더 지속된다. 그러고 나면 모든 병과 다름 없이 그냥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문제인즉 이렇다. 병이 범죄를 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범죄가 그 특유의 본질상 어떻게든 항상 병과 같은 무엇을 동반하는 것일까? 그는 아직도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음을 느꼈다. 132

 

얘기를 나누는 동안 라스콜니코프는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윈, 바삭 여윈 창백한 얼굴은 제법 각이 져서 어딘가 뾰족하고 작은 코와 턱도 뾰족했다. 절대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푸른 눈은 무척 맑았고 그 눈이 생기를 띨 때면 얼굴 표정도 무척 착하고 티 없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리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 아니, 그녀의 모습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밖에도 유달리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더 있었다. 즉, 열여덟 살이나 됐음에도 거의 소녀로, 숫제 어린아이로 여겨질 만큼 자기 나이보다 훨씬 앳돼 보였으며 그 때문에 그녀가 어떤 몸동작을 취할 때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일도 더러 있었다. 429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실내복에 몹시 깨끗한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낡은 슬리퍼를 신은 편한 차림이었다. 나이는 서른다섯 살쯤 됐고 키는 평균보다 작고 살이 찌고 배도 좀 나온 사람으로서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말끔히 면도하고 머리카락은 바싹 깎아 놓았는데, 두 상이 커다랗고 둥근 데다가 뒤통수 부분이 왠지 유달리 둥그렇게 튀어나와 있었다. 코가 다소 들창코인, 통통하고 둥그스름한 얼굴은 어디 몸이 좋지 않은지 누렇게 되었지만 상당히 원기왕성하고 짓궂어 보이기도 했다. 눈의 표정이 좀 거슬리지만 않았다면 호인처럼도 보일 법한 얼굴인데, 거의 새하얀 속눈썹에 덮인 두 눈이 왠지 엷은 물빛 광채를 띠며 누구에게 윙크를 하듯 자꾸만 깜박거렸던 것이다. 이 눈의 시선은 어딘가 여자 같은 데가 있는 그의 전체적인 모습과 어쩐지 얄궂게도 잘 어울리지 않아, 첫눈에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뭔가를 부여해 주었다. 450

 

라스콜니코프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를 어디로 몰아붙이려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자신의 논문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제 논문의 내용이 완전히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진솔하고 겸손하게 말을 시작했다. “하긴, 솔직히 말해, 당신은 내용을 거의 정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더할 나위없이 정확하달까요…(그는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음을 인정해주는 것이 유쾌한 모양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오로지, 저는 당신의 말씀처럼 비범한 사람은 항상 온갖 무법행위를 자행해야 되고 반드시 그럴 의무가 있다고 주 장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제 생각으론 그런 논문이라면 아예 발표도 못하게 했을 것 같군요. 저는 그저 ‘비범한 사람’이 모종의 권리를 갖는다고…다시 말해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어떤 장애물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는다고 암시 했을 따름이며, 더욱이 오로지 자신의 사상(때로는 전 인류에게 구원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요)을 실행하는 데 그것이 요구될 경우에만 그렇다는 겁니다…..” 467

 

“양심이 있는 자는, 자신의 오류를 의식한다면, 괴로워하겠죠. 이게 그에겐 벌입니다. 징역과는 별개로.” “그럼, 정말로 천재적인 자들은”하고 라주미힌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남을 찔러 죽여도 되는 권리를 부여받은 자들, 그자들은 자기가 초래한 유혈에 대해서도 전혀 괴로워하지 말아야 된단 말이야?” “대체 왜 여기에 말아야 된다라는 말이 들어가지? 여기에는 허용도, 금지도 없어. 희생양이 불쌍하면 괴로워하라 그래… 폭넓은 의식 과 심오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고뇌와 고통은 항상 필수적인 법이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이라면, 내 생각으로는, 세상의 위대한 슬픔을 느끼지 않으면 안 돼.” 그는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 이렇게 덧붙였는데,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어조도 아니었다. 476-477

 

‘노파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가 격정에 휩싸이며 열렬히 생각했다. “노파는 실수였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노파가 아니다! 노파는 그 저 병에 불과했고…나는 차라리 넘어서고 싶었던 것이다…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원칙을 죽인 것이다! 원칙은 죽였지만 정작 넘어서는 건 아예 넘어서질 못하고 이편에 남게 됐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이는 것뿐이었지. 하긴 그러고 보니 그것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셈이다…원칙? 저 멍청한 라주미힌은 아까 무엇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을 욕했을까? 근면 성실하고 장사에 능한 족속인 걸. ‘보편적인 행복’에 종사하지 않는가… 아니다. 나에게 삶은 한 번 주어지는 것이지, 더 이상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마냥 ‘공동의 행복’ 을 기다리기는 싫다. 나도 살고 싶다. 그러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지 않는 편이 낫다. 아니, 그래서? 나는 다만, 호주머니 속에 1루블을 꼭 거머쥔 채 ‘공동의 행복’이나 기다리며 굶주린 어머니 옆을 그냥 지나치는 짓은 하기 싫었던 것이다. “공동의 행복을 위해 벽돌 한 장을 나르고 그로써 마음의 평온을 느낀다”. 이런 말씀. 하-하! 너희들은 나를 왜 그냥 통과시켰는가? 나 역시 한 번뿐인 삶을 살고 있고, 나 역시 살고 싶단 말이다… 에잇, 나란 놈은 미학적인 이에 불과할 뿐, 어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다. 나는 정말로 이다.’ 그는 계속 생각에 잠겨 심술궂은 캐감을 느끼고 그 생각에 들러붙어 그것을 헤적이고 갖고 놀면서도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495-496

 

 

 

하권

라스콜니코프는 빨리 몸을 돌려,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 동안에 힐끔 방을 훑어볼 수 있었다. 방은 크기는 컸지만 천장이 굉장히 낮았으며 카페르나우모프 가족이 내준 유일한 셋방으로서 그 집으로 통하는, 왼쪽 벽의 문은 잠겨 있었다. 맞은편의 오른쪽 벽에도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역시나 항상 굳게 잠겨 있었다. 그곳은 아예 다른 사람 집으로 호수도 달랐다. 소냐의 방은 어쩐지 창고 같았고 몹시 비뚤한 사각형 모양이어서 방 자체가 어딘가 불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운하 쪽으로 세 개의 창문이 나 있는 벽은 어쩐지 방을 비스듬히 잘라 놓았고, 그 때문에 한쪽 구석은 지나친 예각이 되어 어딘가로 깊숙이 푹 꺼져 버렸고 흐릿한 불빛 아래서는 잘 분간도 되지 않았다. 반면, 다른 쪽 구석은 아예 너무도 흉한 둔각이 돼 버렸다. 이 커다란 방 안에 가구는 거의 없었다. 오른쪽 구석에 침대가 있고 그 옆, 문 가까이에 의자가 있었다. 침대가 있는 벽 쪽, 남의 집으로 통하는 문 바로 옆에는 푸른 식탁보를 씌워 놓은, 허름한 판자를 엮어 만든 탁자가 있었다. 탁자 주위에는 두 개의 왕골의자가 있었다. 그 다음, 맞은편 벽, 예각을 이루는 구석에서 가까운 쪽에 크지 않은, 허름한 목재 장롱이 허공 속에 묻힌 양 서 있었다. 이 정도가 방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누르스름한 벽지는 구석구석이 시커메져 있었다. 분명히 겨울이면 습기가 차고 탄산가스가 배어들기 때문이리라. 눈에 훤히 보이는 가난이었다. 오죽하면 침대에 커튼도 없었다. 소냐는 그토록 유심히, 또 염치없이 방안을 뜯어보고 있는 손님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재판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무서워하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74

 

“당신을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치욕과 죄악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그 크나큰 고통 때문이야. 당신이 죄 많은 여자라는 건, 그건 그렇지.” 그가 거의 열광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죄인인 것은 무엇보다도 아무 쓸모없이 스스로를 죽이고 배반했기 때문이야. 이거야말로 끔찍한 일 아닐까! 자기가 그토록 증오하는 진흙탕 속에 살면서 동시에(눈만 똑바로 뜬다면) 그래본들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고, 또 아무도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더 잘 아는 것이야 말로 끔찍한 일이 아니냔 말이야! 그리고 끝으로 말이야 .” 하고 그가 거의 미친 듯 흥분하여 말했다. 이 따위 치욕과 천함이 당신의 내부에서 어떻게 정반대되는 다른 성스러운 감정들과 공존 할 수 있는거지? 차라리 곧장 물속에 몸을 던져 단번에 끝장을 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것이 천 배는 더 정의롭고 더 이성적이지 않을까 말이야!” “그럼 저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소냐가 고통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힘없이 물었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제안에는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87

 

그녀는 더 이상은 읽지 않았고 읽을 수도 없었기에 책을 덮고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났다. “라자로의 부활은 이게 전부예요.” 그녀는 툭툭 끊기는 냉혹한 어조로 이렇게 속삭이더니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부끄러운지 차마 그를 쳐다보지는 못했다. 열병이 난 것 같은 전율도 계속되었다. 우그러진 촛대에 꼽힌 양초 토막은 이미 오래 전부터 꺼져 가면서 이 가난에 찌든 방에서 영원한 책을 읽으며 이상하게 가까워진 살인자와 매춘부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98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소냐가 중얼거렸다. “나중에 이해하게 될 거야. 결국 당신도 똑같은 짓을 한 셈이잖아? 당신도 역시 넘어섰으니까… 당신은 자살을 한 거나 다름없어, 삶을… 당신 자신의 삶을 파멸시켰으니까.(이거나 저거나 매한가지야!” 맑은 정신과 이성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으련만, 결국 센나야 광장에서 끝장을 보게 되겠지… 하지만 당신은 견딜 수 없을 테고, 혼자 남게 되면 나처럼 미쳐 버리고 말거야. 당신은 지금도 정신이 나간 여자 같아. 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가야 해. 같은 길을! 가자!” “대체 왜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소냐가 그의 말에 이상하고도 격렬하게 흥분하며 말했다. 99

 

“나는 그저 이를 죽였을 분이야, 소냐.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를.” “사람을 두고 이라니!” “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대답했다. “하긴 내 말은 거짓말이야. 소냐.” 그가 덧붙였다. “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실은 전혀 그게 아니야. 당신 말이 맞아. 여기에는 전혀, 전혀, 전혀 다른 원인이 있어…! 오랫동안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지 못했어, 소냐… 지금 머리가 너무 아프다.” 258

 

“나는 그때 깨달았어, 소냐.” 그가 황홀해하며 말을 이어 갔다. “권력이란 오직 감행하는 자, 즉 그것에 마음을 두고 쟁취하려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여기에는 하나, 오직 하나만 있으면 돼. 오직 감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때 내 평생 처음으로 한 가지 생각 이 떠올랐는데, 나 이전에는 아무도 결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지! 아무도! 갑자기 내 눈앞에 태양처럼 선명하게 떠오른 생각이란, 어떻게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이 모든 터무니없는 현상을 지나칠 때 그냥 그것의 꼬리라도 붙잡아 내동댕이치지 못했을까. 어떻게 지금도 그러지 못할까. 하는 거야! 나는…나는 감행하고 싶었고 그래서 죽였어…그저 감행하고 싶었을 따름이야. 소냐, 바로 이게 이유의 전부야!” 261

 

“아이들은 어디 있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애들을 데리고 왔니, 폴랴? 오, 멍청한 것들….! 뭣 때문에 도망을 쳤을까… 어휴!” 그녀의 바싹 마른 입술은 아직도 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눈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죽 살펴보았다. “이렇게 살고 있고나, 소냐! 한번도 네 방에 와 본적이 없었는데…이렇게 됐구나…”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며 소냐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네 피를 빨아먹었다, 소냐… 롤랴, 레냐, 콜랴, 이리로 와보렴… 자, 이제 다 모였구나. 소냐, 얘들을 맡아 주렴. 손에서 손으로…나는 이제 그만이다…! 무도회는 끝났어! 하…! 나를 그만 놓아줘요. 죽을 때만이라도 편히 죽게 해줘요…” 사람들이 그녀를 다시 베개 위에 눕혔다. 289

 

그녀는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지 어딘가 공포에 질린 눈초리로 모두를 둘러보다가 이내 소냐를 알아보았다. “소냐, 소냐!” 그녀는 이렇게 소냐가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이 놀랍다는 듯 온순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소냐, 애야. 너도 여기 있었니?” 사람들이 다시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만 됐어…! 갈 때가 됐다….! 잘 있거라. 이 박복한 것아…! 여윈 말을 죽도록 부려 먹었지…! 녹-초-가 다 됐다!” 그녀는 절망과 증 오에 차서 비명을 내지르더니 베개 위로 머리를 털썩 내려놓았다. 그녀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이 마지막 혼수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창백하면서도 누리끼리하고 바싹 여윈 얼굴은 뒤로 축 젖혀졌고, 입은 쩍 벌어졌으며 두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며 쭉 뻗었다. 그녀는 깊이, 아주 깊이 숨을 내쉬며 죽었다. 292

 

교외로 나가거나 큰길로 나가는 일도 더러 있었고 한 번은 무슨 숲으로 나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장소가 외지면 외질수록 누군가가 가까이 불안스레 함께 있는 것 같은, 무섭다기보다는 어쩐지 몹시 짜증스러운 의식이 더 강해졌으며, 그 때문에 어서 빨리 도시로 돌아와 사람들 틈에 섞이고 음식점이나 술집으로 들어가거나 톨쿠치 시장이나 센나야 광장으로 걸어가기도 했다. 그런 곳이 더 편하고 더 외진 것도 같았다. 어느 싸구려 음식점에서 저녁을 앞두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그 노래를 듣느라 꼬박 한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심지어 몹시 유쾌했던 것으로 기억됐다. 303

 

그는 거리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추고 지금 걷는 이 길이 어딘지, 자기가 어디로 들어섰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지나 온 센나야 관장에서 삼사십 걸음쯤 떨어진 **거리였다. 왼쪽 건물의 2층이 전부 음식점이었다.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 주변에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으로 봐서 음식점이 꽉 찬 것 같았다. 홀에서는 노랫소리가 넘쳐흐르고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이 울리고 터키 북이 둥둥거렸다. 여자들의 새된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자기가 대체 왜 **거리로 들어섰는지 의아해하며 막 돌아서려 다가, 갑자기 음식점의 맨 끝 쪽, 열려있는 창문너머로 창가 바로 옆의 탁자 앞에 파이프를 물고 앉아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발견했 다. 어찌나 무서웠는지, 그 충격은 공포에 가까웠다. 347

 

“로쟈, 요 귀여운 것, 내 첫아이야.”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지금 모습이 어렸을 때와 똑같구나. 지금처럼 이 엄마한테 와서 꼭 안고 입을 맞추었지. 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네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단다. 네 아버지를 묻었을 때는 지금처럼 우리 둘이 이렇게 부둥켜안고 네 아버지 무덤 앞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내가 오래 전부터 울고 있는 것도 이런 어미의 마음으로 재앙을 예감했기 때문이란다. 그날 저녁에 너를 처음 보자마자, 기억나니. 그때 여기 도착해 네 눈빛만을 보자 마자 금강 감이 오면서 그때 가슴이 철렁했는데, 오늘 문을 열어줄 때도 너를 보자마자, 아무래도 운명의 시간이 닥친 모양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로쟈, 로쟈. 설마 지금 떠나는 건 아니겠지?” 439

 

“고통받으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의 절반은 씻는 셈 아닐까?” 두냐는 이렇게 외치며 라스콜니코프를 꼭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죄라고? 무슨 죄?” 갑자기 그가 어떤 느닷없는 광분에 휩싸이며 소리쳤다. “저 추잡하고 해로운 이를, 가난한 자들의 피를 쪽쪽 빨아 먹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으니 마흔 가지 죄악은 용서받을 텐데, 그것이 죄라고?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그런데 왜 다들 사방에서 나에게 ‘죄야, 죄!’하며 손가락질을 하느냔 말이야. 다만, 내가 어처구니 없을 만큼 옹졸했다는 것쯤은 이제 톡톡히 알겠고, 그래서 이제 저 불필요한 수치를 감내하러 갈 결심을 한거야! 그저 나의 천함과 무능함 때문에 이런 결심을 한 것이지, 저어기… 저 포르피리가 제안한 것처럼 무슨 이익 때문은 아니야.” “오빠, 오빠,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어쨌거나 오빠는 남의 피를 흘렸잖아!” 두냐가 절망에 차서 소리쳤다. 443

 

마침내 (라스콜니코프 어머니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더러 있는가 하면 병이 나서 신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한날 아침에는 자기의 계산에 따르면 조만간 로쟈가 도착할 때가 됐다고, 작별인사를 나눌 때 정확히 구 개 월 후에는 자기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고, 똑똑히 기억한다고 대뜸 선언했다. 그러고는 집을 대대적으로 정돈하여 아들 맞을 준비를 하고 아들 방으로 점 찍어 둔 방(원래 그녀 자신의 방)을 손보고 가구를 닦고 물걸레질을 하고 커튼도 새로 달았다. 소냐는 애가 타도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빠를 맞이하여 방을 정돈하는 일을 도와 주기도 했다. 하루를 끊임없는 환상과 기쁜 몽상과 눈물로 가득 채우며 불안하게 보내고 밤이 되자 그녀는 앓기 시작했고 아침 녘에는 이미 신열에 들떠 헛소리를 해댔다. 열병이었다. 이주일 후 그녀는 죽었다. 480

 

그는 살짝, 얼른 그녀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들 둘 뿐이었고, 그들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송병은 그때 마침 몸을 돌린 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갑자기 뭔가가 그를 훌쩍 들어올려 그녀의 발 밑으로 내던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첫 순간, 그녀는 너무 경악한 나머지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질려 버렸다. 그녀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벌벌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무한한 행복으로 빛났다. 그녀가 깨달은 사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 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496

 

그녀도 그날 하루 종일 들떠 있었고 밤에는 심지어 병이 재발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행복하여 거의 자신의 행복에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 칠 년, 겨우 칠 년! 이 행복이 막 시작됐을 무렵, 어떤 순간에는 그들 둘 다 이 칠 년을 칠 일처럼 바라볼 준비가 돼 있었다. 심지어 그는 새로운 삶이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것을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치러야 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앞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이자 점차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점차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 여태껏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얘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지금 얘기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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