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소설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무용 연구가이다. 그는 북쪽 지방 눈이 많이 내리는 온천 거리의 고마코라는 기생에 끌려 몇 년 동안 계속 온천장에 찾아오곤 한다. 물론, 적극적으로 그 여인에게 구애를 하기 위함도 아니요, 헛되고 보람 없음을 알면서도 시마무라의 마음은 그녀에게 끌린다. 그때, 고마코를 통해 알게 된 젊은 요코. 시마무라에 대한 고마코의 사랑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시마무라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깊이 매혹되면서도 요코의 신비스러움과 지순함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끼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화재로 인한 여인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죽음 자체도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처럼 그려지고 있다.
ㆍ시마무라 : 물려받은 유산으로 무위도식의 생활을 보내고 있는, 외국 무용의 비평이나 프랑스 문학의 번역 등을 하고 있는 문필가. 기혼.
ㆍ고마코 : 동기 시절 몸 값을 지불해준 남편의 사망 후 온천으로 들어옴. 춤 스승의 아들인 유키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게이샤로 일함. 유키오와 혼담 얘기가 있었음. 요코와 설명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갖고 있음.
ㆍ요코 : 유키오의 새로운 애인. 유키오를 간호하기 위해 간호사 공부를 함. 유키오가 죽고 나서 온천에 정착. 화재 사건 때 사망.
ㆍ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ㆍ당신을 경멸하지 않으면 말하기 힘들어.
ㆍ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다물고 있을 때조차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어 만약 주름이 있거나 색이 나쁘면 불결하게 보일 텐데 그렇진 않고, 촉촉하게 윤기가 돌았다.
ㆍ눈꼬리가 치켜 올라가지도 처지지도 않아 일부러 곧게 그린 듯한 눈은 뭔가 어색한 감이 있지만, 짧은 털이 가득 돋아난 흘러내리는 눈썹이 이를 알맞게 감싸 주고 있었다. 다소 콧날이 오똑한 둥근 얼굴은 그저 평범한 윤곽이지만 마치 순백의 도자기에 엷은 분홍빛 붓을 살짝 갖다 댄 듯한 살결에다, 목덜미도 아직 가냘퍼, 미인이라기보다는 우선 깨끗했다.
ㆍ당신이 도쿄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오직 한 사람 아냐? 가장 오래된 일기에 맨 먼저 써놓은 그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지 않는 법이 어디 있나? 그 사람 목숨의 맨 마지막 장에 당신을 쓰러 가는 거야.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데." 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 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ㆍ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ㆍ"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걸 죽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말릴 수 있다는 거죠?"
ㆍ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이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옛 책에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ㆍ시마무라가 아침 이부자리에서 단풍객의 우타이를 들은 그날, 첫눈이 내렸다. 올해도 벌써 바다와 산이 울렸을까. 시마무라는 혼자 여행을 다니며 온천에서 고마코와 줄곧 만나는 사이, 청각이 묘하게 예민해졌는지 바다와 산이 울리는 소리를 그저 연상만 해도 그 먼 울림이 귓속을 스치는 것 같았다.
ㆍ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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