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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시간 / 한강

by mubnoos 2025. 1. 4.

•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겼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씨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고대 희랍어에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 3의 태가 있다는 것. 중간태라고 부르는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 허락받은 담배를 가능한 한 오래 피우는 죄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집 앞 골목에 나가 앉아 긴 오후를 보낼 뿐입니다.

•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름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인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섞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실제로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인가를 배워 깨닫는 일은 글자 그대로 수난을 의미했으니까요. 소크라테스 자신은 생전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그를 지켜본 젊은 플라톤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었을 겁니다.

• 예수님이 금요일에 돌아가셨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