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슬로보트
- 도서관 정문 옆에는 무슨 영문인지 닭장이 있고 그 안에서 닭 다섯 마리가 조금 늦은 아침식사인지 조금 이른 점심식사인지를 하는 참이었다. 무척 기분 좋은 날씨였기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에 닭장 옆 보도블록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기로 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내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닭들은 몹시 바쁘게 모이통을 쪼아댔다. 어찌나 조급하게 구는지 그 식사 풍경은 마치 필름 프레임 수가 적은 옛 뉴스영화처럼 보였다. 10
- 나는 닭장 앞에서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웠고, 그런 다음 자전거에 올라타고 도서관과 닭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에게 이름이 없듯이 내 그 기억에는 날짜가 없다. 11
- 작은 균열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시연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나에게 밤바다에 천천히 가라앉는 배를 떠올리게 했다. 23
- 게다가 창고에는 난방장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우리는 싫더라도 종종거리며 움직여야 했다. 이래서야 앵커리지 공항에서 눈 치우는 아르바이트와 별반 다르지 않겠다 싶을 만큼 추웠다. 24
- 그녀는 눈물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고 힘없이 미소 지었다. “됐어. 애초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고.” 그녀가 말하는 장소가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암흑의 우주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이 바윗덩어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내 무릎 위에 놓고 가만이 내 손을 포갰다. 31
- 그때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결혼하고 육 년의 세월이 흘렀다. 육 년 동안 고양이 세 마리의 장례를 치렀다. 희망을 몇 개쯤 불태우고 고통을 몇 개쯤 두툼한 스웨터에 말아 땅속에 묻었다. 모든 일은 이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도시에서 벌어졌다. 34
- 옛날 일만 잔뜩 기억하고 있으니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기억을 저장할 여지는 더 이상 없는 게 아닐까 불안할 정도로 기억이 선명해. 난감한 일이야. 36
- 우리의 도시. 그 풍경은 왠지 내 마음을 지독히 어둡게 만들었다. 도시 생활자가 연중행사를 치르듯 빠져드는 낯익은 것, 탁한 커피젤리 같은 정신의 엷은 어둠 이 다시금 나를 사로자고 있었다. 지저분한 빌딩,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무리, 끊이지 않는 소음, 꼼짝 못하는 자동차의 행렬, 잿빛 하늘, 공간을 가득 메운 광고판, 욕망과 포기와 초조와 흥분. 그곳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고,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수한 동시에 제로였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손에 쥐었지만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은 제로였다. 그것이 도시였다. 나는 문득 그 중국인 여자애의 말을 떠올렸다. “애초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44-45
- 그러니 상실과 붕괴 뒤에 무엇이 오든 나는 이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마치 4번 타자가 몸 쪽 변화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열렬한 혁명가가 교수 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만일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친구여, 중국은 너무도 멀다. 47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 꾸깃꾸깃 뭉쳐서 잔디 위에 내버린 초콜릿 포장지조차 그 7월의 왕국에서는 호수 밑바닥 전설의 수정처럼 자랑스럽게 빛났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상자 안에 또 다른 상자가 들어 있는 것처럼 빛 속에 또 다른 빛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빛 속의 빛은 무수히 많은 고운 꽃가루처럼 보였다. 51
- 하지만 당신도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가난한 아주머니의 모습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어느 책꽃이에나 읽다 말고 오래도록 내버려둔 책 한 권이 있듯이, 어느 옷장에나 거의 팔을 꿰어본 적 없는 셔츠 한 장이 있듯이, 어느 결혼식에나 가난한 아주머니 한 명은 있다. 57
-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 다음은 오래된 텔레비전처럼 죽은 뒤에도 흰빛이 화면에서 치지직 거리다가 어느 날 뚝 사라지는 경우, 이것도 나쁘지 않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인도코끼리의 발자국 같기는 하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죽기 전부터 이미 이름이 사라진 경우, 즉 가난한 아주머니들이다. 58
- 물론 시간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때려눕혀가리라. 마치 길바닥에 쓰러져 죽을 때까지 늙은 말을 후려치는 저 마부처럼. 하지만 그 매질은 몹시 조용해서 자신 이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73
- 나는 책을 덮은 뒤 무릎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오랫동안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손바닥을 그렇게 찬찬히 들여다보는 건 생각해보니 무척 오랜만이었다. 차내등의 부연 불빛 아래서 내 손은 유난히 시커멓고 더러웠다. 영 내 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내 기분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 손은 아무리 보아도 앞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손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옆에서 훌쩍이는 여자아이 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78
뉴욕 탄광의 비극
- 시인은 스물한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는 스물네 살에 죽는다. 그 나이만 넘기면 당분간은 그럭저럭 잘 흘러갈 거라고 우리는 막연히 짐작했었다. 92
- “음악 좋아해?” 그녀가 내게 물었다.
“좋은 세계에서 듣는 좋은 음악이라면.” 나는 말했다.
“좋은 세계에는 좋은 음악 따위 없어.” 그녀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투로 내게 말했다. “좋은 세계의 공기는 진동하지 않거든.” 104
캥거루 통신
-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리지 않습니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
-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 ‘지금도 너를 정말 좋아해.’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그렇게 썼다. ‘장정다감하고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면 넌 괴롭겠지.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을 테니까. 열아홉 살이란 정말 싫은 나이야. 앞으로 몇 년쯤 지나면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몇 년쯤 지난 뒤에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159
- 집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여름날 오후 빛의 홍수 속에서 갑자기 실내로 들어서자 눈꺼풀 안쪽이 따끔따끔했다. 집안에는 물에 갠 듯한 옅은 어둠이 어려 있었다. 몇 십 년 전부터 그곳에 자리잡은 듯한 어둠. 딱히 컴컴하지는 않고 옅은 어둠이었다. 공기는 서늘했다. 에어컨의 서늘함이 아니라 움직이는 공기가 만들어내는 서늘함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와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163
땅속 그녀의 작은 개
- 창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수백 미터 앞쪽 해안선에 작은 초록빛 섬이 보일 테지만 오늘 아침은 그 윤곽조차 찾을 수 없었다. 비가 회색 하늘과 어두 운 바다의 경계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빗속에서 모든 게 흐릿하게 번졌다. 하지만 모든 게 흐릿하게 번져 보이는 것은 내가 안경을 잃어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나 는 눈을 감고 눈두덩위로 안구를 지그시 눌렀다. 오른쪽 눈이 몹시 뻑뻑했다. 잠시 뒤 눈을 떴을 때도 비는 여전히 내렸다. 그리고 초록빛 섬은 그 뒤에 가려져 있었다. 179
- 어떤 경우에 비는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오랫동안 계속 비를 보고 있으면 비 쪽이 현실인지 내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비에는 그런 작용이 있다.
- 해가 완전히 저물고 창문 아래로 어두운 색의 헝겊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구름이 띄엄띄엄 해지고 달빛이 모래사장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비췄다. 먼바다 쪽에서 선박의 노란 불빛 부옇게 번졌다. 세련된 차림새의 남자들은 테이블마다 와인 병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말없이 혼자 생선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생선 머리와 뼈만 남았다. 크림소스를 빵으로 닦아 깨끗이 먹었다. 나이프로 생선 머리와 뼈를 떼어냈다. 그리고 하얗게 빈 접시에 그 머리와 뼈를 나란히 놓았다. 딱히 무슨 의미는 없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윽고 접시가 치워지고 커피가 나왔다. 205
- “정원 한 귀퉁이 황매화나무 옆에. 아버지가 구덩이를 파줬어. 5월 어느 날 밤이었지 그렇게 깊이는 아니고. 70센티미터쯤? 내가 가장 아끼던 스웨터로 개를 감싸서 나무상자에 넣었어. 위스키 상자였나. 그 안에 이것저것 같이 넣어줬어.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랑 사료랑 내 손수건. 항상 갖고 놀던 테니스 공에 내 머리카락 도 넣었어. 그리고 예금통장도.” 213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 꿈속에서 나는 우물물을 긷고 있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올려 큼직한 대야에 부었다. 대야가 가득차자 악어가 다가와 그 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대야가 다시 차자 이번에는 다른 악어가 다가와 그 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mubnoos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도시 이야기 / 찰스 디킨스 (0) | 2021.01.28 |
---|---|
조화로운 삶 / 헬렌 니어링,스콧 니어링 (0) | 2021.01.28 |
실내인간 / 이석원 (0) | 2021.01.28 |
저 사람 왠지 좋다 / 나이토 요시히토 (0) | 2021.01.28 |
도시의 숲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 김진애 (0) | 2021.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