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경꾼들의 관심은 온통 도전자에게 쏠려 있다. 까만 머리에 파리한 얼굴, 상대를 깔보는 듯한 짙은 눈의 젊은이다.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표정 변화도 없다. 이따금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이리저리 뱅뱅 돌리기만 한다. 전체적인 인상은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냉담함이다.
- 그를 이기려면 오직 그보다 체스를 더 잘 두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새로운 고수가 자기들 앞에 홀연히 나타난 것 같기 때문이다.
- 모름지기 고수란 어느 순간이건 독창적이고 위험한 수를 과단성 있게 두는 사람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체스꾼과는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일반 체스꾼은 고수의 수를 일일이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사실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챔피언은 젊은 도전자의 이런 야성적 패기에 어떻게 대응할까? 답은 다들 알고 있다. 그들이 아는 챔피언은 분명 조심조심 이 애매한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신중한 지연 전술이다.
- 어쩌면 그들도 저 친구가 지금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젊은이처럼 두고 싶다. 저렇게 당당하고, 승리의 자신감에 넘치고, 나폴레옹처럼 영웅적으로 싸우고 싶다. 장처럼 소심하게 망설이듯이 질질 끌며 두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실전에서는 장과 똑같이 두기 때문이다.
- 누구도 그런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냉정하게 분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고 싶은 건 찬란한 영웅적 행위. 즉 적을 일거에 무너뜨릴 기발한 공격과 강력한 일격뿐이다. 그렇다. 이 게임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목표는 오직 하나다. 낯선 젊은이가 저 늙은 챔피언을 무참히 짓밟고 승리하는 순간을 보는 것이다.
- 솔직히 장은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그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게 이방인에게 경탄했고, 그와 함께 자신이 수년 전부터 그렇게 기다려 온 패배를 마침내 그 인간이 최대한 강렬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맛보게 해주기를 소망했다고 말이다.
- 기계는 어떤 상대건 어떤 상황이건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자신의 게임을 풀어 나간다. 반면에 인간은 수가 보이지 않거나 형세가 절망적이면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건 승부에 좋지 않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기계와의 싸움은 인간에게 불리하다.
- 평정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싸움에 임하는 것이 승부사의 가장 훌륭한 태도다.
- 말이 많으면 가볍게 느껴지는 법이다.
- 인간 세계에서 카리스마나 오라는 당사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런 인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동경과 갈망이 투영된 것 뿐이다.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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