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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 제러드 다이아몬드

by mubnoos 202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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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위기와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닥친다. 외부적 압력이나 내부적 압력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려면 선택적 변화가 필요하며, 이는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해당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고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

 

한국 독자에게

 

프롤로그: 코코넛 그로브 화재 사건의 유산

 

19 이질적 요소가 거북하게 공존하는 개인과 국가의 '모자이크'
지금의 영국은 새로운 자아와 옛 자아의 모자이크이다. 영국은 제국의 위상을 버리고 다민족 사회가 되었다.

 

20 위기와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닥친다. 한 사람의 개인부터 팀과 기업, 국가와 전 세계까지 규모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

 

20-21 외부적 압력이나 내부적 압력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려면 선택적 변화 selective change 가 필요하다. 이는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선택적'이라는 단어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완전히 변할 수도 없고 과거의 정체성을 규정하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런 변화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위기를 맞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는 정체성 중 제대로 기능해서 바꿀 필요가 없는 부분은 무엇인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바꿔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고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어떤 부분이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하며 적정성을 유지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런 부분은 당연히 보존하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찾아재는 용기도 필요하다. 동시에 개인과 국가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관에 양립하는 새로운 해결책도 찾아내야 한다. 물로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정체성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해야지, 그 부분까지 바꿀 이유는 없다.

 

21 위기 - 전환점

 

22 목적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23 위기를 다른 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24 위기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압력이 갑자기 폭발할 때 닥친다 - 이미 발생한 사건의 인정

 

26 자아강도 ego strength - 국가 정체성 national identity

 

27 이 책은 비교하는 comparative 책이다.

 

28 하나의 국가를 연구하는 사람은 결국 어떤 국가도 이해하지 못한다.

 

37 폭발적 위기 explosive crisis 와 점진적 변화 gradual change 의 차이는 객관적이지 않고 임의적이어서 경계가 모호하다.

 

 

 


1부 개인

1장 개인의 위기

 

44 책으로만 배운 6개의 외국어

 

45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_ 윌든

 

49 위기가 닥치면 새로운 대처법을 찾아내려 발버둥 치고, 정체성과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51 모든 개인의 위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현재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절박감이다

 

50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절박감

 

51 기존의 대처법으로는 이겨낼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유발된 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1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예외 없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
좋은 위기를 헛되이 보내지 마라! - 처칠

 

52 많은 삶이 급격히 변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변한다.

 

52 어떤 위기를 해결했더라도 다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고 새로운 위기를 맞닥뜨린다. 위기 형태는 다양하더라도 위기를 통과하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54 처음 위기 상태에 빠지면 누구나 삶에서 모든 것이 잘못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54 얼핏 생각하면 전체적인 변화가 필요할 듯, 선택적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57 <개인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한 요인>
1. 위기 상태의 인정
2.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개인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개인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4. 다른 사람과 지원 단체의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사람의 사례
6. 자아 강도
7. 정직한 자기 평가
8. 과거에 경험한 위기
9. 인내
10. 유연한 성격
11. 개인의 핵심 가치
12. 개인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57 우리가 나한테 문제가 있어라고 인정한 후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책임을 떠맡는 것이다.

 

62 자아 강도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발버둥 치지 않고 생을 위해 자의식과 목적의식으로 무장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자아 강도에는 격한 감정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 압박감을 받으면서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능력,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며 건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

 

63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직하게 평가하는 방법

 

65 Core value -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

 

66 핵심가치가 변화한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드러난 후에도 이를 고집하면 위기르르 해결하기 힘들 수 있다.

 

67 누구도 나에게 포기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제외하면!

 

68 자신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고 솔선해서 무엇인가 하겠다는 책임을 지니고, 위기를 정확히 파악,평가하여 도움을 구하고, 본보기에서 교훈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필요하다.

 

70 <국가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한 요인>
1.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2.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4.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6. 국가 정체성
7. 국가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자기 평가
8. 역사적으로 경험한 과거의 국가 위기
9. 국가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10.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
11. 국가의 핵심 가치
12.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2부 국가: 위기의 전개
2장 핀란드와 소련의 전쟁

  • Finn
    러시아와 국경(우호관계) - 유럽의 어떤 국경보다 길다.
    인구 600만명
    단순함으로 아름다운 효과를 빚어내는 능력 - 건축가, 실내장식가
    푸른눈, 금발
    '우리는 작은 나라이다!', '우리의 지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핀란드어는 정체성의 핵심
  • 1) 겨울 전쟁 1939년 - 핀란드 vs. 러시아
    소련 인구 1억 7000만 : 핀란드 인구 370만
    핀란드의 목적은 러시아의 승리를 늦추고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최대한의 피해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핀란드는 소련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놀랄정도로 완강히 저항했다.
    전쟁이 예상대로 진척되지 않자 소련은 1940년 포기
  • 2) 계속 전쟁 continuation war -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
    독일과의 연대 - 지독히 고약한 선택 중 그나마 나은 것
    평화조약 - 핀란드는 소련에 3억달러 6년이내 배상금 -> 경제적 자극-> 조선업, 중공업의 수출

113 핀란드의 외교정책의 기본과제는 핀란드의 지정학적 환경을 지배하는 이해관계에 핀란드의 실존을 맞추는 것이다. 핀란드의 외교정책은 예방 외교이다. 예방 외교의 과제는 위험이 코앞에 닥치기 전에 미리 감지해서 그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입장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작은 국가는 군사와 정치 분야의 향후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미리미리 정확히 인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117 핀란드의 교사는 경쟁이 상당히 치열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졸업생이 교사가 되고, 심지어 대학교수보다 사회적 지위는 물론 보수도 높다. 모든 교사나 석사나 박사학위를 보유하고 가르치는 방법에서도 많은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그 결과, 핀란드 학생은 문해력과 수학과 문제 해결 능력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다.

 

 

 


3장 현대 일본의 기원

137 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1848년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인수한 후 금광을 발견하며 태평양 연안에서 해상 교통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 때문이었다. 태평양을 무대로 한 포경선과 무역선도 크게 증가했으며 필연적으로 일부 미국 선박이 난파되었다. 당연히 일본 주변의 바다에서 난파되는 선박도 있었고 적잖은 선원이 일본의 구조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쇼군의 쇄국정책에 따라 살해 또는 체포되었다.

 

139 쇼군의 정부, 즉 막부가 일본의 오랜 쇄국을 끝내는 조약에 서명한 1854년부터 14년의 시간은 일본 역사에서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140 1854년 이후로 막부의 기본 전략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최소한으로 양보하며 서구 열강을 만족시키되 그 동안에 군사와 비군사 분야 모두에서 서구의 지식과 장비, 과학기술과 장점을 도입함으로써 하루 빨리 서구에 저항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서겠다는 뜻이었다.

 

146

1)일부 지도자는 쇄국주의자를 편들며 당장 서구인을 추방하기를 바랐지만 현실주의가 더 우세했다. 쇼균이 그렇게 생각했듯 메이지 시대 지도자들이 보기에도 당시 일본에는 서구인을 추방할 만한 힘이 없었다. 서구인을 추방하기 전에 일본도 서구가 강해진 근원을 받아들임으로써 강한 국가로 거듭날 필요가 있었다.

2)메이지 시대 지도자들의 궁극적 목표는 서구가 일본에 강요한 불평등조약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일본이 강해져야 했고 서구식 헌법과 법률을 갖춤으로써 서고 사회가 보기에도 서구식의 적법한 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3)각각의 생활권에서 일본의 상황과 가치에 가장 적합한 외국 모델을 찾아 채택하고 수정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특히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미국의 모델을 다양하게 차용했다. 결국 여러 국가의 다양한 영역에서 본보기가 된 것이다. 예컨대 일본 해군과 육군은 차례로 영국 해군과 독일 육군을 본보기로 삼았다. 한편 특정한 영역에서는 여러 국가의 모델을 연이어 시험하기도 했다. 예컨대 민법을 제정할 때 법무부는 초안을 프랑스 학자에게 맡겼지만 수정할 때는 독일 민법을 모델로 삼았다.

 

148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지극히 구체적인 목적을 띤 관찰자 두 명을 파견했다. 유럽인은 어떻게 싸우는지 직접 관찰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바깥세상을 경험한 일본인이 정부와 민간 분야 모두에서 지도자로 부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150 일본은 한 국가의 군대만 본보기로 선택하지 않고 육군은 독일을, 해군은 영국을 본보기로 삼았다.

 

151 하나의 시급한 과제는 봉건주의의 종식-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구 국가처럼 중앙집권화한 국가를 수립해야 했다.

 

152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배우기 어려운 문자를 사용하지만 세계 최고의 무해율 99%을 자랑하게 되었다.

 

153 일본은 부의 분배가 가장 평등하고 인구 대비 억만장자의 비율도 가장 낮은 국가이다.

 

158 메이지 시대의 일본의 서구화는 서구 제도를 무턱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의 군사와 교육 및 여러 제도를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일본 상황에 적합하게 수정해 채택하는 것이었다.

 

159 중국은 일본이 반드시 피해야 할 본보기

 

160 러일전쟁 1904-1805 일본 승리

 

167 국가의 정직한 자기 평가를 위한
1) 고통스러운 진실을 직시하려는 적극적 자세
2) '지식'의 전제조건


4장 모든 칠레인을 위한 칠레

  • Chile
    라틴 아메리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적
  • 살바도르 아옌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영원한 패자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고문, 학살, 독실한 카톨릭 (히틀러같은)

186 몬탈바 대통령 시대에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개발원조를 가장 많이 받는 국가

 

187 아옌데의 정책을 이렇게 평가했다. 아옌데의 생각은 좋았지만 그걸 시행하는 방법이 엉망이었다. 그는 칠레 문제를 정확히 진단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이 잘못되었다->쿠데타

 

189 아옌데의 경제정책은 다른 나라에서 이미 몇 번이고 실패한 대중 영합적인 조치에 의존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런 조치는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칠레의 미래를 좀먹고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습니다. 많은 칠레인들이 아옌데를 존경하고 심지어 성자로 추앙했지만 성자 같은 품성이 반드시 정치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0 아옌테는 절망적인 상황인 것을 인정하고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로 받은 기관총으로 자살했다.

 

196 정치적 분위기의 양극화와 폭력성의 증가 및 정치적 타협의 결렬-> 야만적인 국가

 

201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 군사정부의 행위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아옌테보다 피노체트 정부가 더 낫다.

 

204 피노체트 집권 -10만명 좌익 망명

 

217 예외적인 지도자 한 명이 국가의 위기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5장 인도네시아: 신생국가의 탄생

  • Indonesia
    세계에서 인구가 4번째로 많은 국가, 2억 6천만명
    무슬림
    700개 언어

226 인도네시아라는 단어가 1850년경 한 유럽인이 만들어낼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인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인도제도’, ‘네덜란드령 인도제도’, 혹은 ‘동인도제도 East Indies’라 불렀다. 그 군도의 원주민에게는 공통된 국가 정체성도 없었고 공용어도 없었으며 네덜란드에 대항할 만한 일체감도 없었다.

 

227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교역어였던 말레이어가 발전하고 변형된 바하사Bahasa 인도네시아어였다.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는 현재 모든 인도네시아인이 공유하는 국어이다. 인도네시아에는 수백 개의 지역어가 있는데, 그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중앙자바주의 자바어조차 인도네시아 국민의 3분의 1이 사용하지 않는다. 자바어가 가장 큰 지역어라는 이유로 국어가 되었다면 자바가 인도네시아를 지배한다는 상징이 되었을 것이고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문제, 즉 자바가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들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심화되었을 것이다. - 배우기 쉬운 언어

 

234 수카르노- 빌어먹을 원조는 필요 없으니 지옥에나 가라 - 미국에 대응

 

238 뉴기니인은 다시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게릴라전을 시작,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수카르노 - 수하르토 (쿠데타 - 독재)
군부의 대량학살

 

233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Sukarno 1901~1970, 는 네덜란드 시대부터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정치적 이력을 쌓아갔다. 많은 인도네시아인이 그렇듯이 수카르노도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국가 정체성이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판차실라 Pancasila라는 다섯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판차실라는 1945년 헌법에도 명시되어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를 하나로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판차실라에 담긴 원칙들은 포괄적-일신교 신앙, 인도네시아의 국가 정체성, 인도주의, 민주주의, 모든 인도네시아 국민을 위한 사회 정의 –이다.

 

251 수할토의 중심 사상 - 하나의 길만 있고 분쟁이 없어야 한다.

 

254 1999년 수하르토가 실각한 이듬해, 인도네시아는 거의 40년 만에 처음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했다. 그 이후에 실시한 일련의 선거에서 인도네시아의 투표율은 70~90%로 미국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의 투표율은 대통령 선거에서도 60% 남짓 일 뿐이다.

 

259 신생국가로서 인도네시아는 자신감을 얻을 만한, 과거에 성공한 변화의 역사도 없었다.

 

264 인도네시아의 국가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근원 중 하나는 1945~1949년에 일어난 독립 투쟁으로 네덜란드의 지배를 떨쳐냈다는 자부심이다. 정부는 1945~1949년에 벌인 투쟁을 여러 형태로 변환해서 독립을 위한 영웅적 투쟁 이야기로 국민에게 전달하며, 이런 자연 발생적인 자부심을 북돋워주는 역할을 한다.

 

 



6장 독일의 재건

탈나치화 denazificaiton

 

281 누구에게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이 있고 각국의 정부가 무엇이라 말하든 간에 그 분별력을 따라야 한다.

 

286 독일인이 어느 해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다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1968년 독일에서 폭력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1968년의 시위자들은 1945년경, 즉 전쟁이 끝났을 무렵에 태어났다. 그들은 나치로 성장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전쟁을 경험하거나 전쟁 후의 혼돈과 가난을 기억하기에도 너무 어렸다. 독일이 경제를 회복한 후, 즉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대에 그들은 성장했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 힘겹게 투쟁할 필요가 없었으며 저항과 시위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고 안전한 삶을 누렸다.

 

301 성공한 독일 정치인들의 외교정책에 담긴 기본 철학은 비스마르크의 비유로 요약된다. 우리는 신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어디를 걷고,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항상 유념해야 했다. 그러고는 신에게 달려들어 신의 웃옷 뒷자락을 움켜잡고 갈 수 있을 때까지 끌려서라도 가야한다. 1969~1974년까지 빌리 브란트의 선제적 조치가 있은 후 마침내 독일의 재통일 기회가 동독과 소련의 정치 상황에서 찾아왔을 때 1989~1990년 헬무트 콜 총리가 사용한 전략도 이것이었다.

  • 독일의 좋은 지도자 - 빌리 브란트, 비스마르크
  • 독일의 나쁜 지도자 - 히틀러, 빌헬름 2세

309 강력한 국가 정체성도 독일이 잿더미로 변한 점령과 분할의 시대를 딛고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국가 정체성과 국민적 자부심의 기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과 미술, 문학과 철학, 과학이 있다. 또 다양한 독일 방언을 초월해 마르틴 루터의 성경 번역으로 체계화 된 독일어의 결속력, 오랜 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파편화되어 있었지만 독일인은 여전히 하나의 민족이라 생각하게 해주는 공통된 역사에 대한 기억도 강력한 국가 정체성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7장 오스트레일리아: 우리는 누구인가?

 

318 오스트레일리아에 원주민의 조상들이 정착하고 대략 5만 년이 지난 후, 첫 유럽 정착자들이 1788년 1월에 그 땅을 밟았다. 영국에서 보낸 11척의 선단이었다. 영국 정부가 오스트레일리아를 매력적이고 멋진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선단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죄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 정부가 죄수들을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내던져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319 황무지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아남고 번성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죄수를 조상으로 둔 현대 오스트레일리아인은 이런 과거를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생각한다.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땅에 도착한 정착자들의 후손인 현대 미국인이 느끼는 자부심과 비슷하다.

 

322 비영국계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첫 이민단이 1836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왔다. 그들은 외딴 곳에 버려질 죄수가 아니라 부동산 개발 회사가 유럽에서 신중하게 선발한 전향적인 정착자로 구성된 이민단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첫 골드러시가 시작된 1850년대 수만 명의 중국인이 들어오면서 분란이 일어났다. 그 결과, 군중이 중국인 구타, 강탈하고 심지어 머리 가죽을 벗기는 폭동이 일어났다.

 

322 세 번째 비영국계 이민단은 1860년대 퀸즈랜드에서 사탕수수 플랜데이션을 시작하며 들어왔다. 플랜테이션에 투입된 노동자는 뉴기니를 비롯한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태평양 섬사람들이었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찾아온 일꾼이었지만 흑인 노예 유괴로 끌려온 사람이 대다수였다. blackbirding

 

335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서 영국이란 조국을 위해 싸운 까닭은 오스트레일리아에게는 국민적 자부심을 상징하게 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인은 영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이란 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감성적 봉헌식이기도 했다.

 

339 오스트레일리아인에게 싱가포르 양도는 충격적이고 놀라운 군사적 패퇴였을 뿐 아니라, 영국이란 조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배신한 사건으로도 해석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자체 방어력을 키우는 걸 등한시 한 것도 잘못이었다. 하지만 영국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신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항복이 있고 50년이 지난 1992년 말,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폴 키팅은 의회 연설에서 영국을 준열하게 비판하며 증오심을 유감없이 터뜨렸다.

 

349 영국이 EEC에 가입함으로써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관계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서유럽 6개국은 EEC의 비회원국에 대한 공동 관세장벽을 세웠고 영국도 그 장벽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관세장벽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료품과 제련한 금속에도 당연히 적용되었다. 당시 영국은 두 상품의 주된 수출 시장이었다. 요컨대 영국에 수출하던 오스트레일리아 식료품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덴마크의 식료품으로 대체된다는 뜻이었다.

 

350 1972년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을 외국인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견디기 힘든 큰 모욕이었다.

 

354 1999년 오스트레일리아 최고법원-영국을 외국이라고 선언

 

360 머지않아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계를 총리로 선택할 것이다.

 

 

 

 

 

 

3부 국가와 세계: 현재진행형인 위기들


8장 장래에 일본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세계에서 외환보유고가 두번째로 많다.

+
위기를 해결하는 능력/ 인내심과 역량/ 지리적 선택
1) 연구개발/혁신유도
2) 인적 자원/문해력과 교육수준
3) 환경적 이점

_
1) 정부의 지나친 부패
2) 여성의 역할/감소하는 출산율/ 줄어드는 인구 규모/ 인구의 노령화
3) 이민을 환영하지 않는다- 영주권 시민권 얻기 어렵다
4) 일본내에서는 거의 무시하는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전쟁 기간에 한국과 중국에 취한 태도가 두 국가와의 현재 관계에도 미치는 영향이다. 지금도 반일 감정이 팽배하다.
- 독일인과 달리 일본인은 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자신들의 체제에 내재한 독소를 제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이 범한 잘못을 가르치지 않았다.
- 중국이나 한국이 일본 지도자에게 원하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일본인이 왜 과거를 인정하고 사과한후 미래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사과하려 들지 않는다.
- 난징대학살, 위안부, 잔혹한 생물실험 - 부인했다.

 

5) 자원의 고갈 - 일본은 식량 수입에 크게 의존 - 한국의 여섯배
(포경선- 일본이 의존하는 해외 자연자원을 철저히 파괴)

  • 더이상 맞지 않는 전통적 핵심 가치
  •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지 않음
  • 정직하고 현실적인 자기평가 부족

371 일본정부가 오래 전에 붕괴되거나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1) 대부분의 국채를 외국 채권자가 아니라 일본 국민과 일본 기업 및 공기업인 연기금과 일본은행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채권자가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지 않는 경제 주체이다. 일본 정부는 국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일본 정부 자체는 다른 국가에 많은 돈을 빌려준 순채권국이다. 2) 일본의 이자율은 정부 정책에 의해 거의 언제나 낮기 때문이다.

 

388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일하며 일본과 중국, 한국 지도자들을 지켜본 리콴유의 평가
한국과 필리핀,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여성을 납치하거나 강제로 끌고 가 전선에서 일본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로 삼았다는 사실도 부인했다. 게다가 만주에서는 한국과 중국, 몽골과 러시아 등 여러 국적의 포로를 대상으로 잔혹한 생물실험을 했다는 사실도 부인했다. 경우마다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일본인의 손으로 쓴 기록에서 발견된 후에야 마지못해 인정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장래의도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태도는 미래의 행동을 짐작하게 해주는 지표이다. 일본이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도 거의 없지 않겠는가

 

 



9장 장래에 미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강점과 중대한 문제들

414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겉모습이다.

 

419 미국은 역사적으로 중단 없이 민간인이 군부를 지배해왔다. 중국이나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며 이는 1930~1945년까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429 Gerrymendereing - 어떤 정당을 선택하는 유권자의 비율보다 더 많은 의원을 당선시킬 목적으로 그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재조정

  • 사회적 자본의 쇠퇴

 

438 대부분의 미국인은 상대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438 눈앞에 보이는 사람보다 모니터 위의 글에는 무례하고 경멸하게 굴기가 훨씬 더 쉽다. 이렇게 멀리 떨어졌다는 이류로 언어폭력을 행하고, 그런 행위가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눈앞의 사람에게도 더 쉽게 언어폭력을 행사한다.

10장 장래에 미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세 가지 ‘다른’ 문제

 

461 미국 정부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 투자하는 돈이 줄어들고 있다.

 

464 1) 대부분의 돈이 납세자의 주머니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대부분의 부유한 민주국가와 비교하면 미국의 세금 부담은 낮은 편이다. 2) 많은 세금이 교도소, 군사비, 보건에 지출되고 있다.

 

469
질문: 언제쯤에야 미국은 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까?
대답: 강력하고 부유한 미국인들이 물리적으로 불안을 느끼기 시작할 때

 

470 다른 국가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미국 예외주의' American Exceptionalism

 

473 미국이 위기와 직면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쪽을 탓하는 습관, 자체의 문제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지 않고 자기 보호에 급급한 태도, 다른 국가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오만함이다. 그러나 이 요인들을 근거로 미국인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다.

 

511 물론 범세계적 불평등 자체가 테러 공격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다. 종교의 근본주의와 개인의 정신 병리적 현상도 주된 역할을 한다. 어떤 국가나 분노에 휩싸여 모두들 닥치는 대로 죽이려는 미치광이가 있다. 가난한 국가에만 그런 광적인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11장 장래에 세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에필로그: 교훈과 남는 의문 그리고 미래 전망

 

513 부통령 딕 체니 - 미국의 생활방식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551 국가가 중요한 선택적 변화를 시도하도록 자극하려면 위기가 먼저 있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개인의 경우에 대한 대답과 유사하다. 타성과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

 

552 지도자가 차이를 만드는가?

 

566 역사에서 유용한 교훈을 배울 가능성을 묵살하지 말라.

 

568 내가 비관주의자의 푸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또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역사에 대해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방향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낫다. 위기는 과거에도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대 국가에 현 세계는 앞으로 위기에 대응하려고 어둠 속에서 헤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거에 효과를 발휘한 변화와 그렇지 않았던 변화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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