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야생의 사고>의 직접적인 주제는 우리들 문명인의 사고와 본질적으로 다른 미개의 사고가 존재한다는 환상의 해체이다.
ㆍ야생의 사고라는 용어는 이러저저한 미개인의 사고가 아니라 어떤 기호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공리와 공준과의 체계이다. 야생의 사고는 또한 신화적 사고와 구체의 논리로 표현되는 사고이며, 이것은 문명인의 사고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문명인의 사고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점을 레비 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지적한다.
ㆍ토테미즘은 분류체계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ㆍ레베 스트로스의 신화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은 어느 정도로 신화의 구조가 실제로 인간 정신을 반영하며 동시에 인간정신을 형성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목적은 신화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고 어떻게 신화가 생각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ㆍ1) 신화는 무시간적이다. 2) 신화는 복수 또는 다수의 기호를 사용한다.
ㆍ신화와 역사는 시간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신화에 있어서의 사물이란 현재나 이 세상이 시작될 때나 같은 것이고 또 미래에 있어서도 태곳적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역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이해를 가져다줄 뿐 이니라 현재에 있어 사람들을 서로 대립시키고 또 미래를 구축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서로를 대립시키는 수단을 부여해 주고 있다.
"모든 사회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이런 양극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어떤 사회도 진정으로 좋은 사회는 없고 그 어떤 도덕체계도 완전한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체계들은 서로 균형이 잡혀 있다는 것을 확인할 따름이다."
1. 구체의 철학
ㆍ쓸모와 관심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말로써, 쓸모란 실용적 차원의 말이고 관심이란 지적 차원의 말이다.
ㆍ추상적 언어의 사용은 그것이 지적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민족사회 속의 특정 집단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차이에서 온다.
ㆍ어떤 경우거나 이 세계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인 동시에 사고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ㆍ어느 문명사회에서나 사람들은 그들의 사고 방향이 객관성을 띠고 있다고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미개인들은 단지 생리적, 경제적 요구에 의해서만 움직일 뿐이라는 편견을 우리는 갖지만 미개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평가하며 그들의 지적 욕구가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조화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ㆍ고도로 체계화된 지식이 반드시 실용적인 목적에만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ㆍ우선 지식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유용하거나 흥미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이다.
ㆍ과학의 최우선의 목적은 실용적인 것이 아니다. 그 과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앞서 또는 그 대신에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ㆍ모든 이론과학이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ㆍ우리가 원시적이라고 일컫는 사고는 질서에 대한 요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고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며 우리에게 생소한 사고형태를 아주 쉽게 이해하게 되는 것은 모든 사고 속에 이러한 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ㆍ모든 존재, 사물 혹은 특징들에 제각금의 위치를 부여하는 세밀한 재배치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ㆍ주술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결정론을 전제하는 데 비해, 과학은 우선 여러 개의 차원을 구분하고 그 중의 일부에만 결정론적 형식을 부여하며 그 밖의 차원에는 같은 결정론적 형식을 적용하지 않는다. 결정론적 작용을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추측하고 활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술적 의례나 신앙은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과학에 대한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ㆍ조직화에 대한 요청은 예술과 과학의 공통적 욕구이다.
ㆍ대체로 과학이 주술보다 더 성공적인 것은 사실이다.
ㆍ인간 정신의 발달 단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인식이 자연에 접근할 때 일어나는 두 전략적 차원의 차이에서 온다. 하나는 지각이나 상상력의 차원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다. 하나는 감각적 직관에 매우 가까운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먼 길인 것이다.
ㆍ가치는 어떤 유형의 발견에 적합했던 관찰과 사고의 양식을 잔존 형태로 오늘날까지 보존해온 데 있는 것이다. 그 발견이란 감성적 표현에 의한 감각계의 이론적인 조직화와 탐색을 바탕으로 자연이 허락해준 발견이다.
ㆍ신화적 사고는 일종의 지적인 손재주인 셈이다.
ㆍ손쉽게 갖고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승부의 원칙이다.
ㆍ신화적 사고의 여러 요소들이 지각과 개념의 중간 지점에 위하는 것이다.
ㆍ개념은 무한한 능력을 갖는 데 비해서 기호는 그렇지 못하다.
ㆍ엔지니어가 우주를 향해 묻고 있는 반면에 손재주꾼은 인간이 만든 제작품의 나머지인 잡동사니들, 즉 문화의 하위 집합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ㆍ기호는 누군가에게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ㆍ외연과 내포는 서로 구별되고 상호보완적인 두 가지 면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존재이다.
ㆍ신화적 창작은 그 내적 구성에 상관없이 항상 동일한 대상을 형성한다.
ㆍ수단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항상 이전에 목적이었던 것이다. 즉 기의가 기표로 변하고 기표가 기의로 변하게 된다.
ㆍ과학적 방법이 환유적 질서 위에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즉 결과를 원인으로 바꾸는 데 반해서 예술의 방법은 은유적이다.
2. 토템적 분류와 논리
ㆍ토템 분류도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문장을 새기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ㆍ원주민의 분류법은 조직적이며 견고한 체계의 이론적 지식에 의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오늘날 동물학과 식물학에서 사용되는 분류법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
ㆍ분류의 원리에서 미리 결정된 공리는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것은 민족지적 조사, 즉 경험에 의해서만 귀납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3. 변환체계
ㆍ자연과 문화 사이에 교환되는 유사점과 상이점은 나아가서는 동물들 사이에 또 인간 사이에 혹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도 유사점과 상이점이 교환된다.
4. 토템과 카스트
ㆍ여성의 교환과 음식물의 교환은 사회집단의 상호결합을 견고하게 하거나 과시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ㆍ카스트가 문화적 이질성을 실제로 발동시키는 데 대하여 토템 집단은 자연적 이질성을 환상으로만 발동시키는 데 그친다.
5. 범주, 원소, 종, 수
ㆍ분류의 모든 수준에는 하나의 공통된 성질이 있다. 고찰 대상 사회가 어느 수준으르 내세운다 해도 그것은 다른 수준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특별히 선택된 수준도 다른 수준과 형식 면에서는 같은 것으로서 그 차이는 일반과 특수, 자연과 문화라는 한 쌍의 대비에 근거하여 작용하는 총괄적 좌표에서 상대적 위치의 차이일 뿐이다.
6. 보편화와 특수화
ㆍ토테미즘을 구성하는 동물체계나 우주론체계 혹은 카스트 등의 분류체계 중 어느 것이 다른 체계에 우선한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ㆍ우리가 추구해온 사고 형태는 한정된 수의 강을 사용하여 현실을 망라하면서도 상호 변환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통합적 사고라는 점이다.
ㆍ고유명사라는 것은 다차원적 체계 속에서 제 위치를 지정해주는 수단이다.
7. 종으로서의 개체
ㆍ새나 개는 인간 사회와의 관련에 있어서 관여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들 동물의 사회생활이 인간을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사회생활이 인간 사회를 닮았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 동물에게 고유의 사회생활은 없지만 인간의 사회생활의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8. 되찾은 시간
ㆍ야생의 사고라는 것은 야만인의 사고도 아니며 미개인이나 원시인의 사고도 아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세련화되었든가 길들여진 사고와는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이다.
ㆍ사물이나 자연 존재는 인간 집단들 사이의 정적 다양성에 대한 정적 모델은 될 수 없으며 질서있게 배치되어 인류의 출현을 준비한다.
ㆍ모든 사회가 역사 속에 있으며 변화하고 있다는 논증을 펴는 것은 재미도 없으며 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명하다.
9. 역사와 변증법
ㆍ변증법적 이성은 순수 직렬성을 놓쳐버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식화를 배제한다.
ㆍ사르트르의 용어로 보자면 나는 초월적 유물론자이며 심미주의자로 정의된다.
ㆍ자아는 타자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도 대립하지 않는다. 인간을 통해서 배운 진리는 세계에 속한다.
ㆍ물리학을 구축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인간을 사회와 분리시켰다. 인간학을 구축한다는 구실하에 사르트르는 자기의 사회를 다른 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다. 순수하고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이고자 하는 코기토가 개인주의와 경험주의 가운데 묻혀서 사회심리학의 막다른 골목으로 잘못 들어가버린 것이다. 사르트르는 사회적 현실의 형태적 조건을 밝히고자 하나 거기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자료로 사용된 상황들이 모두 사회 생활의 이차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회생활의 기반을 설명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
ㆍ인간이 이야기하는 주체로서 타자의 전체화에서 자기의 확실한 경험을 발견할 수 있다면 살아 있는 주체로서 다른 살아있는 존재 가운데에서 같은 경험을 찾아낼 수 있음을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살아 있는 존재란 반드시 인간에 한한 것은 아니다.
ㆍ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분석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한 가설적 추이의 재구성에 불과하다.
ㆍ단순한 역사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항상 그 무엇인가를 위한 역시이다. 역사는 공정하고자 하지만 편파적이기 마련이며 부분적임을 피할 길이 없다. 또한 불안전하며 편향성의 하나의 모습이다.
ㆍ구체의 논리는 '생성'이라는 점토이다. - 괴델의 법칙 (모호한 형상을 빚어 스스로의 논리성을 상기시킨다.)
ㆍ역사의 인식은 길들여진 사고의 일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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