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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by mubnoos 2021.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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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tor Frankl

빅터 프랭클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로고테라피를 가르쳤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고,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3년 동안 다카우와 다른 강제수용소가 있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냈다. 이 때의 경험을『강제수용소를 체험한 한 심리학자』라는 책으로 1946년 출판하였다. 강제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을 자유와 책임 있는 존재로 파악한 독자적인 실존분석을 세우고, 그 치료이론으로서 의미치료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주창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monPWt7VOA 

 

 


Holocaust_Auschwitz Concentration Camp

 

 

 

 

 

프랭클 박사는 로고테라피를 통해, 환자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주고 의욕을 북돋아 주며 그 가치와 책임을 일깨워 주려고 하였다.그리고 환자 자신에게도 특유의 세계관과 생활 양식이 있기 때문에 정신 및 신경성 질환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 변태적인 내면 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면서 환자에게 충고하여 새 삶을 찾도록 하자는 것이 그의 이론이며 로고테라피의 요법인 것이다.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확고한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 프랭클 박사가 스스로 창안한 현대의 '실존적 분석'과 '로고테라피'의 목적이요 추구하는 바다.

 

프랭클의 이론과 치료를 향한 접근은 그의 선구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업적과 견주어 볼 수 있다. 이들 두 의학자는 기본적으로 신경질환의 본질과 치료에 관심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 - 갈등과 무의식의 동기로 인해 일어난 불안에서 우울증의 부조리라는 근원을 찾는다. / 성생활의 욕구불만
프랭클 - 신경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하고, 어떤 신경질환을 환자가 실존에서 찾지 못한 의미와 책임감을 원인으로 한다. / 의미를 찾는 의지의 좌절

 

산다는 것은 고통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삶에 어떠한 목적이라도 있다면 고통과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목적을 이야기해 줄 수 없다. 반드시 각자가 스스로 이것을 찾아내야 할 것이며, 그 대답을 전제로 하는 책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가 찾아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가 온갖 모독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

 

이 이야기는 이름도 없이 기록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시련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극히 내밀한 체험을 털어내기 위해 용기도 필요한 때도 있었다. 이 책을 쓸때 나는 원래 내 수감번호만 쓰고 이름은 익명으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고를 완성했을 때, 익명으로 책을 출판할 경우, 책이 지닌 가치의 반을 잃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신념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기 위해 용기를 가져야 했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장 하나도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첫날 밤에 우리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침상에서 잠을 잤다. 각 층(길이 6.5피트에 폭이 8피트인 곳이다)에 무려 9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닥 위에서 함께 잤다. 9명에게 배당된 담요는 단 두 장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옆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고,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비비면서 잠을 자야 했다. 날이 혹독하게 추웠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는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주게.내가 매일 같이 매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두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번째로 내가 그녀를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 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주게.

 

한 돈많고 권력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다. 주인은 승낙을 했따.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더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걸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 설명도 필요 없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때 어떻게 느꼈는지, 지금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르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나는 죄수번호 119, 104번 이었다.

 

집행유예의 환상 - 사형을 언도받은 죄수가 형 집행 바로 직전에 어쩌면 최수에 순간에 이르러 집행유예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

 

우리들의 머리칼을 깍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몸에 난 털이라는 털은 모조리 깍는 것이었다.

 

샤워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벌거숭이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들은 이제 적나라한 몸뚱아리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심지어는 솜털까지도 남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은 문자 그대로 우리들의 적나라한 실존뿐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삶과 연결될 수 있는 물질로써 무엇이 우리에게 남아 있겠는가?

 

우리는 그토록 가소롭게도 벌거숭이가 된 인생 외에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지금 그 누가 있어서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평범한 정의의 진실성을 우리에게 물어 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적응했는가는 묻지 말아 달라."

 

모든 충격은 자살이라는 행동을 보류케 만드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비정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정상적인 행위다.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시사하는 모멸감이었다.

 

무감동은 필수적인 자기 방위기제가 되었다. 현실은 희미해지고, 모든 노력과 감정은 하나의 과제에 집중되었다. 

 

영양실조는 음식에 전념케 되는 원인이 된다.

 

원시적인 생활과 목숨을 건지겠다는 생각에만 매달리는 노력은 그 목적에 뒷받침이 되지 않는 어떤 일에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상태로 이끌려 가게 되었다. 

 

인간의 구원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영혼의 무기였다. 그리고 유머가 몇 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그 구조상 다른 어떠한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초연함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게 된다.

 

유머 감각을 발달시키고 사물을 유머스럽게 보려고 노력하는 시도는 살아가는 기술을 익히는 동안 배우게 된 일종의 요령이다.

 

강조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대항하여 그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개인으로서 마음과 내면적 자유, 그리고 인격적 가치를 가진 인간의 감정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 자신이 거대한 인간 집단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의 실존은 짐승과 같은 생활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때로는 삶이냐 죽음이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을 반드시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최후의 내적 자유는 상실할 수 없다. 수용소 생활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은 행동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주어진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고통과 죽음이 없는 삶은 완전할 수 없다. 만약 궁극적으로 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고통을 겪는 데도 의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고통이란 운명과 죽음과 같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고통과 죽음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완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인간은 운명에 직면하고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그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마주치게 된다.

 

자기의 잠정적인 실존이 언제 끝날지 짐작할 수 없었던 사람은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을 세워 나갈 수가 없었다.

 

미래의 어떠한 목표도 볼 수 없어서 그 자신의 붕괴를 내버려 둔 사람은 과거를 회고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실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삶이란 치과의사 앞에 앉아 있을 때와 같다. 당신은 언제나 가장 심한 통증이 곧 이어지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통증은 이미 끝나 있을 것이다."

 

진실로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삶에 걸고 있는 기대는 진실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인 것이다.

 

눈물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눈물은 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용기,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과 계속 살아남아야 할 책임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실존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으며, 어떠한 곤경에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굳세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 흘러가 버린 모든 것을 실존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했었다는 것은 일종의 실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확실한 실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선과 악의 혼합물인 인간적 속성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비교하여 볼 때 덜 '회고적'이요, 덜 '내성적'인 수법이다.

 

로고테라피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로고테라피는 환자가 삶의 의미를 똑바로 쳐다보고 순응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

 

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인간 실존의 의미와 더불어 그러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찾아야 하고, 또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독특하다. 그리고 그 혼자서 추구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의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고안하고 그 자신의 본질을 설계한다 - 사르트르

 

로고테라피는 의미의 충족과 가치의 실현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그것을 대신하여 권력에 대한 의지나 황금만능을 추구하려는 의지로 보상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의지가 좌절된 자리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로 채워지기도 한다. 이것이 실존적 좌절이 종종 성적 보상으로 끝나게 되는 이유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질문을 받은 쪽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무엇에, 혹은 누구에게 책임져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선택권은 반드시 환자에게 맡겨야 한다.

 

인간 실존은 본질적으로 자아 실현이라기보다 자아 초월인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이, 주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의미가 없다면 결국은 이곳에 살아 남는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삶의 의미가 그와 같이 우연한 일에 좌우된다면 결국 살 가치가 젼혀 없는 것이 아닐까?"

 

삶의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인 설명으로 이해하려는 자신의 무능함을 견뎌내야 한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닐 뿐이라는 인간의 가르침에 본래부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모두 어떠한 찰나에도 자기의 실존을 바꿀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자유는 최후의 단어가 아니다. 자유는 줄거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진리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결정적 존재이다. 인간은 타고난 재능과 환경의 한정된 테두리 안에서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 자신이 가꾸고 일구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내부에 양면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어느 쪽을 실현하느냐 하는 것은 결정에 의한 것이지 주어진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

 

 

 

 

 

 

 

 



제3부 무의식적인 신

큰 불꽃이 강풍에 더욱 거세어지는 반면 조그만 불꽃은 그로 인해 꺼져 버리는 것처럼 강한 신앙은 곤경과 재난에 의해 더욱 굳건해지는 반면 연약한 믿음은 그로 인해 약화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신을 전체적인 하나로 보고 있다. 원자론적으로 정신을 각기 떨어져 있는 조각을 짜맞춘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충동에 강요받는 존재라는 견지에서 정신분석에 의하여 하나의 우선적인 존재로 설명된다.

 

실존적 본질이 실존의 본질로서 책임감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인간에게 던진 것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해답을 해줌으로써 삶에 대한 대답을 하여야 한다. 응답은 반드시 행동으로 보여주여야 한다. 동시에 지금 여기서도 응답해야 한다.

 

양심은 책임감과 더불어 참된 근원적 현상이며, 결정적인 존재 또는 확고한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가 타고난 불변의 현상이다.

 

윤리적 본능은 생물학적 분능에서 뚜렷이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책임지는 인간 존재를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양심의 초월성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이 어떤 면으로 종교에 강요당하지 않고 오직 신앙을 갖겠다느느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여 종교에 자기 자신을 맡길 때만이 순수하다.

 

종교가 환자에게 매우 확고한 정신요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종교적 의도는 결코 정신요법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의 자유에 근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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