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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란 무엇인가 / 마틴 반 크레벨드

by mubnoos 2022.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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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무엇이 문제인가

ㆍ양심은 도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은 선과 악을 구별해 볼 줄 아는 능력이다. 양심은 오히려 인간 영혼을 이루는 부분, 타고난 것이든 습득된 것이든 영혼의 부분이다.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도덕을 바탕으로 우리를 처신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악하고 선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이미 저질렀을 때 우리가 죄의식을 느끼고 회환에 빠지고 후회하게 만드는 것도 양심이다. 

 

ㆍ양심의 정의의 네 가지 전제

1) 자아를 개별적인 실체로 이해하는 것

2) 자아가 생활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앎

3)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

 

ㆍ양심의 문제에서만큼은 표현과 실제 내용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 

 

 

 

 

 

 

 



1장 양심의 근원과 본성을 찾아서

 

 


구약과 유대교에서의 양심

ㆍ양심이야말로 인간을 야수와 구분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아닌가?

 

ㆍ최악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고 또 스스로 행하는 일의 많은 것이 불합리하거나 심지어 모순된다는 점이다. 

 

ㆍ신정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 명령의 목적은 정확히 사악함이 인간의 심장을 파고들어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명령은 일종의 댐으로 비유되어왔는데, 항상 홍수로 범람할 위험이 있으며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져야만 한다. 이런 모든 측면은 개인이 자율적인 양심을 키울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ㆍ순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계명을 경청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양심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호메로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ㆍ고대 그리스의 선과 악은 유대교와 나중의 기독교에서처럼 신이 확정해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가려보기 위해 사과를 먹고 눈을 뜰 필요가 없었으며, 선과 악을 분리하는 방법을 말해주는 하늘이 정한 율법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 대신 귀족계급은 선과 악을 자신을 위해 창조해냈다. 이런 창조를 통해서만 그들이 인간다움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전에도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이를 풀어내려 분투하려는 인간다움은 존재했다. 이런 도식에서 볼 때 '좋음'은 탁월함, 용기를 포함해 지배하려는 욕망, 타인보다 더 강해져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신체적 기량과 같다. '나쁨'은 비겁함이며 '좋음'을 포기하게 하고, 보다 더 중요한 측면에서 보자면, 그래야 마땅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비열한 태도다. 니체에 따르면, 이처럼 인간다움을 세우기 위해 선과 악을 구분하는 태도는 '노예의 도덕'과 양심으로 타락하지 않은 건강한 정신의 표시다. 

 

ㆍ모든 사실로 미루어볼 때 양심을 둘러싼 관념들이 알려진 것은 몇몇 지신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상당수의 대중이 이런 논리를 이해했으며,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스토아학파

ㆍ그리스의 고대와 고전기 내내 양심이라는 개념은 명예, 정의, 법은 물론이고 보상과 처벌이라는 문제 - 인간의 영역이든 신의 영역이든 - 와 초기에 맞물렸던 성격으로부터 전혀 풀려나지 못했다.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은 그저 드물게만 양심과 맞물렸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을 지나면서부터 양심의 이런 성격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어느 모로 보나 스토아철학의 출현과 관련해 나타났다. 

 

ㆍ스토아학파는 두 가지 폭넓은 발전, 곧 종교와 정치의 발전과 맞물린다. 종교의 변화는 사람들이 의인화한 신, 곧 인간 형상을 한 신의 존재를 더는 믿지 않게 된 것이다.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아테나, 아폴론 등 그리스의 신들은 더는 세상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았다. 세계를 창조하는 신들의 위치는 부동의 원동자, 영원성,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매일 일어나는 사건은 운의 몫이 되었다. 신의 보상을 희망하며 응징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종교 의례, 기도, 제물, 서약 등이 유용하다고 여겼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올바르지만 협소한 길을 걷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도 필요했다. 두 번째 발전, 곧 정치의 발전은 독립 도시국가의 몰락이며, 폭군이 다스리는 강력한 왕조의 부상이다. 이런 지배자들은 신적은 혹은 반신적인 지위를 주장하면서 대개 자의적이며 변덕스러운 태도를 과시하고 그 권력으로 글자 그대로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으며, 이런 권력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양심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는 ‘콘스시엔티아conscientia’이다. 그리스어 동의어와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자기 자신을 ‘앎’이다. 이 단어는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와 특히 철학자 세네카가 자주 썼다. 세네카의 저작에는 50번 정도 이 단어가 등장한다. 키케로와 세네카는 모두 스토아철학 성향을 가진 스승 아래서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콘스시엔티아는 개인 행위의 길라잡이 혹은 판관이다. 콘스시엔티아는 그가 저지른 일의 결과에 대해 비난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세네카는 이런 말을 했다. “콘스시엔티아는 인간 내면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앎과 달리 콘스시엔티아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관련해 개인 내면에 숨겨진 앎이다. 신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 인간은 자연과 합치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런 인생은 무엇보다도 조화로워야 한다고 세네카는 덧붙인다. 앞만 보고 황급히 달리기만 하는 인생은 결코 질서를 세울 수 없다.

 

ㆍ개인주의와 무력감의 결합이야말로 처음에는 시네이데시스, 나중에는 콘스시엔티아를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이런 개념을 자신들의 철학의 기둥으로 삼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초기에 품었던 종교적 특성을 떨쳐버리고, 헥토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표현했던 욕구, 곧 자기 자신만 아는 굴욕은 참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의 굴욕만큼은 피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 명확한 거리를 두었다. 

 

 

 

 

 

 



2장 기독교의 세기들

 

 


바울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ㆍ실질적으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말의 뿌리는 사도 바울이다. 바울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형이상학과 사후의 삶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핵심 내용은 인격적인 신이 존재하며, 말씀과 기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으며, 우리 인간이 매일매일 겪는 일에 항상 깊숙이 관여하면서, 올바른 일을 하는 자에게는 상을,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는 벌을, 현세에서든 내세에서든 내린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바꿔 말해서 인간은 잉태된 순간부터 죄를 지었다. 이 원죄는 자연과 이성을 따르며 훌륭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씻어진다. 

 

ㆍ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심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정의를 시도한다. 세네카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심을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열쇠라 부른다. 펠릭스에게 화답하고 싶었던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심이 유일하게 중요한 증인, 곧 외부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항상 인간의 내면을 지켜보는 증인이라고 말했다. 양심은 경솔한 판단,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비방, 잘못된 의심과 같은 죄를, 바꾸어 말하면 보통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죄를 범하지 ㅇ낳게 막아주는 일종의 장치다. 이런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싸움은 결정적 승리로 매듭지어지는 일회적인 행동일 수 없다. 이 싸움은 인생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을 통해 지속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양심을 인간 안의 신의 자리라 부른다는 점이다.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행운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았던 스토아학파에게 콘스시엔티아는 궁극적으로 이성의 산물이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든 기독교든 그 이전의 어떤 사상가보다도 더욱 양심과 종교적 믿음 사이의 연관을 강조한다. 그는 보는 양심은 신의 목소리, 인간의 모든 영혼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영혼 안에서 작용하면서 양심은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며, 물론 이런 구분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결정적으로 새롭게 기여한 부분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양심과 신의 목소리가 일치한다고 본 점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쓰자면 '나의 부끄러운 잘못을 똑바로 보고 이를 증오하는 것'이 양심이다. 

 

ㆍ기독교의 그 모태였던 두 가지 체계, 곧 기독교가 기원을 둔 유대교와 기독교가 참조한 스토아철학과의 단절이 기독교의 필요에 맞게 완성되었다. 새로운 종교를 창안하고 발전시키는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한 양심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앙 시대의 양심 

ㆍ서구의 역사에서 중세에 종교가 문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만큼은 틀림없다.

 

ㆍ기독교는 성숙해져 세상에 전파되어갈수록 기성사회에 맞선 저항이라는 성격을 벗어나 사회의 결속을 다지고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 실제로 가장 중요한 도구로 변모했다. 

 

ㆍ사제는 신도들이 원칙적으로 행위에 근거해 죄 사함을 얻도록 돕는 데 최선을 다하는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 아무튼 이런 염려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일련의 관례는 본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나 결국 목적으로 바뀌어,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일이라고 니체는 말했으리라.

 

 

 

 

 

 

루터와 그 이후

ㆍ루터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에, 물론 항상 주의를 기울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골몰하게 만들었다. 양심을 강조함으로써 루터는 구원의 꼭 필요한 도구, 또 많은 카톨릭 신도의 눈에는 충분한 도구인 성례를 무시할 수 있었다. 

 

ㆍ인간이 실제로 양심을 가졌다는 증명으로서 고해성사만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해는 형식적 의무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로 바뀌었다. 고백자가 엄격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거나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요구 역시 생략되었다. 모든 사소한 것까지 꼬치꼬치 고백하라는 요구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오만의 표시다. 인간은 자신이 고백해야 마땅하다고 보는 만큼,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고백해야 한다. 나머지는 신과 신의 은총에 맡겨야 한다. 

 

ㆍ루터는 고해의 부담을 덜어주기는 했지만, 개신교를 양심의 종교로 만들었다. 

 

가톨릭교회는 양심의 자유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런 입장을 고수한다. 양심을 중시한 개신교는 달랐다. 개신교는 양심을 교회―이론상으로 종파가 무엇이든 모든 교회―와 사제가 차지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과 대단히 흡사하게 개신교는 몇몇 학자가 이성과 결합하려 했던 양심을 자유롭게 떼어놓았다. 그 대신 개신교는 양심을 은총의 전제조건에서 오히려 은총의 결과로 바꾸었다. 무엇보다도 개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짓눌러온 미신과 의례의 낡은 잔재에 묻혀 있던 양심을 해방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양심은 도덕적 올바름의 궁극적인 보증으로, 인간이 저마다 자신의 내면에 가지는 것이 되었다. 대소사를 막론하고 양심은 우리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준다. 사도 바울의 시대 이후 이보다 더 강하게 양심이 주장된 적은 없었다. 양심을 가지면서 치러야 하는 대가는 끊임없는 “불안, 참회, 두려움”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가책”이다. 개신교에 반대하는 쪽은, 지금도 여전한데, 그처럼 양심을 강조하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이며 인간을 자기 파괴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ㆍ양심을 활용한 결과물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효과적인 사회 통제 방법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렇다.

 

 

 

 

 

 

 



3장 마키아벨리에서 니체까지

 


거대한 분열

군주의 권력남용과 그에게 노출된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는 일을 막아줄 유일한 것은 양심이다. 마르티누스 브라카렌시스는 군주야말로 네 가지 가장 중요한 덕목, 즉 신중함과 너그러움과 일관성과 정의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루스는 순수함, 겸손함, 온건함, 친절함, 자비로움과 언제라도 악에 선함으로 답하는 자세를 덧붙인다. 무릇 군주는 선하고 도덕적인 삶을 이끌 수 있어야 하며, 신의를 지키고 매사에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정의롭고 진실하며 인내심이 많고 너그러우면서 헌신할 줄 알며, 먹고 마시며 옷을 입는 일에 지나침이 없으며 올곧은 예절과 도덕으로 되도록 겸손하며 상냥하고 구호를 베푸는 손길에 아낌이 없어야 한다. 군주는 참을성과 진실함 그리고 배움을 사랑하고 악한 생각을 멀리하는 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갖추는 일은 앞서 열거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주변에 두고 조언을 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군주는 쉽사리 부패한다. 거듭 확인하지만 이런 생각에서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은 구분되지 않는다.

 

ㆍ마키아벨리가 아주 명쾌한 태도를 보이는 이 정치라는 분야에서 양심은 자멸을 부를 정도로 치명적이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군주는 마키아벨리보다 앞선 많은 학자들이 믿었듯, 혹은 믿는 척했든, 양심이 이끄는 대로 따를 수 없다. 실제로 정치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양심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따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다. 마키아벨리가 사용한 이 핵심 개념은 군주 자신의 권력은 물론이고 그가 책임져야 하는 정치조직체읭 권력을 유지하고, 가능하면 확장해야 하는 필요를 뜻한다. 

 

ㆍ홉스와 스피노자는 질서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이성의 명령을 따를 때 목표를 더 잘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각오가 있었다. 바꿔 말하면 권력 정치라는 냉혹한 세계에서 국가 이성이란 곧 윤리였다. 

 

ㆍ헤겔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인격적인 신을 더는 믿지 않게 되었다. 지성 발달의 오랜 흐름을 따라 헤겔은 신을 인격적 요소를 가지지 않는 세계역사의 정신, 곧 '세계정신'으로 대체했다. 헤겔 자신은 이 세계정신을 섬기는 최고 제사장이다. 세계정신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다.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바로 이성의 구현이다. 이 이성은 그 드러남이 종종 잔인하고 복잡하며 난해해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진리다. 둘째, 이성은 끊임없이 인류를 미래의 완전한 사회로 이끈다. 모든 모순이 해결되고 일종의 세속적 낙원으로 회복된 것이 이 완전한 사회다. 

 

ㆍ역사는 보다 더 완벽해지는 쪽으로 나아가는 미리 정해진 길을 따른다. 그러나 세계정신은 개인을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개인은 생물학적으로 모든 유전적 취약성을 가지는 연약한 존재다. 개인은 대개 오로지 자신의 호불호 또는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가진다. 심지어 이런 협소한 영역에서조차 개인의 생각과 행동은 실수로 얼룩진다. 다음으로 법 없이는 질서 있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기에 개인은 법의 적용을 받는 대상으로서 온전한 자아를 실현할 능력이 필연적으로 제한된다. 개인들이 이루는 많은 종류의 조직, 그리고 이런 조직들의 행위와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느 시민사회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ㆍ인간의 모든 조직, 또는 헤겔이 공동체라 부른 것 가운데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완벽함을 실현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것은 국가다. 국가는 주권 덕분에 최상위의 공동체다. 이런 특징은 국가에게 그 본래의 가능성을 실현할 잠재력, 무오류의 세계정신이 국가에게 요구하는 잠재력을 부여한다. 국가는 의식적으로는 이런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한다. 모든 국가는 오로지 국익을 추구할 뿐이다. 

 

 

 

 

 

신의 죽음

ㆍ기독교 세기를 거치는 동안 양심과 종교는 손에 손을 맞잡고 행진했다. 인쇄술이 출현하면서 논의는 그 저변을 넓혀나가며 종교개혁의 심장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문제를 다루는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접근방식이었다. 루터와 헤겔이 저마다의 방식을 보여주었듯, 논의는 강제적 성격과 자유와 양심을 하나의 단일한 복합체로 묶어낼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ㆍ마키아벨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칼뱅이다. 활동하는 내내 칼뱅은 양심의 가책으로 도덕을 진작하고, 도덕으로는 선택받은 계층이 좋은 정치를 펼치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칼뱅은 평생에 걸쳐 부단히, 무엇보다도 올곧은 회개를 요구했다. 그의 양심에 바탕이 된 것은 모든 것을 굽어보는 전능한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신이었다. 신의 뜻을 거스른 죄인은 신속하고도 무서운 처벌을 받는다. 질병, 사고, 가뭄과 같은 자연현상은 모두 이런 식으로 해석되었다. 칼뱅주의는 유대교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예외가 있다면, 유대교는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훨씬 더 중요하게 강조하면서, 이에 따른 행동규칙을 대단히 세세하게 규정했다는 점이다. 

 

ㆍ종교 그리고 종교의 한 부분인 양심이 쇠퇴한 원인 중 하나는 '과학혁명'의 일환으로 등장한 기계적 세계관이다. 기계적 세계관을 만들어낸 인물의 면면은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리고 특히 아이작 뉴턴이다. 

 

ㆍ루소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양심이다.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깊숙한 곳에는 정의와 덕성이라는 타고난 원칙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 좌우명이 있음에도 이 원칙에 따라 우리 자신의 행동과 다른 사람의 그것을 좋은지 나쁜지 판단한다. 이 원칙을 나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루소는 양심이 자연을 근원으로 하는지, 이 경우 최소한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일종의 잠재력인지, 아니면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상 또는 대가로 주어지는 논리로 발전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ㆍ인간은 누구나 양심을 가지며, 이 내면의 심판관에게 관찰당하며 위협받지만, 이 심판관을 일반적으로 경외한다. 그리고 인간 안에서 법칙을 관장하는 강제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질로 타고난 것이다. 양심은 인간이 도망가려 생각하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인간은 쾌락과 도락으로 정신을 흐리게 만들거나 잠을 잘 수는 있지마, 양심의 무서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언제라도 깨어나는 통에 양심을 피할 수는 없다. 인간은 극심한 타락에 빠져 더 이상 자신을 회복하지 못할지라도, 양심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다. - 칸트

 

ㆍ신앙이 돈독했던 루터와 달리, 또 본성, 인간의 타고난 선함에 호소한 루소와도 달리, 칸트는 양심의 근거를 이성에서, 달리말하면 논리로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양심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일종의 자기 규제 원리다. "오로지 네가 원하는 것이 동시에 보편법칙이 될 수 있는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라. (정언명령)" 이런 논리에는 신적인 본능이나 은혜로운 신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선과 악이라는 표현도 없다. 그 대신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은 질서 있는 사회가 존재하며 번영하도록 하는 개인행동의 규제다. 

 

ㆍ칸트는 실제로 정언명법을 따르는 것이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을지라도, 어쨌거나 내면의 평화 그리고 물론 외부의 평화를 빚어주어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게 해줄 거라고 인정했다. 아무튼 칸트의 정연한 논리는 정언명법을 따라야 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정언명법이 공동체와 동료 시민에게 지켜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숭고하고 강력한 것으로 묘사된 의무는 매혹적이지 않고, 은근히 암시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양심의 의무는 굴복을 요구하며, 양심의 면전에서 모든 변명은 어리석다. 

 

ㆍ정언명법은 무엇보다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이 양심은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법을 대체하지 못한다. 또는 루터의 경우처럼 법에 대항하지도 않는다. 이 양심은 개인과 보편의지의 결합이 완벽해서 법이 필요없어지는 루소의 이상적 공동체 안에서처럼 없어지지도 않는다. 

 

 

 

 

 

 

하늘을 향해 포문을 열다

ㆍ니체는 인생이 본질적으로 무질서해서 틀에 가두고 이끌고 통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객관적인 진리 자체가 존재한다는 확신은 착각이라며 니체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았다. 기존 철학에 의문을 던지고 그 가식을 비웃고 그 핵심 내용을 철저히 깨부수거나 패러디했다. 문제를 자유자재로 뒤섞어가며 니체는 자신의 글 대부분을 직설적인 산문이 아니라 아포리즘, 격언, 비유, 풍자, 짧은 스케치 그리고 심지어 시로 꾸몄다. 

 

ㆍ르상티망: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를 이르는 심리학 용어

 

ㆍ내 안의 약한 부분은 강한 부분이 하려는 일, 내가 실제로 원하는 일을 방해한다. 그 결과는 시기와 분노가 뒤섞인 병든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도덕이라는 내면의 벽을 쌓고 내가 왜 저 일을 하지 않는지 설명하는 구실로 채택한다. 그런 다음 나는 이 장벽이 강한 부분도 둘러싸도록 확장한다. 

 

ㆍ양심의 뒤를 바짝 따라붙는 것은 죄악, 죄책감, 회한, 연민, 관용, 자기부정 그리고 자학이다. 연민과 관용을 두고 니체는 이를 받는 사람에게 굴욕감을 안기며, 중간에서 전달하는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말한다. 양심의 뒤에 공허한 의례, 어리석은 미신, 그리고 수치스러운 관습도 따른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위에서 아래로 향해 하향식으로 건설된 고전 문명은 이런 감정들을 무력감의 표시로 보았으며, 무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경명했다. 

 

ㆍ모든 것 가운데 최악은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고 위험을 감수한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이리라. 예수 자신이 이런 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생각은 거의 예외를 찾아볼 수 ㅇ벗을 정도로 모든 기독교 교파가 받아들였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지. 우리가 그를 죽였어. 너희와 내가. 우리는 모두 그를 죽인 살인자야.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이런 짓을 했지 어떻게 우리가 바다를 통째로 마셔버릴 수 있지? 누가 우리에게 수평선 전체를 지워버릴 스펀지를 주었어?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지구와 태양이 떨어진 거야? 이제 지구는 어디로 가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모든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는 게 아닐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아직도 위와 아래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무한한 없음 속에 헤매는 게 아닐까? 공허한 공간의 숨결을 느끼는 게 아닐까? 좀 더 추워진 것 같지 않아?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가 어떻게 위로를 얻지? 세계가 가졌던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것이 우리의 칼 아래 피를 흘리는 구나. 누가 우리에게 묻은 피를 닦아주지? 어떤 물로 우리 자신을 깨끗이 씻을까? 어떤 속죄의 축제를, 무슨 성스러운 놀이를 우리는 만들어내야 할까? 신을 죽인 행위의 위대함은 우리에게 너무 위대한 것이 아닐까? 이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자신이 신이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즐거운 학문>, 니체

 

 

 

인류의 삶의 지침이 되어줄 새로운 나침반을 필요로 한다. 무엇이 이 나침반일까? 

 

헤겔에게는 이 나침판은 국가이며,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국가에 봉사할 의무다. 심지어 이 의무가 전쟁이라 불리는 피의 아수라장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뜻할지라도 감당해야만 한다. 니체는 이런 해결책을 단호히 거부한다. 국가가 이상을, 더욱이 윤리적 이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간단한 진리가 아니다. 현실에서 국가는 모든 냉혹한 괴물 가운데 가장 냉혹한 것이다. 

 

루소가 인생의 나침반으로 제시한 답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더욱 끌어올리는 교육이다. 니체는 루소 사상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가진 것 없는 하층민으로 여겼다. 인간은 적절한 교육만 받으면 훌륭해질 수 있다는 루소의 견해를 니체는 강하게 부정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며 온화하다는 생각은 감상적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사실 원숭이에서 시작한 인간은 그 어떤 원숭이보다 좀 더 나은 원숭이일 뿐이다. 당시 찰스 다윈이 보여주었던 자연은 더할 수 없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기반으로 했다. 니체에게, 그와 같은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번식과 적응으로 이뤄지는 생존경쟁은 곧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권력투쟁이었을 따름이다. 

 

헤겔과 루소를 상대한 뒤에 니체는 양심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인 칸트를 겨냥한다. 모든 본질적 측면에서 칸트는 자신이 성장한 기독교 도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니체는 질타한다. 칸트가 세운, 또는 세우려 시도한 모든 것은 구태의연한 기독교 도덕의 틀에 새로운 기초를 다지려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초는 대체하고자 하는 옛 기초에 비해 더 확실하지 않다. 니체는 이렇게 썼다. '칸트는 자연과 역사가 실증하는 도덕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도덕을 믿었다.' 정언명법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인 천성에 겨눈 단검의 다른 이름이다. 더욱 나쁜 점은 정언명법이 경탄해 마땅한 전능한 신이나, 심지어 신을 지어내고 신에게 봉사하라고 주장하면서 자기 잇속이나 챙기며 거짓말을 일삼는 성직자들이 제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4장 신 없는 세상

 

 

프로이트와 양심 콤플렉스

ㆍ프로이트는 어렸을 적 시아이 니체였다고 털어놓았다. 1900년 프로이트는 니체의 책을 모두 구입했다. 니체와 프로이트를 직접 이어주는 고리는 러시아 출신의 지적인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라는 구체적인 인물로 존재한다. 1880년대에 살로메는 니체와 친구로 지냈는데, 그녀의 지성에 경탄한 니체는 언젠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나중에 살로메는 프로이트를 알게 되어 그가 수요일 저녁마다 개최하는 모임에 참석해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결국 그녀 자신이 정신분석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ㆍ"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나는 신이 없는 상태를 견뎌야만 할까?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니체

 

ㆍ니체는 종교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이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거부한다. 프로이트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종교 진리의 과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종교를 거부함에 있어 가지는 공통점은 종교와 양심 사이의 그 어떤 연결고리도 끊는다는 점이다.

 

ㆍ니체와 프로이트가 공유하는 또 다른 전제는, 칸트와 홉스 그리고 스토아학파가 무어라 말했든 간에,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그 본성이 영원히 똑같은 것으로 남은 몇 가지 충동이라는 것이다. 야성이며 통제할 수 없고 종종 갈등을 일으키는 충동은 인간의 영혼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생물의 본성이다. 

 

ㆍ프로이트의 상담실이 특히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유는 예전에는 금기시되었던 문제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기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섹스 문제였다. 

 

ㆍ양심이라는 관념은 성공적으로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졌지만, 곧 자발성은 종말을 맞았다. 인간의 양심을 죄의 부담으로부터 풀어주려는 노력이 조직이라는 틀, 사람과 의제와 규제와 여러 격식으로 이루어진 틀을 낳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의 양심

ㆍ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문화의 많은 부분을 빌려왔다. 유교, 불교, 도교 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종교 가운데 어떤 것에도 인격적인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ㆍ부끄러움을 중시하는 문화는 죄책감에 바탕을 둔 문화가 죄의식의 내면화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착한 행실을 보는 외부의 공개적인 인정에 의존한다. 부끄러움은 다른 사람의 비난에 보이는 반응이다. 

 

ㆍ일본의 윤리에서는,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주변의 기대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 노선을 잡으며, 집단의 기대를 우선시하고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낮추는 사람이 존경을 받느낟. 부끄러움을 알고 끝없이 신중할 줄 알아야 훌륭한 인간이다. 이런 사람은 가족과 부락과 국가에 명예를 가져다준다. 

 

ㆍ일본에서 사과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다는 혐의를 받아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게 만든 데 대해 하는 것이라고 한다. 

 

ㆍ양심은 일본 문화의 기본 요소입니다. 양심은 내면의 도덕적 확신과 사회적 의무 사이의 긴장으로 키워집니다. 때때로 이 긴장은 풀릴 수 없는 것이어서 이로부터 풀려날 방법은 자살이나 절간에 들어가 은둔을 하는 겁니다. 양심은 특히 의무와 내면의 확신을 강조하는 무사 계급에서 강합니다. 

 

 

 

 

 

 

 

중국에서의 양심

ㆍ공산주의와 현대 자본주의를 겪으며 피폐해진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해 유교문화는 인간관계의 이상적 모범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가장 강력한 관계는 왕과 신하의 군신관계이며, 이후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 남편과 아내의 부부관계,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 친구 간의 관계가 따른다. 관계의 이런 목록은 원전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다섯 관계의 어느 것도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친구 사이에서도 연장자가 중시된다. 이런 모든 관계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비대칭적이다. 

 

ㆍ가족 바깥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표준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공동체 안에서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유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해주는 특징, 또는 공자 사상을 동양이나 서양의 다른 철학과 구분해주는 특징인 이런 상대주의는 흔히 역할 윤리로 알려져 있다. 

 

 

 

 

 

 

 



5장 제3제국의 양심

 


명령한 자

ㆍ"나는 누군가에게 충분히 공정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 아돌프 히틀러

 

 

 

 

명령을 실행한 자

ㆍ우리는 양심과 의무 사이의 연관이 특히 강력한 나라가 독일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연관의 뿌리는 칸트,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루터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이 잔혹한 행위를 보며 처음 떠올리듯 살인자는 양심이 없을까? 아니면 군인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감정, 최소한 몇몇 군인은 가졌을 수 있는 개인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양심, 물론 특수한 종류의 양심이 아닐까?

 

ㆍ분명 양심의 가책은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남는 일에만 매달려야 하는 이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힘을 주지 못했다. 

 

ㆍ때때로 양심은 우리의 모든 상식을 비틀어버리고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양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무라 믿는 것을 하게 만든다. 특히 초기에 상당한 정도의 불편함을 안겨주어도 사람들은 이런 의무감을 저버리지 않는다. 

 

ㆍ양심이 오해되고 잘못 해석될 때, 오히려 인간을 지금껏 존재한 또는 앞으로 존재할지 모를 그 어떤 짐승보다 더 나쁜 괴물로 바꿔버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사와 재판을 받는 동안 대원들은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 일쑤였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을 상대로 열린 재판과 마찬가지로, 유감이나 후회를 말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살에 가졌던 거부감은 그게 무엇이든 주로 물리적 혐오 탓에 생겨난 것이지 도덕적 원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양심을 끝내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양심을 입에 올리는 것이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명령에 저항한 자

ㆍ결국 양심을 두고 우리가 진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옳고 그름의 구분을 기초로 하는 행동,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옳은 일을 하는 행동이야말로 양심적이라는 확인일 뿐이다. 

 

 

 

 

 



6장 옛 우상과 새로운 우상

 

 

양심과 인권

ㆍ퀘이커교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ㆍ미국이든 유럽이든 군 면제는 권리가 아니라 특권의 문제였다. 

 

ㆍ톨스토이가 썼듯,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일단 성직자에게, 그 다음으로는 의사에게 보내졌으며, 다양한 형사처분 기관을 거쳐 결국에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ㆍ1997년 테헤란에서 당시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세계 곳곳의 청중을 상대로 '인권은 이성의 요구이며 양심의 명령이다'라고 연설했다. '인권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 원칙으로 우리는 인간 존엄성을 위한 거룩한 집을 짓는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몇몇 국가는 이 협약에 서명을 거부했다. 서명을 한 국가 가운데도 너무 많은 유보 조항을 달아 서명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거나, 아예 입에 발린 말로만 지지하며 서명한 나라가 적지 않다. 태도를 바꿀 의도가 전혀 없이 서명한 나라도 상당히 많다. 

 

ㆍ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 곧 양심에 자극을 주려는 시도의 대부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양심과 건강

ㆍ경제를 진작시키는 주된 방법 가운데 하나는 '건강한 삶'이다. 

 

ㆍ제재의 도입은 양심과 법 사이의 경계가 엇갈리면서 흐려졌음을 뜻한다. 공공보건의 개선을 목적으로 의학을 통제하려는 입법은 거의 모든 현대 국가에 널리 퍼녔다. 이미 몇몇 정부는 일부 유형의 대중적 식품, 이를테면 버터, 감자칩, 설탕, 아이스크림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주지하듯 이런 일의 대부분은 그저 금고를 채우려는 문제일 뿐이다. 모든 건강식품이 가지는 한 가지 공통점은 그것이 일반 식품에 비해 훨씬 비싸다는 점이다. 또 다른 목표는 질병에 걸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켜 피해를 주는 것을 막는 일이다. 

 

ㆍ권리가 의무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에서 역설적이게도 정점에 이른 건강 양심은 모든 권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곧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고 죽을 권리의 인정을 거부한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일이다. 

 

 

 

 

양심과 환경

 

ㆍ실질적으로 초기부터 모든 형태의 환경운동이 갖는 공통점은 운동의 지지자들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ㆍ환경윤리를 다룬 수많은 책들이 양심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판단할 때, 이미 양심이 묻혀버리고 말았다고 믿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7장 기술 시대 양심의 자리

인간을 다른 동물과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 기대어 기독교 신학자들이 1500년 동안 주장한 대로 불멸의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 곧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결과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간 심리의 자기보존 능력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서로 주고받는 호혜의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한다. 호혜성은 필요하다면 보상의 약속과 처벌의 위협으로 인간이 되도록 서로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각자 자기보존을 하는 도덕성의 유일한 기초이다. 이런 도덕성으로 비로소 질서 있는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홉스의 양심 이해로 직접 이끈다. 양심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내면의 진실’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그저 이름일 뿐이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새로운 의견에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 그것이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완고하게 옳다고 고집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이 새로운 의견을 부르는 이름이다.
---「7장 기술 시대 양심의 자리」중에서

 

 

 

원자론에서 행동주의로

ㆍ원자 자체는 파괴되지 않는다. 원자는 항상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원자는 늘 빈 공간 속을 떠돌며 서로 결합하고 상호작용한다. 열을 받은 원자는 서로 결합하며 상호작용을 일으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형성한다. 육체와 정신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정신이 후러씬 더 작고 포착하기 어려운 입자들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죽음은 각 개인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특정한 결합이 해체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육체가 죽을 때 정신은 마치 와인이 그 향미를, 향수가 향기를 잃어버리듯 육체와 더불어 사라지는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바로 그래서 죽음 몸은 무게에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주어질 때 원자는 서로 만나 새로운 형태의 조합을 이루거나 해체한다. 

 

ㆍ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느끼는 가장 강력한 충동은 자기보존이며, 이 충동의 일부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즐기려는 기계적인 반응을 보인다. 

 

ㆍ파블로프는 자신도 목사가 되려는 꿈을 가졌으나, 다윈의 저작을 읽고 나서 믿음을 잃었다. 

 

ㆍ"감각하거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은 의식이나 마음 혹은 정신생활이라는 비물질적인 세계가 아니라, 관찰자 자신의 몸이다." - 스키너

 

 

 

 

 

 

 

로봇의 부상

ㆍ인간이 실제로 물질로만 이루어진 기계이며 양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어쨌거나 원칙적으로는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ㆍ유념해야 할 점은 양심이라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의미를 가지는 대상은 진짜 자동로봇뿐이라는 사실이다. 내장된 센서를 가지고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며 처리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줄 아는 로봇을 다룰 때만 우리 논의는 의미를 가진다. 

 

ㆍ완전한 자동로봇, 곧 양심을 내장한 로봇이 실제로 만들어져서 성공적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로봇이 부여 받은 양심이 정말 양심일까? 이 양심이 키워지고 발달할 수 있을까? 이 로봇이 양심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인 자유의지를 가질까?

 

 

 

 

 

양심의 과학화

ㆍ종합하면 양심이라고 알려진 것은 내면화한 금지와 죄책감이다. 

 

ㆍ과학자가 정신이 뇌의 활동이라고 말하는 데 담긴 진의는 아는 것만 고려할 뿐, 모르는 것은 무시하겠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ㆍ자동양심, 곧 두뇌의 의식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양심이 과연 양심이라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ㆍ뇌의 기능에 영향을 주는 특정 물질이 전통적으로 양심이라고 알려진 장벽을 약화시키고, 평소 억제되는 행동을 허락해준다. 

 

ㆍ뇌의 주인이 특정 행동을 하기로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기 수초 전에 뇌 내부에서 그 행동과 연관된 생리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자유의지의 존재 자체에 도전해왔다. 

 

ㆍ그러나 가장 중요한 물음, 곧 선과 악 사이의 선택, 그리고 사람들이 악보다 선을 선호하게 만들 방법에 무엇이 있는지 하는 물음은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맺는말 양심을 찾아 떠난 3천 년의 여정

지금껏 살펴본 양심으로 미루어볼 때 인간, 어쨌거나 서구인은 아주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인생을 살 수 없는 모양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를 들어 일본과 중국과 비교해볼 때, 서구는 항상 사회보다 개인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리라. 서구 사회는 개인을 그 사회가 정한 적당한 자리에 머무르게 하기에는 결속력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러나 특히 중국에서 선과 악은 사회의 산물이기에 상대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서구는 다르다. 서구인은 항상 죄책감을 걸어둘 아르키메데스 점을 찾는다. 새로운 우상을 찾아야만 했으며, 새로운 우상은 찾아졌다. 가장 중요한 우상 세 가지는 ‘인권’과 ‘건강’과 ‘환경’이다. 갈수록 쇠퇴하는 종교와 견주어 세 가지 우상은 단호할 정도로 세속적이다. 셋 모두 출발은 미미했다. 특정 개인들이 어떤 특별한 악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행동에 나서며 관심을 모으려 시도한 것이 그 출발이다. 이 개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대중을 발견했고, 이 대중의 규모가 커지면서 운동이 조직되었고, 셋 모두 실로 거대해졌다. 이 조직화 과정에서 운동은 힘을 키웠고,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대포를 장착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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