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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의 역사 / 김진호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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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부터 신자유주의까지

 

종교개혁의 배경 루터는 교황과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교회조직과 성사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물만 늘렸다고 생각했다. 신앙의 대체물의 존재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했다. 유일하게 참된 중보자는 그리스도와 성서뿐이었다. 10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영방군주들의 지지와 보호이다. 둘째, 인쇄술의 발달이다. 셋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와 이탈리아 지역 이권 투쟁 이후에는 투르크와의 전쟁 등으로 인해 제국내 종교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넷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공석이었던 1517년에서 1519년 사이 교황은 영방군주들에게 환심을 사려 했고 작센 선제후를 제국의 황제로 지지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는 루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보호했던 인물이었다. 다섯째, 영방군주들뿐 아니라 하급귀족 및 기사들도 루터를 옹호했다. 여섯째, 루터의 신학적 깊이 및 통찰력이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13

 

마르틴 루터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외침에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준엄한 재판장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은 구속의 사랑으로 만났으며 그리스도의 속죄와 은혜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15

 

1521년 5월 25일 루터는 보름스 칙령으로 파문을 당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독일 제후들을 억압하고 프랑스에 대항해 이탈리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친교황적 자세를 취했다. 반면 제후들은 정치적으로는 카를 5세의 중앙집권화에 항의했고 경제 적으로는 독일의 부가 로마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되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수 없다는 본인의 결심을 굳혔다. 루터는 만 인이 보는 앞에서,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이라고 외치며 종교개혁 사상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했다. 21

 

성서 번역은 성서의 보급뿐 아니라 표준 독일어를 확산시킴으로써 근대 독일어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루터역 성서는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독창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루터가 번역한 성서는 현재도 쓰이고 있으며 오역이 거의 없는 명역으로 알려져 있다. 26

 

슈말칼덴 동맹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루터를 따르는 여섯 명의 제후와 14개 자유도시 대표들은 항의문을 선언하고 본격적이 투쟁에 돌입했다. 그 후로 이들은 ‘항의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프로테스탄트’로 불렸다. 27

 

농노반란 루터는 현세는 죄악에 가득찬 인간의 본질에 의해 야기되었고 이러한 악을 통제하기 위해 세속권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루터는 복음이나 신앙에 대한 믿음이 세상의 세속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반대했다. 그는 신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반대했고 이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면 세속정부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세상이 근본적으로 무질서하고 세속정부가 평화를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29

 

칼뱅의 종교개혁 칼뱅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 가톨릭 신학을 배격한다. 인간이 자기의 공로를 내세워 하나님을 강요할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 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덕적인 삶이 자신이 선택을 받았다는 증표라고 보고 자신의 삶을 통해 구원받은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죄많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고 기독교인의 의무를 강조했다. 교회 목회제도 가운데 참된 것은 감독이 없는 장로제 목회제도라고 보았다. 자신의 삶, 즉 직업은 신이 주신 것이므로 신성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충실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근면, 검소, 절제라는 금욕적 윤리를 강조했다. 3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미국 장로교회 헌법에 영향을 주었고 한국 장로교회 역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조로 삼고 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으로 항상 순결하며 성경의 신성한 권위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것이다.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를 규정했다. 구원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균형있게 작용한다고 규정했다. 44

 

존 웨슬리 웨슬리는 성공회 내에 그대로 있기를 원했고 그의 사역 역시 성공회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1791년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도 들은 영국 성공회와 분리된 감리교를 조직했다. 감리교 신앙부흥운동의 결과는 영국 성공회의 복음주의 운동을 촉진시켰고 영국 상류 층을 변화시켰다. 웨슬리는 복음은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웨슬리의 사회참여 운동은 영국 전 사회의 각성을 가져왔다. 56

 

동부 런던에서 감리교 목사로 30년간 봉사했던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는 1878년 구세군을 창설하면서 빈민구호활동과 직업 교육센터 운영으로 복음주의 활동범위를 확대했다. 56

 

종교개혁의 성격 종교개혁의 가장 큰 파급효과는 교육에 있었다.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 교회가 그 동안 관장했던 교육을 세속정부가 맡아주기를 원했다. 루터는 통치자가 종교개혁 기간 동안 압수한 교회자산을 빈부 가릴 것 없이 모든 시민을 위한 공공학교를 건설하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9

 

종교개혁의 영향 *종교개혁에 의해 심화된 개인주의 →자유주의 발전에 일조 *종교개혁으로 인해 많은 학교의 설립 →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영향 *칼뱅의 예정설 → 소명의식과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 형성과 세속적 직업관 반영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받음 *정교분리 개념의 발전 →자유주의 61

 

절대주의와 중세 봉건주의 동양의 봉건제가 주종관계 및 종속관계인 것과 다르게 유럽의 봉건제는 철저한 계약관계로 동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형태였다. 계약관 계는 쌍무적인 것으로 어느 한쪽이 파기하면 효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64

 

중세말 이래 장원제가 와해되고 봉건제후 및 영주들이 몰락하면서 시민계급(부르주아)과 몰락한 봉건영주(귀족)들은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가 수립되었는데 이를 절대주의라고 한다. 절대주의는 봉건제와 달리 한 사람의 강력 한 군주가 봉건영주 및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는 체제를 의미한다. 즉 절대주의 군주는 불입권(봉건영주들의 독자적 지배권)을 무력화시키고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65

 

초기 중상주의 초기 중상주의가 무역 상업에 중점을 둔데 반해 후기에는 국내 공업보호 및 육성에 역점을 두었다. 가내공업 시스템이 육성되고 공업 원료의 수출이 제한되었다. 수입에 대해서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지방적인 독점의 형태였던 길드를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다. 74

 

시민계급 본래 부르주아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말로 중세 성곽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중세도시는 자유를 상징했고 장원제라는 중 세 예속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부르주아들은 정치적 권리는 없었으나 농노와 달리 자신들의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곽도시에서 영주 및 왕으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특권 및 자유를 누렸다. 75

 

고대의 자연법과 로마법 고대의 자연법 사상은 로마법에서 나타났다.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시민법은 근본적으로 로마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했다. 만민법은 로마 시민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로마제국 내 이민족들에게 적용되는 법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1세기도 되기 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의 1부인 법학강요에 따르면, “만민법은 전 인류 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이 만민법은 제 민족의 필요성과 유용성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그리하여 전쟁이 일어나고 포로와 노예가 발생했는데 이는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다. 자연법에 따르면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기 때문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86

 

근대의 자연법 존 로크는 홉스의 비관주의와 달리 자연상태를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이미 자연법을 준수하고 있는 사회상태로 묘사했다.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는 자연법이 사회보다 앞서며 국가의 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고 루소는 자기보존과 동정(타인을 해치는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는 태도)이라는 이성적인 두 가지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인을 가정했다. 92

 

홉스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선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르며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에 관심을 가지며 욕구를 선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이 자연법을 인식하는 이성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95

 

로크의 정치사상과 자연법 법률의 목적은 자유를 폐지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타인에 의한 구속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법률이 없는 곳에서는 이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산의 보존(생명, 자유, 사유재산) 이외의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즉 국민을 보호하는 일 이외에 권한을 남용하면 안 된다. 즉 로크는 정부 권력의 최소화를 주장했다. 절대군주를 거부했고 제한된 정부권력을 옹호했다. 정부의 임무는 자연법의 명령을 존중하고 인간의 자연권 특히 자연적인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103

 

루소의 사상 루소는 모든 사람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도덕 및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럴 경우 만장일치의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법은 일반의지를 대변하며 법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은 도덕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지 못한다. 만일 개인이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견해를 가진 다면 법에 표현된 일반의지를 공유할 것이다. 루소는 일반의지를 알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전체에 의해 일반의지에 복종하도록 강제되어야 했다. 여기에서 루소는 되도록 강제된다고 하는 유명한 자유의 역설을 선언하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아왔다. 111

 

민주주의는 일반의지를 위해 개인들이 양보할 때 가능한 것이고 이때에는 만장일치의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수의지를 가지고 이를 관철시키려 하면 그것은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니며 공동선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불평등과 부정의가 수반된다고 보았다. 즉 루소는 공동선을 판단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능력과 이러한 사회구성원들의 양보가 전제되지 않고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115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 1.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는 있을 수 없다. 2. 법에 의하지 않은 체포 구금은 있을 수 없다 3.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군대의 민간 숙박은 있을 수 없다. 4. 군법에 의한 일반인 재판은 있을 수 없다. 124

 

미국 독립선언 청교도들은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교육열이 높았다. 지도자 대부분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이었다. 1637년 총회는 존 하버드 목사를 중심으로 사회지도자인 목사와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하버드대학교를 설립했다. 로저 윌리암스 목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으로 정치와 종교의 완전 분리와 모든 교파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주장했다. 그리고 백인들이 인디언의 토지를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총회는 윌리암스의 추방을 결의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로드 아일랜드를 세우고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132

 

프랑스혁명 1789년 7월 14일 국민의회를 지지하는 과격한 파리 시민들이 절대주의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혁명이 시작되었다. 파리에 이어 각 도시에서 도시자치체를 결성하여 부르주아가 시정을 장악했다. 이렇게 사태가 확대되자 루이 16세는 베르사이유에서 파리로 복귀하고 새로 결성된 코뮌과 국민의회를 인정했다. 루이 16세는 국왕을 상징하는 흰색과 파리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청색으로 된 삼색의 휘장을 인정했고 이는 혁명을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의 기원이 되었다. 149

 

루이 16세와 왕비의 국외 탈출기도는 시민과 의회를 격분시켜 1791년 10월 새 헌법에 의해 입법의회가 소집되었다. 의장석을 중심으로 페이앙파가 오른쪽, 급진적 공화파가 왼쪽에 앉게 되었으며 이러한 좌석배치는 좌파와 우파의 기원이 되었다. 입법의회 초기에 는 페이앙파가 주도권을 잡았으나 후에 과격한 자코뱅이 주도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혁명사상 전파가 두려워 프랑스에 대한 군사개입을 감행했다. 150

 

전쟁상황이 안 좋아지고 혁명이 과격해지면서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소집되자마자 왕권을 폐지하고 1792년 9월 22일 프랑스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프랑스 제1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압제자에게 동정은 필요없다면서 루이 16세의 처형을 찬성했으며 근소한 투표 차이로 국왕의 기요틴행이 결정되었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에 처형되었다. 151

 

상대방에 대한 비판은 잘 해도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세력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다 보면 사실과 진리를 바라보는 눈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수구화 되었다는 증거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새롭게 수구화된 세력들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혁명으로 이득을 본 부르주아들은 원했던 개혁이 완수되자 개혁의지를 상실하고 수구화 되었다. 156

 

나폴레옹 법전은 민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형법, 상법의 5대 법전으로 되어 있다. 특히 민법은 개인의 사유재산권, 계약의 자유, 개인의 책임, 신앙과 노동의 자유, 만인의 법에 대한 평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나폴레옹 법전은 사유재산, 계약자유, 법앞의 평등을 법적으로 명시하고 나폴레옹 정부는 이를 반강제적으로 시행했다. 인접국가는 왕들의 자의적 지배가 우세했기 때문에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158

 

민족주의는 인간의 자의적 지배에 의한 폭력과 종속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써 자주권을 회복하고 이를 보장해주는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일체감을 의미한다. 자유주의는 신분제라는 구질서에 저항하여 개인이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민족주의 역시 자유주의적 정신과 민족구성원들의 평등 아래 평등을 보장해주는 민족 및 국가에 대한 일체감과 애국심을 의미한다. 166

 

나폴레옹의 몰락 후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고 싶었던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왕조 세력들은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 에서 회의를 열었다. 빈회의는 메테르니히가 주도했다. 주요 원칙은 정통주의와 복고주의였다. 168

빈체제는 그리스 독립전쟁을 통해 와해되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왕조들은 국경선을 변경하려 터키를 압박했고 프로이센 과 오스트리아는 현상 유지를 위해 터키에 대한 압박을 반대했다. 빈체제는 자유주의에 역행한 시기였음에도 결과적으로 유럽의 자유주의를 자극했다. 170

 

나폴레옹 폐위 직후인 1814년 6월 제정된 헌법은 절대주의와 시민적 정치의 원리가 모두 포함되었다. 왕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입헌 내각의 행정권을 인정했지만 선거권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총인구 3천만 명 중 선거권을 가진 시민은 상층 부르주아 9만명에 불과했고 피선거권자는 1만6천명에 불과했다. 루이 18세는 타협정치를 했으나 루이 18세 이후 샤를 10세는 노골적 반동정치를 실시했다. 의회를 탄압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압하고 강화된 절대군주로의 복귀를 추진하여 시민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171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는 단절되었고 입헌왕정파에 입박한 부르주아 세력이 루이 필립을 왕으로 추대했다. 7월 혁명을 통해 프랑 스는 전제적 입헌군주정에서 자유주의적 입헌군주정이 되었다. 173

 

7월왕정은 입헌군주제였으나 선거권은 매우 제한되었는데, 1931년 개정된 선거법은 25세 이상 2백 프랑 이상 국세를 납입한 남성 에 한정해 선거권을 부여했다. 유권자는 전체 인구 3천만 명 중 20만 명으로 전 인구의 0.7%에 불과했다. 당시 총리 프랑소와 기조는 선거권을 가지고 싶으면 부자가 되라고 말할 정도로 평등하지 못한 사회였으며 역사가 토크빌은 7월 왕정을 소수의 주주에 의해 운영 되는 주식회사라고 혹평했다. 175

 

1848년 12월 27일 독일국민의회는 독일 제국헌법을 제정 공포했다. 자연법 이론과 계몽주의에 근거한 천부인권설, 국가권력으로부터 침해 받을 수 없는 기본권 및 자유 등이 명문화되었다. 귀족의 폐지, 시민의 권리, 법 앞에 평등, 평등선거, 사형제도 폐지, 주거불침 입, 우편의 비밀 보장, 언론 신앙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이 규정되었다. 182

 

자유주의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는 신 앞에서의 평등과 법 앞에서의 평등을 강조한 정치적 자유주의에 기인한다. 또한 자유주의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사상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에 성공한 부르주아들은 자유방임에 입각한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세웠는데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반영이었다. 188

 

*자유주의의 핵심적 가치 개인주의+법치주의 *자유주의의 전개 정치적 자유주의 → 고전적 자유주의 → 사회적 자유주의(첫 번째 신자유주의) →질서자유주의(두 번째 자유주의) → 신자유주의 191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 애덤 스미스는 자애심(self love)과 이기심(selfish)를 구별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애심이야 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개인의 자애심은 사익으로 발전하나 이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194

 

애덤 스미스는 범죄가 생기는 것은 빈곤 때문이라고 여겼다. 또한 인간에게 빈곤은 폭력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빈곤을 퇴치하고 경제 성장을 통해 범죄를 줄이고 정치발전을 도모하며 더 풍부한 자유를 통해 사유재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애덤 스미스에게 빵 없이 정치적 발전과 민주주의 역시 불가능했다. 스미스 역시 마르크스와 같이 유물론적 사관을 가졌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로 인해 사회계급이 분화하며 부자들이 빈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와 법을 제정했다고 인식했다. 마르크스와 동일하게 애덤 스미스는 법 과 정부는 부자들이 빈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자유주의 입장에서 한 발 나아가 법과 정부가 경 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하다고 보아 마르크스와 달리 법과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196

 

애덤 스미스는 법학강의록에서 자연법은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부합하는 법, 곧 신이 만든 것이며 자연법의 실현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최소한의 정의는 인간의 실정법이며 법을 집행하는 것이 공권력이다. 법과 공권력만으로는 사회정의가 불 충분하고 생계문제 해결이 사회정의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자유롭고 공정하며 경쟁적인 시장경제 확립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중상주의적 규제를 철폐해 경제적 자유주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8

 

산업혁명과 생산양식의 변화 생산양식은 네 가지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가내수공업, 가내공업,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기계제 대공업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매뉴팩처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 진행되는 단계에서 화석연료를 통한 동력원이 기반된 산업화가 수반되었다. 중세 장원제가 와해되고 자본을 기반으로 임금노동자를 고용한 매뉴팩처가 등장함으로써 부르주아가 출현했다. 210

 

자본주의란 용어는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이 발전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였던 리카도는 자본주의를 언급했으며 1848년 2월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했던 루이 블랑 역시 자본주의를 언급했다.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부터이다. 215

 

프롤레타리아 고대 라틴어로 프롤레스(proles)는 자식을 의미한다. 자식을 낳아 후손을 보장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사회적 의무에 속한다. 자식을 낳는 것 이외에 사회에 기여한 것이 없는 자들 죽 무산자들을 프롤레타이루스proletarius로 불렀고 이는 로마시대 최하층 시민을 의미했다. 이들은 무산자라서 세금도 내지 못할 만큼 궁핍했다. 프롤레타리아란 용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마르크스는 로마시대 프롤렌타리우스 계급을 주목하면서 사회경제학적 용어로 사용해 이를 대중화시켰다. 221

 

헤겔은 소외개념을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사용한 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소외 개념을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산물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 인격적 객체인 인간을 단순한 노동상품으로 취급하는 비인간적 현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 화 현상 등을 모두 소외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은 노동인데, 잉여가치가 그것을 생산한 이에게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 즉 착취가 이루어질 때 소외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221

 

헤겔은 소외개념을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사용한 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소외 개념을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산물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 인격적 객체인 인간을 단순한 노동상품으로 취급하는 비인간적 현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 화 현상 등을 모두 소외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은 노동인데, 잉여가치가 그것을 생산한 이에게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 즉 착취가 이루어질 때 소외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221

 

괴테의 파우스트는 물질적 소유, 권력, 감각적 만족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인간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인간의 능동적 활동뿐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은 오직 생산적 활동을 할 때 삶의 의미를 회복하며 탐욕스럽게 삶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탐욕을 포기할 때 존재로서 충만하게 되며 공허할 때 오히려 풍성하며 무소유일 때 오히려 부자로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스피노자, 헤겔, 괴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삶을 즐기는 생산적 활동을 할 때 비로소 생동적이고 자기의 고유 능력을 표현할 수 있다고 판단 했다. 225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가 인간 소외의 해방 및 인간의 자기실현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의 산물을 생산자가 누리지 못하고 생산자로부터 독립되어 생산자에 대입되는 권력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노동의 소외였다. 이렇게 되면 노동은 이미 인간 본성의 일부가 아니며 이간은 스스로를 부정당하고 불행하게 느끼게 된다. 결국 노동자는 휴식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을 불편하다고 느낀다. 227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인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 구현은 폭력이 아닌 합법적 수단으로 쟁취해야 하며 제도권 안에서 개혁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러한 수정주의는 사회민주주의로 나타났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는 반드시 붕괴하며 사회주의는 계급투쟁,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로 가능하다는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결코 취약하지 않으며 실업, 과잉생산, 불평등한 부의 분배 등의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235

 

 

제2인터내셔날

제2인터내셔날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14일 파리에서 결성되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결성되자마자 5월 1 일을 노동절로 선포했다. 마르크스는 사망했고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238 1905년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912년 제2인터내셔널은 900만에 달하는 유권자가 지지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실질적 권한은 없었으나 사회주의 및 노동자 계열 정당의 최고권위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발발하고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자국 정부의 전쟁정책을 지지하자 조직은 와해되었다. 238

 

1차 대전 후 제2인터내셔널은 셋으로 나뉘어 다시 출현했는데 우파는 자국의 전쟁정책을 지지했고, 중도파는 우파의 전쟁지지를 비판 하면서 세계평화노선을 표방했다. 레닌은 국가주의와 평화노선을 모두 배격하면서 이를 초국가적 계급투쟁 노선으로 전환시켜야 한 다고 주장했다. 1919년 레닌은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결성했다. 239

 

 

칼 포퍼의 공산주의 비판

칼 포퍼는 추상적 선을 실현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수단을 이용해 추상적 행복을 실현하는 것보다 당면한 어려움과 비참함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50

 

베르사이유 질서 베르사이유 질서로 인한 최대 피해국은 독일이었다. 1988년에야 만기가 되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은 독일을 경제적 궁지로 몰아넣었다. 히틀러는 배상금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여 큰 환영을 받았다. 1929년 발생한 경제공황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엄청난 인플레를 야기했다. 독일 국부의 38%를 소유했던 유대인 자본가들은 주로 고리대금업 및 금융업을 통해 재산을 증식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배경으로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이 급성장했다. 282

 

1919년 9월 국가사회주의(나치)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한 히틀러는 1921년 나치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부터 나치당을 보호하려는 돌격대(SS)를 조직했다. 1923년 프랑스는 독일이 배상금을 미지급하자 루르를 점령했다. 독일에서 혼란이 일어나자 히틀러는 이를 틈타 쿠데타를 감행했지만 이로 인해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나의 투쟁’을 저술하고 출옥 후 친위대를 다시 조직했다. 286

 

1882년 러시아에서는 반유대주의 폭동으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거주구역으로 거주를 제한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로 인해 상당수 유대인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했지만 역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는 모두 유대인이었다. 289

 

질서자유주의 질서자유주의에서는 책임이 따르는 자유를 강조한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작동하여 통제되지 못한다. 이를 건전한 시장과 사회적 정의를 바탕으로 거대 자본 및 이익집단의 횡포에 의해 굴절된 시장질서를 바로 잡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양심이 있으나 양심보다 사익추구가 우선시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익추구로 인해 불공정행위를 양산할 수 있으며 법적 제도적 장치 없이 공정한 시장을 구현하는 것 은 어려운 일이다. 328

 

뢰프케가 보기에 케인즈주의는 집단주의적 혼합경제를 유발했다. 완전고용 정책은 불황과 실업을 해결하지 못하고 만성적 인플레와 경기침체를 유발했다. 또한 타인의 희생 위에 사익을 도모하려는 집단이기주의를 뢰프케는 경계했다. 천박하고 비과학적인 대중이 여론과 결합해 등장한 복지국가는 집단이기주의의 전형이라고 보았다. 복지국가의 과다한 복지는 개인의 책임감과 가족제도를 약화시키며 정부개입을 증대시킨다. 복지국가의 연성정책은 당장은 비용이 적고 편리한 것으로 보이나 장기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악화시키는 정책이었다. 복지국가는 개인의 생활보장을 국가가 책임져 개인의 자발적 저축유인을 소멸시킨다고 보았다. 330

 

질서자유주의는 2차대전 중 독일 프라이부르크 학파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상된 경제사상이다. 질서자유주의를 구상한 경제학자 들은 국가사회주의 통제경제가 경제를 왜곡하고 전체주의를 야기했다는 문제점을 인식했고, 전후 독일 경제방향을 구상했다. Alfred Muller-Armack, Walter Euken, Wilhelm Ropke등에 의해 철학적 기초가 마련되고 전후 기독교민주당에 의해 강력히 추진 되어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331

 

질서자유주의는 자본에 의해 인간이 종속되거나 소외될 수 있는 자본주의와 개인의 창의성을 무시하고 시장의 역동성을 간과한 사회주의 양자를 모두 비판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되 이성을 과신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고 비판적으로 이성을 사용하여 사회발전에 있어서 바람직한 질서를 찾는다는 기본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질서자유주의는 인간관에 있어서 인간이 역사의 수레에 무력한 노예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영웅도 아니며 현실적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닌 존재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질서자유주의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자에게 지원해야 한다는 보충의 원칙, 자립할 수 없는 자를 사회가 도와야 한다는 연대의 원칙, 그리고 개인은 사회의 주체이며 집단을 위해 개인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존재이유가 개인이라는 개인의 원칙이라는 3대 원칙을 가지고 있다. 333

 

경제질서가 왜곡되면 정치적 자유도 역시 위태롭게 된다. 왜냐하면 정치와 경제 양자는 기본적으로 상호의존적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질서자유주의가 태동하게 된 원인이며 문제제기였다. 건전한 시장경제는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다. 불법적인 검은 시장이나 부패한 경제구조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은 사회의 약자층과 빈곤층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중앙집중화된 경제와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종속과 의존을 막는다고 보았다. 335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에서 직장은 단순히 상업적 혹은 자본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인적공동체라는 인식이 강하다. 즉 모든 경제활동의 주체가 개인이고 인간이 절대적 목적 가치이기 때문에 어떠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절대적 목적가치인 인간은 어떤 것에 예속되어서도 안되며 수탈의 대상도 아니고 수동적 소비자도 아니며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계급해방의 대상도 아니다. 338

 

신자유주의 밀톤 프리드먼은 의무적 국민연금을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고 연금시장에 경쟁질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민연금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부유한 사람으로 소득을 이전시킨다고 판단했다. 또한 고용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최저임금 제를 비판했다. 따라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빈곤을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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