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같은 말을 되풀이해 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늪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또한 노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5
부자란 집이나 물건을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갖지 않고 마음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아 홀가분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 할 수 있다. 16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중요한 자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내려놓지 못할 때 마무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와 반복의 여지를 남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진정한 내려놓음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 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22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가, 나는 이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25
그런 생각이 남아 있는 한 겉으로는 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버린 것이 아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갈 때처럼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들 삶에서 때로는 지녔던 것을 내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움켜쥐었던 것을 놓아버리지 않고는 묵은 수렁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 33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 사물을 보는 눈도 때에 따라 바뀐다.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집착할 게 아무것도 없다. 삶은 유희와 같다. 56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 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 63
성 베네딕도는 뒷날 몬떼 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워 보다 나은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추려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으면 한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라.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 자신의 행동을 항상 살피라. 하느님이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어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공허한 말, 남을 웃기려는 말을 하지 말라. 다툼이 있었으면 해가 지기 전에 바로 화해하라. 78
“나는 서 있을 때는 서 있고, 걸을 때는 걷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고, 음식을 먹을 때는 그저 먹는답니다. “그건 우리도 하는데요.”라고, 질문자가 대꾸하자 수행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지요. 당신들은 앉아 있을 때는 벌써 서 있고, 서 있을 때는 벌써 걸어갑니다. 걸어갈 때는 이미 목적지에 가 있고요.” 86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만난 다음에는 사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만난 내 삶도 그만큼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87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 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88
도솔은 도솔천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知足天,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알고 살면 그 자리가 곧 최상의 안락한 세계라는 뜻이다. 온갖 얽힘에서 벗어나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훨훨 날 수 있다면 그곳이 곧 도솔암의 존재 의미일 것이다. 89
누구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그런 소원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가정적인 의무나 사회적인 역할을 할 만큼 했으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은 세월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인간사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홀로 남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듯이 언젠가는 혼자서 먼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엄연한 삶의 길이고 덧없는 인생사이다. 89
인생의 황혼기는 묵은 가지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몸은 조금씩 이지러져 가지만 마음은 샘물처럼 차오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결코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90
샘물과 달과 차가 어울린 가을밤 산중의 그윽한 풍류이다. 내가 이 옹달샘의 이름을 급월정(汲月井)이라고 한 것도 이런 정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귀틀집의 방 이 얼마나 크냐고 누가 묻기에 두 평짜리 단칸방이라고 했다. 그 방으로 드나드는 문지방에 폭 한 자 너비의 선반이 내가 서서 손을 뻗칠 수 있는 높이로 걸려 있다. 그 위에 몇 권의 책과 옷을 담은 광주리가 놓여 있다. 옛 그리스의 철인 디오게네스의 통에 견준다면 궁궐인 셈이다. 나는 이 새로운 거처에서 더욱 단순해지고, 더욱 진실해지고, 더욱 순수해지고, 더욱 온화해지고, 더욱 친절해지고, 더욱 인정이 깊어지고자 노력할 것이다. 94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차와 책과 음악이 떠올랐다. 마실 차가 잇고, 읽을 책이 있고, 듣고 즐기는 음악이 있음에 저절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오두막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구나 싶었다. 119
읽을 책도 많은데 시시한 책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기는 것은 인생의 낭비다. 사실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 120
책을 가까이 하면서도 그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일지라도 거기에 얽매이면 자신의 눈을 잃는다. 책을 많이 읽었으면서 콕 막힌 사람들이 더러 있다. 책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수 있을 때 열린 세상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책에 읽히지 않고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책에는 분명히 길이 있다. 120
차지하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할 때 우리는 가난해진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실제로 소유한 것이 적더라도 안으로 넉넉해질 수 있다. 우리가 적은 것을 바라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 123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이 있다. 자신의 그릇만큼 채운다. 그리고 그 그릇에 차면 넘친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 안에서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진정한 부자이다. 124
요즘 오후로는 대지팡이를 끌고 마른 숲길을 어슬렁거린다. 묵묵히 서 있는 겨울 나무들을 바라보고 더러는 거칠거칠한 줄기들을 쓰다듬으며 내 속에 고인 말들을 전한다. 겨울 나무들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134
소로우의 생활신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그대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그대 비로소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게 된다. 그대의 삶을 간소화 하고 간소화하라!” 141
나는 운문사에 들를 때마다 맨 먼저 비로전 부처님께 문안인사를 드린다. 일반 불상의 전형에서 벗어난 그 분만의 독특한 형상에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다. 얼굴 모습도 여느 불상과는 달리 시골의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표정이고, 오랫동안 가부좌로 앉아 계시니 다리가 저려 슬그머니 바른쪽 다리를 풀어 놓은 그 모습이 너무나 인간 적이다. 인자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이런 불상은 아무데서나 친견할 수 없다. 운문사의 은행나무와 반송과 비로전 부처님이 부르시기에 이따금 나는 그곳에 간다. 149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친구란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 그 밖에 또 무엇을 찾는 다면 그것은 헛된 욕심이고 부질없는 탐욕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176
습관적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 바닥에서 스치고 지나감이나 다를 바 없다. 좋은 만남에는 향기로운 여운이 감돌아야 한다. 그 향기로운 여운으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사람이 향기로운 여운을 지니려면 주어진 시간을 값없는 일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여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한다. 흙에 씨앗을 뿌려 채소를 가꾸듯 자신의 삶을 조심조심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만날 때마다 새로운 향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 180
세상살이란 서로가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게 마련인데 주고받음에 균형을 잃으면 조화로운 삶이 아니다. 주고받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말 한마디, 몸짓 한 번, 정다운 눈 길로도 주고받는다. 따뜻한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고 차디찬 마음이 차디차게 전달된다. 마지못해 주는 것은 나누는 일이 아니다. 마지못해 하는 그 마음이 맞은편에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215
예전에는 시인이란 직종이 따로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읊고 지었다. 제대로 된 선비라면 ‘시서화’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보편적인 교양이었다. 225
고려 말 백운 경한 스님은 이렇게 읊었다. 사람이 칠십을 사는 일/예로부터 드문 일인데 일흔일곱 해나 살다가/이제 떠난다. 내 갈 길 툭 트였거니/어딘들 고향 아니랴 무엇하러 상여를 만드는가/이대로 홀가분히 떠나는데 내 몸은 본래 없었고/마음 또한 머문 곳 없으니 태워서 흩어 버리고/시주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 235
일본 여류소설가 소노 아야코의 ‘계로록’.
1. 늘 인생의 결재를 해 둘 것
2. 푸념하지 말 것
3. 젊음을 시기하지 말고 진짜 삶을 누릴 것
4. 남이 주는 것, 해 주는 것에 대해 기대를 버릴 것
5.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 것
6. 지나간 이야기는 정도껏 할 것
7. 홀로 서고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기를 것
8. 몸이 힘들어지면 가족에 기대지 말고 직업적으로 도와줄 사람을 택할 것. 240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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