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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정원 / 랄프 스키

by mubnoos 202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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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정원을 소유한 적이 없으니, ‘빈센트의 정원이라는 제목은 모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빈센트는 땅 한 평 소유한 적 없어도 정원을 주제로 한 드로잉과 채색화를 많이 그렸다. 잘 가꾼 예쁜 정원이 있는 집에서 자랐고, 고향인 북부 브라반트의 자연과 시골의 아름다움을 처음 접한 곳도 바로 정원이었다. 사실 빈센트는 청년시절 영국에 살 때 런던과 외각지역 아일워스에서 정원 조경일을 도왔다. 8

 

빈센트의 화가 이력. 네덜란드의 초기 발전 시기(1881-1885) 파리의 대도시 생활 속에서 몰입하던 시기(1886-1888) 프로방스의 전원을 탐구하던 시기(1888-1890) 북부 프랑스로 돌아가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보낸 생의 마지막 두 달(1890) 11

 

빈센트는 1853년 네덜란드 북부 브라반트의 그로트 준데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벨기에 국경 근처로 히스가 만발한 곳이었다. 아버지 테오두르스 반 고흐(1822-1885)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그로닝겐 지부 목사였다. 빈센트와 다섯 명의 동생이 자란 목사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15

 

1880 8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빈센트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이미 호상, 교사, 목회자, 책판매원 등의 직업을 경험했다. 1877년경 신학 공부를 결심했지만 암스테르담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으려면 먼저 주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시험과목은 수학, 라틴어, 그리스어 등 다양했다. 이 자격시험에 통과하려면 가정교사들의 지도하에 2년제 프로그램을 마쳐야 했다. 1878 7월 그는 이 준비과정을 포기하고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가졌다. 빈센트는 브뤼셀에 있는 학교에서 3개월 간의 선교사 과정을 이수했지만 불운하게도 정식 자격을 얻는데 실패했다. 결국 몽스 마을 근처에 있는 벨기에 남부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 지방에서 임시 직업 전도사로 일하기로 했다. 재능 있는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진심 어린 보살핌과 연민을 베푸는 그에게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지나친 열정 때문에 음식과 옷 등 소지품을 몽땅 내주었고 건강을 해쳤다. 1879 7월 선교사 계약이 끝났고 그의 기행에 아버지는 아들의 정신상태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고통 받는 아들을 입원시켜야 할지 고민할 정도였다. 일년 후 심각한 정신이상에 시달리고 몹시 사랑한 동생 테오와도 연락을 끊은 빈센트는 여생을 그림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33

 

헤이그파가 연출하는 색상은 회색조나 풍부한 황금빛이 도는 갈색이 넘쳐나는 경우가 많았다. 빈센트의 초기 네덜란드 작품 중에는 모베의 가르침으로 헤이그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이 많다. 38

 

함께 지낸지 두 달이 지나자 고갱과 고흐는 자주 싸웠다. 우선 빈센트는 대부분의 일을 고갱의 결정에 따랐고, 심지어 친구가 옹호하는 기억으로 그리는 작업방식을 실험하기도 했다. ‘에텐의 정원을 회상하며가 이 시도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고갱과 지내는 것이 점점 짜증스러워진 것 같다. 1888 12 23일 고갱과 대립한 후 집에서 나가 면도날로 자해해 왼쪽 귀를 잘랐다. 결국 고흐가 아를의 병원에 입원하자 친구의 심신상태에 충격을 받은 고갱은 테오에게 전보를 쳤다. 테오는 형을 병문안하려고 곧장 파리를 떠났다. 고갱은 흥분한 친구를 남겨두고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75

 

다시 한 번 (아를에 있는 정신병원의) 정원은 폐쇄된 뜰이 제공하는 피난처이자 고통 받는 화가에게 평화와 안전을 상징하는 모티브였다. 빈센트는 편지에서 이곳을골동품정원이라고 묘사했고, 그가 정원의 기하학적이고 네오 클래식한 복잡성을 즐겨 탐구했음이 두 작품에 드러난다. 병원 정원은 현재도 남아있어 대중에 공개되어 있다. 아쉽게도 라마르틴 광장의 정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곳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조성되었다. 원래의 정원들이 소실되어 그곳을 그린 빈센트의 작품을 보면 더욱 뭉클해진다. 78

 

빈센트는 생 레미드 프로방스의 요양원에서 12개월간 지낸 후, 다급히 남프랑스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북부로 돌아가는 것 이 깊은 우울증과 정신발작에서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테오는 화가 카미유 피사로(1830-1903)에게 의논했고, 파리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라면 빈센트가 편히 지낼거라는 조언을 얻었다. 그는 오베르 마을에서 닥터 폴-페 르디낭 가셰(1828-1909)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안정될 거라고 했다. 94

 

1857년 이후 화가들이 오베르에 거주하면서 작업하는 전통이 생겼다. 당시 유명한 화가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1817-1878)는 집 겸 화실을 짓고 마을에 정착했고, 1878년 여기서 죽음을 맞이했다. 폴 세잔(1839-1906), 피사로 같은 유명한 화가들도 오베르에서 작업했다. 97

 

생의 마지막 70일간 빈센트는 대단한 속도와 집중력으로 채색화 75점과 드로잉 50점을 작업했다. 마지막으로 완성작에 도비니의 정원 그림이 포함된다. 100

 

1890 7 2737세인 빈센트는 이웃 들판으로 나가 자기 가슴에 총을 쐈다. 그는 치명상을 입고 숙소로 돌아왔고, 7 29일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음 날 오베르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오늘날 형제는 마을에 나란히 묻혀 있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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