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원 – ‘언니네 이발관’ 보컬리스트
“뭐 그건 잘 모르겠고, 하여간 옥상만 안 쓰면 된다 그래요.”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까짓 옥상 안 쓰면 그만이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나는 그 길로 부동산 사무소로 달려가 계약을 했다. 집주인은 오지 않았지만 등기부 등본은 대출 하나 받은 것 없이 깨끗했고, 어쨌든 서울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여전히 난, 서울을 벗어나게 되면 그 애와 정말로 멀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에. 19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다른 사람과 하는 첫 번째 섹스에서 사람은 아득한 슬픔을 느끼지. 난 삼 년 전에 이별을 했거든. 좋아했어. 정말 많이. 그런데 헤어졌어. 헤어지는 데 이유가 있나? 있다 해도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야. 난 내 몸 위에 포개져 있는 여자의 벗은 몸을 보면서도 그녀와 내가 왜 헤어졌어야 했는가를 생각하고 있었지. 아니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고 할까? 난 궁금했어. 도대체 왜 이런 곳에서 이 낯선 여자와 내가 한 침대에 있는 거지? 왜 넌 날 이렇게 내버려두는 거지?” 56
“고통을 견디는 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그저 견디는 거야. 단, 지금 아무리 괴로워죽을 것 같아도 언젠가 이 모든 게 지나가고 다시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 그거만 저버리지 않으면 돼. 어쩌면 그게 사랑보다 더 중요할지도 몰라.” 64
내가 알 수 있는 건 지난 일 년 반 동안 내가 혼자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는 것뿐이다. 더 이상 누군가의 연락을 목매어 기다리 지도 않고, 혼자서 쇼핑하고, 밥 먹고, 극장에 가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이제 내가 바라던 그런 사람이 된 걸까? 그래서 더는 누군가와 서로의 인생을 포개는 일 같은 건 할 수 없게 된 걸까? 93
나도 알고 있다. 누구든 용휘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그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순가, 내 이성이 중단되고 마음이 닫혀버린다는 걸.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상처투성이로 이 낯선 동네에 처음 이사 왔을 때, 먼저 손 내밀어주었던 게 누구였던가. 그토록 병신 같았던 내 모습을 남들도 다 그런다며 위로해주던 사람은 또 누구였던가. 오직 그만이 아무도 납득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 시간들을 이해해주었고 그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오직 그만이 내가 병신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든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에게서 버림받을 수 있으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얼마든지 나약해질 수 있고 두려움에 떨 수 있다고, 니가 특별히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주었었다. 그리고 그건, 나를 위해 먼 곳에서 날아와 준 친구조차 해주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99
이런 그에게 제롬은 어느 날 ‘실내인간’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실내인간? 실내에만 있으려고 해서?” “아니.” 녀석은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정해놓은 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녀석은 그에 대한 정신과적인 해석도 덧붙였다. 그는 자기가 익숙한 곳, 다시 말해 자신의 능력과 자신감이 최고로 발휘될 수 있는 공간에만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완벽한 자기만의 금을 그어놓고, 행여 벗어나게 되어도 우산을 쓸지언정 바깥에선 온전히 머물려 하지 않는 거라나? “너무 과잉분석 아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난 어쩜 녀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점점 더 이상해져갔기 때문에. 141
“학교 다닐 때 저는 그 흔한 연애 한번 해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늘 고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양질의 영화를 엄선해 보면서 간접경험을 쌓기 위해 노력했죠. 이틀에 한 권씩은 반드시 책을 읽고, 매주 시와 소설을 번갈아 습작하면서 성실하게 글솜씨를 다듬어갔어요. 늘, 제가 접한 책과 영화와 연극들을 날짜에 맞춰 기록하고 제목과 소감을 적어두는 일을 거르지 않았죠. 그렇게 쌓인 대학 노트가 서른 권도 넘습니다.” 184
“넌 진심이 뭐라고 생각하니?” 루카도 아닌 곳에서, 그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니 난 오랜만에 용휘의 제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글쎄요. 뭐 거짓 없는 솔직한 마음?” “그래. 그러면 그 진심은 어떻게 알 수 있지?” “글쎄요. 어떻게 알지? 허허…믿으면 되나.” “맞아. 믿지 않으면 진심도 진실도 없어. 결국 진심이란 건 증명해 보이는 게 아니라 믿어주는 거라고.” 208
“하지만 내가 정말로 행복했던 시절은 내 책이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사라질 줄 모르던 지난 육 년간이 아니라, 내 책들 자체가 서점에 아예 없어 아무런 불안감 없이 이곳을 찾던 날들이었어. 목표가 생기면서 인생이 불행해진 거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용휘는 내게 말했다. “근데 그 목표라는 게 말이야. 목표가 없는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생긴 거거든? 그러니 참 인생이란 게…” 용휘는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몇 번이나 담배를 빼물려다 도로 집어넣길 반복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어떤 게 옳은 건지 나도 모르겠다. 정말.” 229
사랑했던 사람의 냄새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인생에는 간직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삶의 이유가 되어주었던 사람이 떠나간 뒤, 용휘는 매일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하려 애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늦기 전에 이 모든 기억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사적으로 글을 썼고 고대하던 성공을 거두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옥상을 되찾는 것이었다. 죽어 있던 꽃밭을 살려내야 했기 때 문이다. 254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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