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유리의 균형
<소년이 온다>는 카라멜 먹으면서 읽기에는 불편한 소설이다. 이 책은 달콤한 이야기가 아니다, 씁쓸하고 고통스러운 과거다. 카라멜을 먹다 보면 치아에 눌러붙듯,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불편한 흔적을 남긴다.
나는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났다. 같은 시간,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민간인, 학생,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은 산자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죽은 자를 기억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걸까,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국가란 무엇일까? 토마스 홉스가 국가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국가의 기원과 목적을 설명하려고 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배틀로얄 같은, 끝없는 투쟁 속에서 살아가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를 만든다. 그는 혼란과 폭력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 권력을 성경 속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통제되지 않은 국가 권력이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광주에서 국가 권력은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괴물이 되었다. 이는 홉스가 말한 생명 보호라는 국가의 본질적 목적을 정면으로 배반한 사례다.
소설 속에서 개인의 영혼은 깨지기 쉬운 유리로 비유된다. "우리는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줬다"는 말처럼, 국가의 폭력 앞에서 희생된 시민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음을 증명했다. 자유는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존엄을 걸고 지켜내야 하는 가치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희생된 이들의 영혼은 오늘날에도 국가와 자유의 균형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아닌가? 국가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할까? 개인의 희생 없이 국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개인은 어디까지 희생해야 할까? 칸트가 말한 황금률처럼, 타인에게 피해 되지 않은 그 정도일까? 타인의 피해를 내가 평가할 수 있을까?
국가와 개인의 자유는 상호보완적이면서도 충돌하는 관계다. 다시 말해, 균형의 문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균형의 문제다. 균형의 문제는 양자택일이 불가한 고난이도 주관식 문제다. 왜냐하면 정확한 해답을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도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풀 수 있는 문제일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건 정치인들의 문제일까? 정치인들도 그 균형의 답을 찾아서 항상 싸우는 걸까? 이 균형의 답을 찾을 수 있다면 노벨 평화상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 죽은 자를 기억 하는 것이 산자의 책임이다.
• 이곳에 너는 없었어. 넌 여기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았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이 낯선 덤불숲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 더 무서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어.
• 철창살로 막힌 다섯개의 방들이 부채꼴로 펼쳐져 있었고, 총을 멘 군인들이 중앙에서 우리를 감시했습니다. 처음 방으로 밀어넣어졌을 때는 우리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린 고등학생들도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모두 침묵했습니다. 그 새벽에 겪은 일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한시간여의 그 절망적인 침묵이, 그곳에서 우리가 약간으로서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품위였습니다.
• 모나미 검정 볼펜은, 조사실에 들어가면 변함없이 준비되어 있는 첫 순서였습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일단 분명히 해두려는 것 같았습니다. 내 삶의 어떤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허용되는 건 오직 미칠 듯한 통증, 오줌똥을 지리도록 끔찍한 통증뿐이라는 것을.
•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김진수는 우리 중에서도 특별히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외모가 여성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요,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년쯤 지난 뒤에 들은 이야깁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치겠다면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 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은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거야.
•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일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 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던 지휘관들.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외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납판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력하는 수준을 검토하고 있었다. 집단발포 직전인 5월 21일 오전, 군용 헬기를 타고 와 그 도시의 땅을 밟는 그의 영상을 보았다. 젊은 장군의 태연한 얼굴, 성큼성큼 헬기를 등지고 걸어와 마중 나온 장교와 힘차게 악수를 나눈다.
•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 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능 물질이 수십년간 몸 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와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 소녀의 얼굴이 있다. 열두살의 내가 사진첩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본 그 여자애는 뺨과 목이 총검에 찢긴 채, 비스듬히 한쪽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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