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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by mubnoos 2025. 1. 3.

 

 

중년 선언

일상의 경계 밖에서 낯섦을 선언하다.

 




46세가 됐다. 46억년의 지구의 역사보다 더 황당한 신비다. 내가 아저씨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중년이라는 사실은 최근이 되어서야 발견했다. 중년은 청년과 노년의 중간인가? 생각해보면, 중년도 얼마 안 남았다. 무어의 법칙 같은 이 시간의 속도라면, 늦지 않게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중년이라면 적어도 절반 이상은 산 셈이다. 그 절반 동안 난 소중한 가족을 꾸렸고, 안정적인 직장에 소속되어 있으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중간 치고는 남들하는 건 잘 흉내내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남은 후반전은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 넘버 원 말고 온리 원의 삶이랄까? 

 

 

 

 

 

 


1. 가족: 난 졸혼을 하고 싶다.
2. 직장: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
3. 사회: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1. 가족: 졸혼 하고 싶다.

이혼 말고 졸혼, 제대를 생각하며 열심히 군생활하는 것처럼, 결혼 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한 일종의 목표랄까? 나이 많은 아저씨보다 세상에서 인기 없는 존재가 또 있을까? 그 비인기 존재에 대한 저항의 표현? 지금의 아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일 질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아빠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전 아빠의 행동을 반대로 하면 지금의 아빠들에게 답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다. 소변 볼 때도 앉아야 할지 서서 할지, 설겆이는 식사를 하자마자 해야 하는지, 주말에 소파에 누워서  자도 될까? 가족에서의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개념은 분명히 진화했다. 자연에서 수컷의 주된 역할은 군비경쟁일까? 씨 주고 돈 주고 고장나면 죽는 것이 남자의 삶일까? 내가 고장났을때 가족이 날 지켜줄 수 있을까? 가족이 날 지켜주기 바라기는 할까? 돈 못 벌면 아빠도, 남자도,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닐까? 마치 카프카의 벌레 같이 역할이 없어지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과연 이기적인 것일까? 그렇다면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타적인 것일까? 그걸 인정하면 편할까?

 

각자도생의 시대다. 이렇게 쓰고 나니, 좀 삭막한 느낌이다. 이미 개인주의자가 된 거 같다. 개인은 자기만의 삶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아빠나 남편이 아닌 나로써 호명사회에 존재하고 싶다. 꽤나 개인적이다. 난 홀로 남으신 엄마를 볼 때마다 말한다. "엄마 나 잘 살고 있어. 내 걱정하지 말고 엄마는 엄마 삶 살아, 행복하게." 점점 늙어가시는 엄마는 아직도 중년의 아들 걱정을 하신다. 속상하다. 그런 관점에서 내 딸은 나의 선택을 인정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2. 직장: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

약 150년 전쯤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후의 사람들은 '직장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영화나 역사에서 배우게 되지 않을까? "내가 책에서 봤는데, 옛날에는 말이야. 힘들게 공부해서 회사라는 곳에 가서 정해진 시간 동안 시키는 일을 하고 그만큼 돈을 받았데. 대부분 일하기 싫어 했는데, 재미있는 건 사람들마다 받은 돈의 양이 달랐데. 더 재미있는 건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일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했데. 노예제도랑 직장제도랑 비슷하지 않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던가? 인생은 버팀이라고? 적어도 일이 나의 버팀의 영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일의 목적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기는 한가? 일은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일의 본질은 사회에서 내 자리를 얻고 내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나답게 일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내가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일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바다. 강상중 교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을 통해 제품과 서비스를, 그리고 타인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나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고, 내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고 싶다.  


3. 사회: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내가 나의 끝을 선택하고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움직이실 수도, 말씀 하실 수도 없는 상태로 몇 년을 계셨다. 할머니는 과연 그러길 원하셨을까?  할머니는 평소에 이런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늙으면 죽어야지', '오래 살아서 무엇하랴'. 어쩌면 죽음 보다 이 상황이 더 두렵고 불편하시진 않을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들이 나의 삶을 지연하는 것을 보는 그것은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삶도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무력감,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삶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잔인한 구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다.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살을 의미한다. 우리는 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개인에게 주어진 삶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선택 또한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항상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죽음 또한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삶과 죽음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존엄하게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존엄사가 여의치 않다면, 한니발 장군처럼 치사량의 마약을 벨트에 숨기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택하고 싶을 정도다.

 

 

 

 



니체는 3가지의 삶이 있다고 했다. 첫째, 희생과 복종의 낙타의 삶, 둘째, 반항하며 싸우는 사자의 삶,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어린아이의 삶, 니체는 마지막 어린아이의 삶을 초인이라고 했던가? 어린아이만큼 개인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내가 선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중년이 지나도 그 어린아이의 삶을 살고 싶다. 세상만물이 순수한 호기심의 대상이고 가벼운 마음과 무한한 가능성으로 진정한 자유를 만들어가는, 그 어린아이의 삶을 선언하고 싶다. 

 

 

 

 

 

 


 

 

 

인간 혐오

•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회식이고 행사다. 어렸을 때는 친척들 모이는 명절이 제일 싫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건 별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매사에 일일이 투쟁할 열의까지는 없기에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척 논리를 펴도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선호, 자기가 살아온 방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인간의 성격조차 타고난 요소, 즉 유전자의 영향이 상당하다. 그 바탕 위에 인간관계, 일, 독서 등을 통해 쌓아온 직간접 경험들이 결국 '나'라는 고유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름'은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가능한 한 참아주는 것, 그것이 톨레랑스다. 차이에 대한 용인이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기까지 하겠는가. 그저 큰 피해 없으면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 

 

 


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 나는 그저 이런 생각으로 산다. 가능한 한 남에게 폐나 끼치지 말자. 그런 한도 내에서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 하며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 인생을 즐기되, 이왕이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남에게도 좀 잘해주자. 큰 희생까지는 못하겠고 여력이 있다면 말이다. 굳이 남에게 못되게 굴 필요 있나. 고정되고 획일적인 것보다 변화와 다양성이 좋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선호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다양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껴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가고 싶은 것이 최대의 야심이다. 

 

다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나이를 먹으며 조금 나아지는 것이 있다면 관성의 법칙으로 멈춰 있을 때 조바심 내지 않고 몸을 맡겨 두는 여유가 생겼다는 거다. 몸도 머리도 가볍게 나두면 또 움직일 동력도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것이 목적이고 나머지는 방편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외관이 실질을 좌우하는 시대다. 

 

유전자 전달이라는 목적은 태어남 자체로 이루었으니 인생은 보너스 게임, 산책하러 나온 거다. 

 

인간의 내면에는 강제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밀실이 있다.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에게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핵심 과제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2부 타인의 발견

•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주된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재판 경험에 비춰보면 의외로 '자존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급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찌르는 흉기는 바로 '말'이다. 

 

경영자야말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그 인재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는 조직 내 관료주의의 벽을 부수는 능력, 그리고 더 중요한 능력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능력이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감히 대단한 명답을 제시해 분쟁을 해결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 멍석만 깔아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얻기는 아주 어렵고, 잃기는 아주 쉽다. 오직 진심만이 그 신뢰를 얻는 열쇠일 것이다. 

 



3부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 진실은 불편하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정답 없는 세상

198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정답이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선의를 가지고 헌신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선악과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옳은 가시밭길을 선택하느냐 비겁한 안락함을 선택하느냐의 윤리적 결단만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쉽게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아예 생각하지 않거나 양극단에 서서 자기만 옳다는 독선에 빠져 있게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절망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먼 나라에는 지상낙원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믿는 이들도 있지만 현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모든 사회는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고 나름의 특수성이 있다. 그대로 가져다가 베끼면 되는 정답 같은 건 없다. 이런 시대일수록 집단의 논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건 위험하다. 어느 집단도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남의 판단으로 자기 판단을 대체하지 말고 각 개인이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실사구시 정신이 필요하다. 막연한 믿음보다 실증적 근거를 들어 토론하고 최선이 안 되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전체척으로 핑커의 논지에 동의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낀 부분이 있다. 핑커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이 감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지금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라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건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착각이 바로 인류의 폭력성을 감소시켜온 원동력 아닐까. 통계적으로는 나쁘지 않다며 현존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필로그_우리가 잃은 것들

 

•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