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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논 / 플라톤

by mubnoos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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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함은 앎이다. 앎은 상기되는 것이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탁월함이란, 그리고 배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탁월함이 가르침이나 배움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지, 그리고 탁월함의 교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아테네 철학자와 교육자의 화두였다. <메논>은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어떤 의미의 교사였고 어떤 의미의 교사이길 거부했는지를 해명하는 또 하나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기도 하다.

엘렝코스: 상대방의 확신을 논리적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하는 ’합리적 검중과 비판적 검토의 기술’

 

 

 


그리스-로마 고전은 서양 지성사의 뿌리이며 지혜의 보고이다. 그러나 이를 우리말로 직접 읽고 검토할 수 있는 원전 번역은 여전히 드물다. 이런 탓에 우리는 서양 사람들의 해석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처지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상의 수입은 있지만 우리 자신의 사유는 결여된 불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삶과 현실을 서양의 문화유산과 연관 지어 사색하고자 할 때 특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 자신이 부닥친 문제를 자기 사유 없이 남의 사유를 통해 이해하거나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대안들이 때로는 현실을 적확하게 꼬집지 못하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말을 나누며 함께 고민하는 문제와 만날 때 인문학은 진정한 울림이 있는 메아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현실과 함께 고민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써 가능하겠지만, 그조차도 함께 사유할 수 있는 텍스가 없다면 요원한 일일 것이다. 사유를 공유할 텍스트가 없을 때는 이 분열될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인문학적 탐색은 삶의 현실이라는 텍스트, 그리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문헌 텍스트와 만나는 이중의 노력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현재 대중 인문학은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인문학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사유 없는 인문학은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되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은 서양 사상의 뿌리이자 서양 문화가 이루어 온 지적 성취들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풍성하고도 심오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대화 형식으로 쓰여 있어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이 최고의 철학 고전이자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손꼽고 있다. '유럽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이다.' - 화이트헤드

 

ㆍ등장인물

- 소크라테스

- 메논

- 아뉘토스

- 메논의 노예

 

 


 

 

ㆍ제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가르쳐질 수도 없고, 수련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련에 의해서나 배움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사람들에게 생기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 것입니까?

 

ㆍ이방인이여, 당신에게는 내가 축복받은 사람처럼 보이나 봅니다.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 건지를 어쨌든 내가 아는 사람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난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실은 탁월함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전적으로 알지 못하니까요.

 

ㆍ비록 탁월함들이 많고 다양할지라도 모든 탁월함들은 동일한 어떤 하나의 형상을 갖는데, 이것 때문에 그것들이 탁월함들이고, 대답하는 사람은 이것에 주목함으로써 질문한 사람에게 탁월함인 바로 그것을 아마 훌륭하게 밝혀 줄 수 있을 걸세. 혹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가?

 

ㆍ남자의 탁월함은 나라를 잘 관리하는 것이고, 여자의 탁월함은 가정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 메논

 

ㆍ뛰어난 사람이고자 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양쪽 모두 동일한 것들을 필요로 할 걸세. 정의와 절제 말이지.

 

ㆍ자네는 '끝'을 '어떤 것'으로 부르는가? 나는 한계와 극단과 같은 그런 것을 말하네.

 

ㆍ모든 형태에 대해 하는 이렇게 말하니까. 입체를 한계 짓는 것이 바로 형태라고 말일세. 난 형태는 입체의 한계라고 말하겠네.

 

ㆍ좋은 것들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탁월함이라고 주장하는거지?

 

ㆍ전기가오리 자체는 그렇게 마비되어 있으면서 다른 것들을 마비시키는 것이라면, 물론 그것과 비슷하네.

 

ㆍ자연 전체가 같은 혈통이고 영혼은 모든 것을 배웠기 때문에, 단 하나를 상기한 사람이 -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이네 - 그가 용감하고 탐구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지. 탐구와 배움은 결국 모두 상기니까 말일세.

 

ㆍ우리는 배우는 게 아니고 우리가 '배움'으로 부르는 것을 상기라는 것 말입니다. 

 

ㆍ탁월함은 영혼 속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고 필연적으로 유익하다면, 그것은 앎이어야만 하네. 왜냐하면 영혼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 자체가 그 자체에 있어서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지만, 앎이 더해지느냐 무지가 더해지느냐에 따라 유익하게도 유해하게도 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이 논의에 따르면, 어쨌든 탁월함은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앎의 일종이어야만 하는 것이네. 

 

ㆍ그렇다면 모든 경우에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 사람에게는 영혼에 다른 모든 것들이 의존하지만, 영혼 자체의 일들은, 만약 뛰어난 일들이 되려면, 앎에 의존한다고 말일세. 그리고 이 논의에 의하면 유익한 것을 앎일 걸세. 그리고 우리는 탁월함이 유익하다고 주장하고 있지? 그러므로 우리는 탁월함이 앎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전체든 일부든 말일세.  - 이 논의들은 훌륭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제겐 보입니다. 소크라테스.

 

ㆍ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게 아니겠지? -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고찰한 거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뛰어난 사람들이란 도대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뛰어난 사람들이 생길 경우 생기는 방식이 무엇일지 말입니다.

 

ㆍ대체 '올바르게'로 뭘 뜻하시는 겁니까?

 

ㆍ탁월함이 앎이라면,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나?

 

ㆍ사람이 올바른 것을 향해 인도하는 일들의 경우, 이 둘, 즉 참인 확신인식이 인도하는 것이네.

 

 

ㆍ탁월함은 본성적으로 있는 것도,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신적인 섭리에 의해 누구든 그것이 생기는 사람에게 지성 없이 생길 것이네. 

 

ㆍ탁월함은 누구든 그것이 생기는 사람에게 신적인 섭리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우리에겐 보이네

 

 

 


 

ㆍ민주적 의사 결정에 필수불가결한 합리적 토론과 비판적 논생은 개인의 지적이고 정치적인 역량, 즉 탁월함을 입증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고,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비판과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대될 수 밖에 없었다. 

 

 

ㆍ메논의 네 부류의 인물

1) 프로타고라스 같은 소피스트들의 집단: 자칭 탁월함의 교사이고,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는 직업 교사들

2) 고르기아스: 말을 잘하게 만드는 설득의 수사학자

3) 아뉘코스: 전통적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성향의 민주파 정치가

4) 소크라테스: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규정을 통해 그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둔다. 

 

ㆍ<메논>의 주제는 탁월함의 획득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1) 탁월함이 가르침이나 배움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지, 2) 탁월함의 교사가 있는지

 

ㆍ<메논>은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어떤 의미의 교사였고 또한 어떤 의미의 교사이길 거부했는지를 해명하는 또 하나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ㆍ세 단계의 문답법적 탐구

1) 탁월함은 무엇인가?

2) 배움은 무엇인가? 

3) 탁월함과 배움/가르침의 결합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통해 문제 제기에 대한 최종답변을 이끌어 내는 단계

 

ㆍ문답법의 특징들

1) 탐구되는 사태의 사례나 현상이 아니라 사태의 본질과 규정성을 지향한다. 

 

2) 주어진 확신의 옳고 그름을 검증할 때 항상 상대방에 의해 미리 동의된 것들로부터 수행한다. 

 

3) 대화의 전 과정을 규제하는 보편적인 논리적 공리로서 모순율을 전제하고, 문답법적 탐구의 모든 성과는 궁극적으로 모순율의 논리적 필연성에 종속된다. 

 

4) 특정한 확신의 진위를 검증할 때 그 확신의 소유자가 모순을 범하는지 범하지 않는지에 주목한다. 어떤 대화자도 자신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모순율의 논리적 필연성 때문에 자신의 확신이 잘못된 것임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모순의 발견은 사태와 사례의 차이를 무시하는 사유 방식인 확신의 자기확실성을 깨는 수단이자 확신 속에 내재된 혼란을 해체시켜 가는 본질적 계기이고, 모순의 불가능성에 대한 지각은 사태 자체의 인식을 성취하기 위한 추가적 세부 구별의 필요성의 지표가 된다. 

 

5) 시종일관 '무엇인가?' 물음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확신들에 대한 반복적 논파르르 통해 사태 자체의 인식에 조금씩 근접하도록 유도한다. '무엇인가?' 물음에로의 반복적 회귀는 사태 자체에 대한 탐구의 정체가 아니라 도약과 진전의 표시이다. 

 

ㆍ플라톤의 문답법 (엘렝코스) : 그 목적의 측면에서는 상대방의 확신에 대한 검증과 검토를 가리킨다. 플라톤의 문답법은 '엘렝코스'의 기술이고, '엘렝코스'의 기술은 상대방의 확신을 논리적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하는 '합리적 검증과 비판적 검토의 기술'이다. 

 

ㆍ탐구와 배움은 모두 상기이다. 탐구는 전적으로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상기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모르는 것을 지금 어떤 의미에서는 알고 있어야 하며, 즉 모른 것과는 다르지만 그 모르는 것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을 지금 알고 있어야 하며, 모르는 것에 대한 배움은 지금 알고 있는 그런 인식들로부터 방법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ㆍ탁월함이 올바른 확신이라면, 탁월함은 신적인 섭리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탁월함의 교사가 없기 때문에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렇다면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없기 때문에 탁월함은 더 이상 인식이 아니다. 탁월함이 참인 확신이라면, 탁월함은 지성 없이 신적인 섭리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메논의 최초의 문제 제기에 대한 최후의 결론이다.

 

ㆍ탁월함이 인식일 때, 오직 그때에만 탁월함의 진정한 교사도 있고, 결국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 즉 상기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대화편 전체를 꿰뚫는 소크라테스의 주된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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