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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게 뭐라고 / 사노 요코

by mubnoos 202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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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2015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이다. 나는 알고 싶다. 죽은 뒤에도 미워하고픈 사람이 나타날까.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죽으면 용서하게 될까. 나도 죽으면 모두들좋은 사람이었지라고 추억해 줄까. 죽으면 그런지 아닌지도 모를 테니 시시하다. 11

 

죽을 날이 코앞에 다가오자, 죽으면 돈이 안 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방을 휙 둘러보니 전부 돈을 주고 산 물건뿐이다. 밥공기부터 옷장까지. 시야에 벽이 들어오자 집도 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6

 

나는 처음 암에 걸렸을 때에도 놀라지 않았다. 세상사람들 중 하나는 암에 걸린다. 암 따위로 으스대지 마시길. 훨씬 고통스러운 병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류머티즘이나 진행성 근위축증도 있고. 죽을 때까지 인공투석을 해야 하는 병도 있다. 암은 치료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치료가 안 되면 죽을 수 있다. 주위 사람들의 친절 속에서. 20-21

 

나는 거의 일평생을 지구와 평행하게 살아왔다. 드러누워서 책이나 텔레비전, 빌려온 비디오를 보았다. 지금도 침대 맞은편에 42인치 텔레비전을 두고서 당당하게 본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기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중얼거린다. “아아, 행복하다.” 다리가 아픈걸. 암에 걸렸는걸. 좀 더 큰 텔레비전을 샀더라면 좋았을 텐데. 23

 

아버지가 동료의 병문안을 갔을 때였다. 암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돌아와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꼴사납더군. 내 얼굴을 보고선생님,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지 않아요하며 울지 뭐야. 그런 죽음은 보기 흉해.” 죽음에 대한 미학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는 본인의 신념대로, 아우슈비츠의 수감자처럼 뼈만 남은 채로도 혼수상태에 빠질 때까지 혼자서 벽을 짚고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 조용히,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죽었다. 26

 

있잖아, 프라다 스웨터 나 줘.” 그녀가 어제 말했다. 내가 곧 죽을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나는 웬일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지나치게 정직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하늘에서 계시라도 받은 듯 미움에서 해방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째째함과 욕심에 꽁해 있던 마음에서도 해방되었다. , 뭐든 다 주마. 모조리 다 가지고 가렴. 물건이 다 뭔가. 돈이 다 뭔가. 그녀는 신이 내게 준 리트머스 시험지다. 나는 마치 성불이라도 한 것 같았다. 47-48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50

 

미남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어쩌면 내가 시한부 선고를 하게끔 의사를 위협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모두 들여 죽음과 직면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했다. 무덤을 사거나 장례를 치를 절을 정하는 등의 준비를 해봐도, 살아 있으면 그만 잊어버리고 만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절름절름 다리를 절며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살핀다. , 천리향이 피었다. 오늘은 추우니 밖에 나가지 말까? 휘적휘적 걷다가 들어간 옷 가게에서 치마를 사기도 한다. 이제 옷 따윈 사봤자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도. 54

 

지금이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 일흔은 죽기에 딱 적당한 나이다. 미련 따윈 없다. 일을 싫어하니 반드시 하고 싶은 일도 당연히 없다. 어린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을 때 괴롭지 않도록 호스피스도 예약해두었다. 집안이 난장판인 것은 알아서 처리해주면 좋겠다. 저 세상을 믿진 않지만, 만약 저 세상이 있어서 아버지를 만난다 해도 지금의 나는 아버지보다 스무 살이나 많으니 정말로 곤란하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가난으로부터 배웠다. 부자는 돈을 자랑하지만, 가난뱅이는 가난을 자랑한다. 모두들 자랑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아버지의 저녁 설교 중 이런 말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었겠지. 62

 

다다시는 하얀 쌀밥을 일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채 죽었다. 중국에서는 수수와 밤을,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고구마가 든 보리 밥이나 고구마만을 먹었다. 아마도 영양실조로 고열과 싸울 힘이 1그램도 남아 있지 않았을테지. 죽어가는 다다시의 옆에는 다다시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싸우고 있는 또 한 명의 남동생이 이불을 덮고 있었다. 아래쪽 부엌에서 친척 아주머니들이누가 먼저 죽을까?”라며 내기 걸 듯 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누군가 죽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다다시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66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세계는 점점 쓸쓸해진다. 75

 

히라이: 사람은 죽음과의 거리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받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한 말인데요. 죽음에 대한 감상에도 1인칭, 2인칭, 3인칭이 있다는군요. ‘, 그녀(3인칭)의 죽음은 아, 죽었구나 정도로 별로 슬퍼하지 않아요. 반면 2인칭인당신의 죽음(부모, 자식, 형제 등)’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죠. 그래도 그건 자신의 죽음이 아니에요. 1인칭의 죽음, 나의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인 데다 남들한테 물을 수도 없으니 어려운 거죠. 의사에게 환자의 죽음은 어떤가 하면, , 그녀의 죽음처럼 3인칭은 아닙니다. 환자와의 관계가 있으니 2인칭도 아니고 2.5인칭 정도일까요. 81

 

내 몸은 어디 한 군데도 나쁜 곳이 없었다. 그러나 심장이 세차게 뛰며 쥐어짜듯 아파서 안절부절 숨을 쉴 수 없게 되곤 했다. 항상 마라톤을 하고 난 후의 상태라고나 할까. 그 상태가 지속되면 심장이 소시지가 되어 꼬챙이에 꿰어지고 불에 계속 굽히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을 싹 갈라서 심장을 끄집어내고 피투성이 심장을 끈으로 동여맨 다음,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질질 끌고 다니는 듯할 때도 있었다. 그런 상태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좋은 걸까. 123

 

마지막은 가족끼리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그전부터 얘기했으니까요. 전에 잇던 병원에서는 밥을 잘 먹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들어온 날부터는 통 안 먹네요. 말도 안 하고요. 남편은 의사가 (이 호스피스 병원으로 오는 걸) 말려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아직 그럴 필요 없다고요. 저도 이렇게 갑자기 기력이 쇠할 줄은 몰랐어요.” 말쑥한 정장을 갖춰 입은 손님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 침대에서는 밤이 되면 어두운 오렌지색 불빛이 보였고, 가족 중 누군가 밤새 깨어있는 기척이 가만히 느껴졌다. 딱 한 번 반쯤 열린 문틈으로 환자의 발이 보였다. 푸른 줄무늬 파자마에서 튀어나온 정강이가 쿵하고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몸 전신이 슬퍼하는 듯한 연약한 쓰러짐이었다. 다음 날, 밤이 되었는데도 옆방이 어두웠다. 나는 쓸쓸했지만 그 전에 다급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미가 없었기에, 간병하는 사람도 일찍 잠들었겠거니 했다. 이튿날 간호사에게옆방이 조용하네요라고 했더니, ‘아아, 옆방 환자분은 어제 돌아가셨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요? 몰랐어요. 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 사흘인가 나흘밖에 안 됐죠. 빨랐어요.” 149

 

내가 죽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잡초가 자라고 작은 꽃이 피며 비가 오고 태양이 빛날 것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나고 양로원에서 아흔 넷의 미라 같은 노인이 죽는 매일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 똥에 진흙을 섞은 듯 거무죽죽하고 독충 같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 157

 

폐암이에요. 그래서 폐를 잘라냈거든요. 4년 전에. 양쪽 다 말기였어요. 기침이 좀 나올 뿐이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 수술한 다음에 방사선이랑 항암제를 거부했어요. 백신만 맞아요. 지금은 검사하러 병원에 와 있는 거고요. 병원에서 같은 병에 걸렸던 사람들을 쭉 살펴봤더니, 항암제를 맞은 사람은 전부 죽었어요. 그런데도 왜 다들 항암제를 맞느냐면,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 항암제를 거부하면 병원에서 쫓겨나거든요. 그게 불안한 거예요. 거부하면 병원에서 상대해주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서워서 그래요. 전 항암제를 안 맞으면 4개월 안에 재발하고 1년 안에 죽는다는 소릴 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죠. 남편이랑 아들이 제발 항암제를 맞으라고 애원했고 저도 그걸로 남편이 안심한다면 맞을까 했지만, 이상하게도 쭉 평소처럼 지낼 수 있었어요. 아무도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몰라 요. 정말이에요. 자식은 남자애 하나인데, 내년 3월에는 도쿄의 학교에 입학시키려고요. 아마 입학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의사한테 남은 날이 1년이라는 말을 들어서, 남편이 그때부터 절대로 저한테 고함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가장 기쁜 순간은, 제가 아프다는 걸 잊어버린 채 남편이 또 고함을 칠 때예요. 그건 제 병을 남편도 까먹고 있다는 거잖아요 ? 그게 가장 기뻐요. 전 뭐든 다 하면서 지내요. 병 걸리기 전이랑 완전히 똑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신기해요. 아무 데도 안 아프거든요 . 왠지 이건 내 힘이 아닌 것 같아요.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살아가는 것 같아요. 의사는 1년이라고 했으니까요.” 160

 

그때 검은 눈동자가 스윽하고 투명한 갈색으로 변했다. 한 순간 그녀가 흰색인지 은색인지 모를 색으로 빛났다. 나는 질겁했다. 투명 한 갈색 눈동자에 흘러 넘칠 듯 물이 가득 고였다. 이내 빛은 사라졌다. 눈동자는 점점 까맣게 변했다. “그런 거였군요.” 다시 한 번 그녀가 말했다. “아아, 방금 정말로 기뻤어요. 그렇죠. 그런 거였네요. 고마워요, 그 말을 안 해주셨다면 전 모를 뻔 했어요.” 빛의 여운이 남아 있는 달걀 모양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빛은 그녀에게만 쏟아졌다. 그때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인지 부처님인지의 법열을 맛본 사람을 목격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166

 

내 옆방은 텅 빈 채였다. 밤이 되면 레이스 커튼 건너편이 어둠보다 더 짙은 덩어리로 변했다. 그 검은 덩어리 속에도 공기나 산소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작은 오렌지색 불빛이 비치고, 가만가만 인기척이 내 방까지 들려오던 때의 따스함이 그리워졌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는 살아있다. 174

 

이 책의 원제죽을 의욕 가득애라는 제목은 아드님인 화가 히로세겐 씨가 무심결에 했던 말, “엄마, 왠지 요즘 죽을 의욕이 가득하네 ?”에서 나왔다. 요코 씨에게는 그런 모습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일흔둘은 역시 일렀다. 특히 여성의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너무도 빨랐다. 미련이 남는 일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195

 

이곳의 봄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산이 웃음을 참듯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면 갈색이던 산이 옅은 주홍빛을 띤 회색으로 변하며, 하얀색 과 분홍색이 산 한쪽 면에 흩뿌려진 듯이 나타난다. 목련꽃과 벚꽃이 동시에 피는 것이다….내가 죽은 후에도 아지랑이가 낀듯한 봄날 의 산이 몽실몽실 웃음 짓고 목련꽃도 벚꽃도 변함없이 피리라는 생각을 하면 분하다.’ 195

 

 

-역자후기에서 그녀(사노 요코)의 태도는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호랑무늬 고양이는 100만 번 죽고 100만 번 다시 태어난다.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이 고양이는 자신이 죽을 때도 늘 태연자약하다. 그러다 어느 생에서, 그 고양이는 처음으로 타자(흰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다. 두 고양이는 가족을 이루어 오랫동안 함께 산다. 세월이 흘러 흰 고양이가 죽자, 호랑무늬 고양이는 100만 번 운 뒤에 따라 죽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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