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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말과 사물 / 이규현

by mubnoos 202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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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프롤로그- 공간의 사유

ㆍ푸코는 레비스트로스, 라크 라캉, 롤랑 바르트와 함께 구조주의라는 1960년대 프랑스의 지적 동향을 주도하는 4인방의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는다. 이러한 선풍적인 관심의 주요한 원인은 반인본주의 논쟁인데, 이는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인식 체계가 자리를 잡게 되면 지식의 영역에서 인간의 형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 책의 결론으로 말미암아 촉발된 것이다.

 

ㆍ푸코는 지식의 영역에서 인간을 배제하고 언어를 내세우고자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반인본주의자로 몰아 세울수는 없다. 

 

ㆍ사유가 공간에 의해 결정되고 산출된다. 특정한 시대마다 지식을 결정고 산출하는 에피스테메 개념은 바로 담론의 공간을 가리킨다. 이 개념 역시 하나의 공간인 것이다. 에피스테메는 지식이 생겨나는 공간, 지식의 모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사유를 낳는 공간은 바로 언어라는 직관에 다다른다. 왜냐하면 무릇 사유는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는 언어가 사유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ㆍ인문학의 본령은 무엇일까? 재현된 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사유를 생산하는 것이다. 사유의 생산은 개념의 창출로 증명된다. 

 

ㆍ인문학에서는 설득력이 관건이다. 설득력은 이론이 이론으로 남아 있지 않고 상식으로 합류해 들어놀 때 생긴다. 이론은 상식에 충격을 가해 변화를 추동하지만 결국은 상식이 되어야 널리 받아들어진다. 어려운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외면당한다. 

 

상식에 충격을 주면서도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사유의 생산은 지극히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분리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대체로 치열하게 사유하지 않은 채 상식에 안주하는 경향이 엿보인다. 괴롭지만 사유의 실험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이렇게 해서 도달한 ‘다른 사유’의 공간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의 장소인 상식에 포함되도록 하는 양방향의 노력만이 인문학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균형점에서야 비로소 푸코의 이른바 ‘다르게 사유하기’가 실감 나게 다가올 것이다. 

 

 

 

 



II.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아서

ㆍ현재는 과거의 소산이다. 그렇지만 과거만 들여본다고 해서 현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살펴보는 것도 현재의 관점에서지 과거 자체의 관점에서가 아니다. 현재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현재의 관점에는 현재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ㆍ푸코에게서 바깥의 틈입은 사유의 계기다. 그에게 사유하기는 그가 <쾌락의 활용>에서 권유한 '다르게 사유하기'다. 사유를 촉발하는 바깥은 무엇인가? 언제 우리는 생각하는가? 대개 위험이나 위기가 다가올 때다. 누구나 바라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 사실은 사유의 적이다. 왜냐하면 푸코에게 사유는 곧 다른 사유인데 순응과 안주의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다르게 사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이유가 그다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면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의 다르게 사유하기는 중단된다. 따라서 사유가 다른 사유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사유 자체가 위험한 것일 필요가 있다. 푸코의 말대로 사유가 위험한 행위이려면 바깥으로부터 위험과 위기를 불러들어야 한다. 이 점에서 바깥은 이를테면 혼란이나 무질서의 싹, 질서가 부재하는 혼돈의 공간이다. 

 

미노타우로스의 비밀은 바로 그것이 사유되지 않은 것, 사유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미궁을 뒤집어 미노타우로스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사유되지 않은 것, 사유 불가능한 것이 어떻게 사유되기 시작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무릇 모든 글쓰기는 미궁 뒤집기다. 푸코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말과 사물>도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뒤집힌 미궁이고 <말과 사물>의 해설서 역시 뒤집힌 미궁이 될 것이다. 

 

역사에는 안과 바깥의 교류가 거세게 일어나는 전환기가 있다. 푸코에게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고전주의 시대로, 고전주의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다. 그는 이 대전환 또는 단절에 주의를 집중한다. 이 세 가지 전환기의 소용돌이를 통해 인식의 세계에서 무엇이 빠지고 무엇이 들어오면서 어떤 새로운 사유 방식이 형성되는가를 면밀히 관찰한다. <말과 사물>은 이러한 관찰의 보고서다.

 

 

 

 



III. 고고학의 탄생과 칸트의 그림자

ㆍ오직 이성의 연역 추론에 의거하는 합리론은 감각적인 경험에 의한 지식을 도외시한다. 반면에 감각적 경험에만 의거하는 경험론은 개연적인 지식에만 머무른다. 전자는 객관성이 없어서 공허하고 독단적이며 후자는 필연성과 보편타당성이 없어서 주관적이고 개연적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객관성과 필연성 그리고 보편타당성을 갖는 지식의 토대를 찾아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인식의 형식이 인식의 주체에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ㆍ하이데거의 철학도 존재와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담론이다. 그는 존재에 관해서도 인간에 관해서도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대부분의 말은 존재와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ㆍ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가장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근대철학에 의해 확립된 지식의 인간학주의다. 

 

ㆍ푸코와 칸트 사이에는 사유 방식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 선험적인 것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ㆍ세계가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지식의 세계이다. 지식의 세계도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 시대별 지식의 세계는 시대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시대별 언어의 한계는 곧 지식의 한계이고 시대별 지식의 한계는 곧 언어의 한계다. 시대에 따라 인식의 방법이 다른 것은 인간이 달라서가 아니라 언어가 달라서다. 

 

ㆍ푸코는 생애의 막바지에 이르러 <계몽이란 무엇인기>라는 제목의 글을 두 편 쓴다. 이 제목은 칸트가 받은 설문이기도 하다. 

 

푸코의 고고학은 인식의 가능 조건을 추출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를 위해 푸코는 어떤 방식으로 지식이 출현하게 되는지를 묻는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지식이 출현하는 배경에 질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서 이 질서가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끈질기게 해명하고자 한다. 질서의 경험이 인식 가능성의 토대로 구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푸코의 작업 방식은 칸트의 비판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ㆍ푸코가 말하는 질서는 완전히 객관적이지도 완전히 주고나적이지도 않다. 인식을 구성하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두 차원이 마주침으로써 질서가 존재하게 된다. 질서는 마주침의 장소, 즉 사물을 명명하는 말과 인간이 지각하는 사물 사이의 공간이다. 말과 사물 사이의 공간으로부터 어떤 것이 인식에 주어지고 지식이 떠오른다. 고고학은 이 공간을 탐색하는 활동이다. 

 

 

 

 

 



IV. 에피스테메 개념의 공간

ㆍ푸코의 고고학은 상대주의적이다. 

 

ㆍ각 시대의 과학성을 결정하고 갖가지 지식을 낳는 지식의 인식론적 지형에 푸코는 '에피스테메'라는 독특한 이름을 붙인다. 푸코는 '내가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것은 과학들 사이나 상이한 과학 담론들 사이의 모든 관계 현상이라고 규정한다. 

 

ㆍ에피스테메는 시간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공간 개념처럼 보인다. 

 

 



V. 인문과학의 여백과 출구

ㆍ인간의 죽음은 근대 인간학주의로부터의 탈주지점이자 근대적 지식의 소실점이다. 

 

 



VI. 문학 언어의 경험과 탈(脫)근대적 사유

ㆍ푸코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ㆍ언어는 끊임없이 늘어나면서 역설적으로 사물이나 사건의 침묵 쪽으로 나아간다. 언어의 증식은 사물이나 사건과 일체를 이룰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한이 없다. 언어의 증식은 사물이나 사건의 침묵과 대조를 이룬다. 말이 침묵 속에서 생겨나고는 다시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침묵의 세계는 말이 사물이나 사건인 공간이다. 이를테면 말이 곧 침묵인 절대 언어의 장소이다. 거기에서는 언어와 침묵이 맞닿아 있거나 중첩되어 있다. 그러나 말은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다. 말과 사물 또는 사건은 서로 대립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말해지지만 언어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침묵이 있다. 

 

ㆍ푸코는 사물이나 사건을 언어의 결과나 흔적으로 간주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거꾸로 광기가 작품에 필수 요소일지도 모른다. 광기가 없으면 작품도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성만으로는 예술 작품이 창작될 수 없는 것 같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광기와 작품의 경계 지점에 언어의 경험을 놓는다. 이때의 언어는 언어가 말한다고 할 때의 자율적인 언어다. 푸코가 루셀의 작품들 덕분으로 깨달은 것은 바로 광기와 작품 사이에서 언어의 경험이 매개물로 구실한다는 점이다. 푸코가 즐겨 원용하는 문학은 광기의 경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언어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VII. 에필로그- 안티오이디푸스의 초상

푸코에게 인간은 극복의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일종의 장애물이다. 칸트와는 정반대로 그는 인간의 바깥에서 인식의 선험적 여건을 모색한다. 이 선험적 여건이 바로 에피스테메다. 이 개념은 지식의 지형 또는 언어의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이것을 플라톤의 코라 개념과 관련지을 여지는 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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