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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위한 지식 / 허진모

by mubnoos 2021. 1. 27.

2004 8월 노르웨이 오슬로의 뭉크박물관에서 두 점의 작품이 도난당했다. 이 사건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지능적인 절도가 아니라 대낮에, 그것도 미술관에 관람객이 가득한 가운데서 일어났다. 총기로 무장한 2인조 강도들은 경비원과 관람객 수십 명을 위협하며 전시되어 있던 그림을 떼내어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싣고 도주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너무도 단순한 방법으로 저질러진 강도사건이었다. 이때 도난 당한 작품은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와 마돈나였다. 당시 알려진 두 작품의 가격은 230억원에 달했다. 14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란 한쪽 다리에 무게를 주고 나머지 다리는 편안하게 뻗는, 그래서 몸이 살짝 뒤틀려서 구부러지는 포즈를 말한다. 좌우가 대칭이 아니고 불균형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룬 모양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 다비드가 서있는 자세를 콘트라포스토라고 보면 된다. 69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3대 천재라고 불리는 화가이자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31, 미켈란젤로보다 8년 뒤에 태어났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보다 1년 늦게 죽었고 미켈란젤로보다 44년 먼저 죽었다. 70

 

루벤스는 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멀티태스커였다 서너 가지의 복잡한 일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6개국어를 구사했고 학식과 교양이 높아 금세 상류층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덕분에 그의 부업은 외교관이었는데 무늬만 외교관이 아닌 역사적인 조약에도 기여한 바 있는 능력 있는 외교관이었다. 75

 

 

1746년 태어난 프란시스코 고야는 벨라스케즈, 엘 그레코와 함께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고야가 태어나고 활동한 시기는 신 고전주의 대표화가 다비드와 같다. 87

 

이름이 비슷한 마네(1832-1883)와 모네(1840-1926)는 모두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둘은 각각의 특색을 갖고 있지만 일부 작품은 화풍이 비슷하기도 하다. 서로 사이도 좋아서 서로를 그려주기도 했다. 98

 

마네의풀밭 위의 점심식사보다 더 유명해진 작품이 2년 후 살롱전에 출품된다. 바로올랭피아라는 작품이다. 100

 

마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름도 비슷한 모네는 인상주의, 인상파라는 그인상이라는 명칭을 만들어낸다. 물론 만들려고 만든 게 아니고 그의 작품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상주의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조롱에서 시작되었다. 101

 

마네는 법관 아버지를 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모네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네는 법관이 되기를 원했던 부모의 뜻을 따르지 못했고, 여러 진로에서 방황하다 18세에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모네는 삼촌의 사업을 돕다 20세에 군대에 잠시 몸담았다가 21세에 미술을 시작한다. 마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던 모네는 어느 순간 마네를 능가하게 된다. 모네는 인상주의 실질적인 창시자가 된 것이다. 101

 

 

드가는 크게는 인상주의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품은 여느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모네는 형태 자체가 번지는 경우가 많고 세잔은 대상을 단순화한 경우가 많으나 드가는 일단 피사체를 명확히 그렸다. 사실주의와 고전주의의 특징을 품고 있다. 그런 가운데 주변이나 전체적인 빛이 묘한 분위기를 내는 경우가 많다. 즉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실주의, 일본회화 등의 영향을 골고루 받은 것이다. 106

 

세잔은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같은 풍경, 같은 사람, 같은 물체, 그런 작업에서 그는 대상을 단순화하게 된다. 모든 것은 기하학적으로 몇 개의 모양으로 분류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구와 원기둥, 원뿔이었다. 게다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 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원근법과 같은 전통적인 표현방식과 배치된다. 세잔은 전통적 방식의 소묘로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결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111

 

첫 번째 인상파전에 참여했던 화가들은 르누아르를 비롯해 모네, 세잔, 드가, 피가로, 시슬레, 기요맹 등이었다. 요즘의 관점으로 보면 실로 대단한 인물들의 전시회이다. 인상파라는 명칭도 이 전시회에서 모네의 작품, ‘인상:해돋이에서 붙여진 것이다. 119

 

 

고갱은 한 살부터 여섯 살까지 페루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페루로 가는 배편에서 죽는 바람에 어머니와만 살게 된다. 인생의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파리로 돌아와서도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릴 정도로 어려웠다. 십대는 선원으로 세상을 떠돌았고, 20 대는 주식중개인이 된다. 그리고 10년 후 화가가 된다. 주식중개인으로 산 10년이 그에게 있어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122

 

가족의 연이은 죽음 이후 3년을 방황으로 보내고 난 뒤에 클림트는 최초의 걸작이라고 평가 받는 작품사랑을 탄생시킨다. 금을 다루는 것이 직업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보이는황금화풍 1901년 발표한유디트라는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황금화풍은 클림크를 만든 정체성이 되었다. 130

 

 

뭉크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죽고, 얼마 후 누나가 죽고,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으며 여동생은 정신병을 얻었고 남동생이 죽었다. 20대 중반에 사랑을 바쳤던 여인으로부터는 의식과 질투로 고통을 받았다. 뭉크가 평생 불안에 떨며 정신병에 시달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133

 

표현주의는 사실주의와 연관된 사조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구를 강렬한 색으로 표출하는 사조인데,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간단하게 말해 음산한 공기에 해골과 좀비들이 나오면 뭉크이고 표현주의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134

 

칸딘스키는 프란츠 마르크, 가브리엘 뮌터 등과 함께 청기사파The blue rider라는 이름의 화파를 만든다. 그의 작품에 나오도 등장하는청기사는 칸딘스키의 대표작이면서 그가 펴낸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푸른 색과 기사는 한동안 칸딘스키의 상징이 되었다. 139

 

마티스는 포비즘Fauvisme, 즉 야수파로 유명하다. 간혹 야수파를 괴기스럽고 진짜 야수, 맹수 같은 그림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야수파 화풍이란 강력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필치로 명료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아카데미 즘에 반발한 인상파의 화풍에서 좀 더 자유롭게 변형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14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9년 남프랑스 니스에서 요양중이던 마티스는 자신을 간호하던 한 수녀의 부탁을 받고 방스 성당Chap elle Du Rossaire Vence의 건축과 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자신의 마지막 예술혼을 쏟아붓고 니스에서 생을 마감한다(1869-195 4). 147

 

입체주의란 야수파의 대가 마티스가 피카소의 절친이었던 조르주 브라크의 작품을 심사하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이후 피카소의 화풍 은 피카소의 정체성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입체주의를 나타내게 된다. 152

 

 

1920년 차가운 겨울 어느 날 모딜리아니는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모딜리아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잔 에뷔테른은 그 다음날 자살로 사랑하는 연인의 뒤를 따른다. 둘은 3년 후 같은 곳에 묻히게 된다(1884-1920). 159

 

샤갈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를 이끈 화가로서 그 영향력은 피카소에 못지않았다. 또 샤갈은 천재이면서 98살까지 장수했다. 1887 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161

 

샤갈은 입체주의에 머물지 않고 곧장 독창적인 특징을 만들어내는데 오르피즘 Orphism이라는 생소한 사조에 더 가깝다고 보는 시각 도 있다. 오르피즘이란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사조로서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그러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성격도 가미된 것을 말한다. 샤갈의 화풍 변화를 보면 입체주의적인 공간 나누기가 들어간 추상화와 수채화적인 색감을 보여주는 시기를 거쳐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그는 화려한 색채로 환상적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메시지의 호소력을 더했다. 그 결과 그에게는 현대 추상화의 선구자라는 칭호가 붙었다(1887-1985). 165

 

얀 반 에이크는 생전에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화가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보티첼리가 태어나기 4년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가 태어나기 1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화가였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분명 그에게 큰 빛을 지고 있다. 반 에이크 최고의 걸작은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The Arnolfini Portrait’이다. 172

 

티치아노의 초상화는 자신 이전의 초상화와는 다른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우선 그의 초상화의 특징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생동감, 둘째는 자연스러움이다. 티치아노 이후의 초상화 인물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편안하다. 178

 

 

티치아노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캔버스를 처음 사용한 화가였다. 캔버스 이전에는 주로 목판에 그림을 그렸다. 179

 

카라바조의 극단적인 빛과 어둠의 대조를 이용해 극적인 효과를 내는 표현방법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한다. 미술사가들은 이런 테네브리즘을 카라바조의 성격과 대비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르네상스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사조는 매너리즘과 바로크이다. 카라바조는 두 사조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바로크 미술의 시조로 간주된다. 바로크의 뜻이뒤틀린 진주라는 뜻이라고 하니 어쩐 지 카라바조의 어린 시절과 묘하게 겹친다. 182

 

키아로스쿠로chiaroscureo, 밝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chiaro와 어둡다는 뜻의 oscuro의 합성어로 사실적인 빛과 그림자를 묘사하는 명암 처리법이다. 테네브리즘tenebrism,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이용한 극단적인 명암처리법으로 키아로스쿠로보다 강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184

 

베르메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대체로 그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그는 트로니라고 불리는 작은 크기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느린 작업속도가 다시 한번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같은 플랑드르 화가로서 베르메르가 8살 때 세상을 떠난 루벤스는 다작이었다. 베 르메르는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1632년 태어났고 15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1675년 죽었다. 195

 

트로니, Tronie는 특징적인 의상이나 분장을 한 인물을 묘사한 초상화. 초상화와 가장 큰 차이는 트로니는 인물 자체의 특징과 더불어 그 인물이 속한 문화적 특성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국적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 195

 

시인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를진정한 종교화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화가라고 했고, 후기인상주의 화가 고흐는예수의 얼굴을 그릴 자격이 있는 두 명 중의 하나라고 했다. 외젠 들라크루아 그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이다. 212

 

1912년은 몬드리안이 만 40살 되던 해였다. 검은색 선을 바탕으로 한 기하학적 격자 구성은 피카소의 입체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한 해 전에 있었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암스테르담 입체파 전시회를 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몬드리안은 가로 세로로만 그어진 선과 그 격자에 채워진 간단한 색의 구성을 신조형주의Neo Platicism라고 불렀다. 가로선은 평온을, 세로선은 역동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세 번째 시기는 그가 미국으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부터이다. 격자의 기둥이 되던 검은 색이 사라진 구성을 선보였다. 빨강과 파랑, 노랑의 격자가 보이고 회색의 기둥에 교차점을 포인트로 넣은 생동감 있는 구성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네온사인과 고층빌딩이 가득한 도 시를 시원한 도로가 가로지르는 신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259

 

음악을 회화에 녹인 대표적 작가였던 몬드리안은 재즈를 그림에 녹여냈다. 신조형주의를 만들어낸 현대 추상회화의 개척자로 불리는 몬드리안은 1872년 태어나 72년을 살다 1944년에 죽었다. 260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일반명사로 쓰이게 한 사람은 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와 스위스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Jacob Bruckhardt이다. 전자가 처음 말했고 후자가 못을 박았다. 270

 

그리스 미술은 아르카익기Archaic Art, 고전기, 헬레니즘기로 구분한다.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건축양식은 아르카익기에 속하고 코린토식이 고전기에 해당한다. 272

 

중세 미술사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신전미술에서 교회미술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중세미술은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작품 자체가 갖는 가치보다 작품이 전달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관심사였다. 277

 

다빈치보다 100년이나 먼저 태어났지만 공간감이나 입체감과 같은 과학적 요소를 회화에 적용한 지오토, 원근법의 시초로 여겨지는 브루넬레스키, 유화를 발명한 반 에이크가 있다. 284

 

절대적 정치권력이 없던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됐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도시국가들이나 길드처럼 다 양한 공동체들은 각각의 생존과 이권을 위해 인적인 이동을 막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미술작품은 지역적인 특색을 띠게 되었다. 모두가 똑같았던국제적 유사성에서 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流와 派가 된 것이다. 284

 

미술사에서는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점을 감안해 15세기를 콰트로첸트Quattrocento라고 부른다. 원래 밀레 콰트로첸토 라고 불러야 하나 4백이란 뜻의 콰트로첸토만으로 1400년대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14세기는 트리첸토Trecento, 16세기는 친퀘첸토Cinquecento라고 한다. 286

 

미술사에 있어서 르네상스 시대가 만들어낸 기술적인 업적은 원근법과 유화, 캔버스의 발견이다. 시지적으로는 원근법, 유화, 캔버스 순으로 등장했다. 원근법을 처음 발명했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피렌체의 두오모로 유명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1377), 유화의 얀 반 에이크는 1395년생, 캔버스 천을 그림에 처음 이용한 베네치아파의 티치아노는 1488년생이다. 295

 

대기원근법을 회화에 적용하면 거리에 따라서 선명도를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먼 거리의 물체를 흐릿하게, 또 색과 색 사이의 경계도 흐릿하게 그려야 하는데 이것을 스푸마토Spumato기법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색과 색의 경계를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표현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모나리자이다. 298

 

미술사에서 매너리즘이란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수법manner을 따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312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절제된 우아함에 비해 바로크는 과장되고 강렬했다. 또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과 대비된 변칙성도 바로크의 특징이다. 바로크가 묘한 것은 기술적인 시도는 다양해졌음에도 정신적으로는 인간성의 미술에서 종교 중심의 미술로 반 걸음 이동했다는 것이다. 318

 

미술사에서 주의-ism가 아닌 양식style이란 말이 붙는 것은 바로크와 로코코밖에 없다. 이것은 르네상스와 사조라 불리는 수많은 주 의들 사이에서 깊은 성찰 없이 생겨난 과도기적 기술의 단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318

 

완벽한 조화 잘 지켜지는 규범과 같은 안정성, 뚜렷한 목적성을 추구한 고전주의에 비해 낭만주의는 개인의 상상과 주관적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탈이성, 쉽게 표현하면 신고전주의는 피사체의 겉모습을, 낭만주의는 피사체의 내면을 보여준다. 329

 

사실주의Realism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해에 시작한다. 사실주의는 주류미술의 상징살롱전에 입성하지 못한 쿠르베가 1855년 개인전시회를 열면서 사용한 말이다. 이 시점부터 모더니즘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실주의는 민중성의 특징을 가짐으로써 공산주의 미술이라는 이념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332

 

다다이즘은세상 별거 없다’ ‘아이고 의미없다라는 일종의 허무주의 예술사조이다. 다다Dada라는 이름 자체는흔들목마라는 뜻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허무하게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보인다. 347

 

초현실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가 불가능한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고, 추상주의는 현실의 모습이나 상상의 세계를 내면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산을 표현하는데 정삼각형의 반복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표현이 되고 산이 젤리처럼 흘러서 사람의 혓바닥에라도 들러붙어 있다면 초현실주의가 되는 것이다. 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