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당에 의해 중국 문학의 아버지로 공인
- 지식인은 권력에 복종하거나 아부해서는 안 되고, 자본은 물론 지식이나 기술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며, 언제나 도덕적 힘을 가지고 저항해야 된다. (저항하는 지식인)
- 루쉰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쓸쓸함과 동시에 웃음과 풍자)
루쉰의 외침
- "중국의 문명이란 사실 부자들이 누리도록 마련된 인육의 연회에 지나지 않는다."
- "군중 - 특히 중국의 군중 -은 영원히 연극의 관객이다."
- "먹으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사실을 감출 수 없다. 피의 빚은 반드시 같은 것으로 갚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갚음이 늦으면 늦을수록 이자는 늘어난다."
- "예전에 경기가 좋았던 자는 복고를 주장하고, 지금 경기가 좋은 자는 현상유지를, 아직 경기가 좋지 않은 자는 혁신을 주장한다. 시세란 이런 것이다. 시세란."
- "혁명 이전에 나는 노예 짓을 하였다. 그런데 혁명이 발생한 얼마 뒤에 노예들의 속임수에 당하여 그들의 노예로 탈바꿈하였다."
- 문학의 첫 번째 자격은 유머다.
- 루쉰은 늘 소수파였고, 다수파와는 대립하는 삶을 살았다.
- 그는 모든 사상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졌다.
- 변발을 잘라버렸습니다. 변발은 청나라가 강요한 노예의 상징이기 때문이었지요. 그것을 기념하여 찍은 사진 뒤에 그는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하겠다는 결심을 적었습니다. 이는 당시 청나라에서는 반역 행위로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어요. 변발을 거부한 탓으로 동료 유학생들의 혐오를 받았고, 조정 감독관의 비위를 건드려 관비 지급이 중단되고 중국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뒤에 중국에 돌아간 뒤에도 변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에 처했어요. 또한 그는 유학 시절 내내 일본인의 전통 복장, 식사 및 주거문화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모노를 입고 있는 그의 일본 시절 사진을 볼 수 있어요. 이러한 그의 태도에 대해서 우리나라 독자들은 꺼림칙한 감정을 품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 이상으로 당시의 중국 유학생들은 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식사나 주거문화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양복은 당시에도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으므로 굳이 중국 의상을 입지 않는다고 해도 양복을 입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루쉰은 굳이 일본 전통 옷을 입고 자 했을까요? 그 이유는 일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뒤에서 볼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루쉰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아니 앞에서 나온 루쉰의 일반적인 태도에서도 이미 보았듯이― 그는 항상 대상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고자 했거든요.
제1장 왜 루쉰인가?
- 루쉰이 신랄하게 비판한 국민당 정권을 지금의 공산당에 빗대어 읽는다.
- 황색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르주아 계급과 투쟁할 일이 아니라 백색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투쟁해야 한다.
-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만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인류를 구원할 책임이 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휴머니즘', 그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개인주의'
- 루쉰은 젊은 시절 일본에 7년간 유학했고, 일본에서 문학을 시작했으며, 평생 여러 일본인과 가깝게 지냈다.
제2장 성장과 모색(1881~1908)
- 변발은 청나라가 강요한 노예의 상징이었다.
- 루쉰은 후일 『외침』의 머리말에서 “나는 일찍이 4년 남짓한 동안, 거의 매일같이 전당포와 약방을 출입했던 적이 있다”고 했는데, 아마 아버지가 죽기 직전의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당시의 회상인 「아버지의 병환」에서 루쉰은 아버지를 치료하던 한의학에 대한 불신을 보여줍니다. 물론 루쉰은 한의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서양 의사만 신용했습니다. 또한, 죽음에 임하는 중국인의 전통적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지요. 중국에서는 부모가 죽기 전 인삼을 달여 먹게 함으로써 반나절이라도 목숨을 연장시키려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나을 수 없는 병의 경우 고통 없이 죽게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의 목숨을 억지로 연장하는 방법의 하나가 죽기 전까지 부모를 부르는 것인데요. 루쉰은 그것을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잘못’으로 회상합니다. 집안이 몰락하자 루쉰은 사회적인 냉대를 겪었습니다. 루쉰은 1929년, 학생들에게 구사회를 미워하게 된 동기를 당시의 경험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집안 형편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사회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고 한 것이지요.
- 루쉰은 쭈안과 결혼한 것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1) 어머니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다. 2) 약혼했다가 소박맞은 여인은 평생 수모를 당한다. 3) 자신이 청나라에 계속해서 투쟁한다면 오래 살지 못할 테니 누구와 결혼해도 무방하다.
- 루쉰은 서양 제국주의를 경계했다.
- 루쉰은 니체를 개인주의의 '최고 영웅'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희망을 걸었던 것은 오로지 영웅과 천재여쓰며, 우민을 본위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치 뱀이나 전갈을 보듯 증오하였다고 추어올린다.
- 중국의 방관자적인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니체를 끌어온 것입니다. 깨달음 없이 인습에 빠져 있던 중국 사회, 이에 반항하려면 강고한 의지를 갖춘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혁명적 투자를 중국인이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루쉰의 초인은 부정되어야 할 중국 사회와 투쟁하는 반항자일 뿐입니다.
- 루쉰은 니체가 기독교를 배척하고 초인론을 주장한 것이 진화론을 받아들여서라고 이해한다.
- 상당수 학자는 계몽주의자이면서도 민중을 경멸했다는 점을 루쉰의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그들은 이 역시 니체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제3장 외침과 방황(1909~1924)
- 루쉰은 교육부 장관으로서 일했다. 미술교육을 중시했던 차이위안페이는 루쉰이 미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를 임명했다.
- 루쉰의 <광인일기>는 중국 최초 구어체 현대 창작소설이다. - 가족 제도와 유교의 폐해를 폭로, 유교를 식인으로 빗대기까지했다. "4천 년 동안 내내 사람을 잡아먹어 온 곳, 거기서 나도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 <약> - 간사한 지식인이 조작한 미신에 속는 민중의 우매함을 보여준다. '사람의 피를 묻힌 시뻘건 만두'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미신
- '인류는 쓸쓸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진보적이고 낙천적이므로."
- 루쉰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 「아Q정전」(1921)은 아홉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중편입니다. 제1장 ‘서’에서 필자는 아Q의 일생을 다룬 글을 쓰기로 하지만, 그 글의 이름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곤란해 합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공자의 옛말을 인용하면서 결국 열전이나 자전 별전 등도 아닌 정전을 쓰기로 하지요. 다음에는 아Q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져요. 여기서 아Q라고 한 것은 그의 성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어떻게 쓰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아Q가 혁명을 처음에는 반역으로만 여기다가 봉건관료와 토지제도에 대한 불만이 깊어지자 혁명당원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심리적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Q는 당대 중국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이지요. 아Q는 사람들로부터 얻어터지는 일상을 보내지만 언제나 의기양양합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실패하더라도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일부러 착각하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자기기만을 ‘정신승리’라 합니다. 노예근성의 대표적 증상이지요. 루쉰은 당시의 중국이 외세에 치이면서도 자국이 ‘오랑캐’보다 잘났다고 멸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던 듯합니다.
- 아Q는 혁명을 저주합니다. 처음에는 혁명을 거부했고, 다음에는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간단히 혁명당에 몸을 던지려 하더니, 이제 다시 혁명당을 반란군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이렇듯 혁명이란 아Q에게 형편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Q만이 아니라 모든 민중에게 그랬어요.
제4장 혁명과 문학(1925~1936)
- 루쉰은 자신의 의식이 인도주의(인간을 책임지겠다)와 아나키즘(개인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그 책임을 포기하고 개인주의를 선언한다.
- "굶어 죽는 아이 앞에서 문학은 유효한가" "아우슈비츠 이후 문학은 없다."
- 루쉰은 자신이 계속해서 진화론을 믿고 있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이 유물사관의 이론에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 루쉰의 2번째 아내 17세 연하의 제자
제5장 루쉰의 지식인론
- "우리는 무슨 일에나 눈을 똑바로 뜨고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 루쉰은 전통이란 이름으로 내려오는 허위를 고발한다.
- 루쉰은 상식이란 허위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 루쉰은 언론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 루쉰은 지식인에 대해 언제나 '영원한 비판자'인 동시에 '영원한 회의자'였다.
제6장 루쉰이 본 중국과 중국인
- "중국 책은 절대 읽지 마라." "중국 역사책도 읽지 마라.""중국 과학책도 읽지 마라."
- "열녀를 세우는 것은 악습이다."
- 중국이나 한국에서 나타나는 자기중심성은 강한 자기주장에서 비롯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책임과 연결되지는 않아요. 그 탓에 분쟁이 생기는 거고, 중재자의 존재가 중요시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당연히 응집이나 단결에 문제를 일으키는데요. 중국에는 “인민 각자는 용(龍)이나 셋만 모이면 돼지가 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중국혁명의 아버지인 쑨원은 단결력이 부족한 중국인을 모래사장의 모래로 비유한 적도 있지요. 그러나 한번 집단적인 감정에 휩쓸리면 쉽게 단결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저는 중국이나 한국의 대인주의가 서양의 개인주의와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공동체’를 중시하지만, 공중도덕은 부족한 점이 아직 많아요. 반면 서양의 공중도덕은 ‘사생활’의 존재를 인정함을 전제로 합니다. 서양의 개인주의란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와 대비되는데요. 이는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자유롭고 독립된 자주성을 존중하는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대인주의에는 이처럼 집단에 대항한다는 요소가 없고 개인만이 중심으로서 존재하지요. 물론 대인주의라는 것 자체가 주변 타인이나 상황에 대응한 것이므로 타자 지향적이고 상황 의존적인 성격이 드러납니다. 즉 대인주의의 두 가지 성질인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과 ‘상대나 형편에 따라 자기 행동을 바꾸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 구원이란 유교에 젖지 않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외침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루쉰은 평생 그렇게 외치면서 살았습니다.
- 지식인은 권력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참된 지식을 통해 권력에 저항하는 존재여야 한다.
- 루쉰은 농상태의 원인을 유교로 보고 유교를 비판했다.
- "가장 먼저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라."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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