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돈 공부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평생 일을 안 하셨다. 적어도 아버지의 직장생활은 내 기억에 없다. 사업같은 건 몇 번 하셨지만 정확히 어떤 걸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사업'가'도 노동'자'도 아니셨던거 같다.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하신 적도 없고, 서운한 소리를 들으실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주신 부동산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론, 두 분 역시 일을 하시진 않았다.
난 부동산을 그렇게 이해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써서 내야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자영업"이라고 쓰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 옛날에도 휴대폰도 있으셨고, 해외를 안 가본데가 없으실 정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롱 안에서 전 세계 각국의 돈과 우표 따위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난 자영업을 그렇게 이해했다.
아버지는 같이 있기 불편하고 무서운 존재인 상태로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갑자기 돌아가셨다. 삶과 죽음은 돈보다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난 아빠의 삶을 그렇게 이해했다.
난 부동산, 자영업, 그리고 아빠를 그렇게 이해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와 정반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책을 읽으며 지금의 내가 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삶에서 유래된게 아닌가 생각했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은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과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돈 못 버는 남자는 아빠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다. 돈은 생명이고 직장은 그 생태계이다. 그렇게 난 아빠로 살고 있다. 딸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아빠가 많이 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삶을 주셔서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경제 공부라는 건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허상을 실체로 전환하는 과정일 수 있다."
아빠, 돈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빠! 저, 결혼도 했고 딸도 낳아서 잘 키우고 있어요. 이름은 이재인입니다. 건강하고 똑똑하고 단 한 번도 속 썩인 적이 없는 착한 손녀딸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실때는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안 흘렸는데, 어느날 갑자기 재인이의 미소를 볼 때면 그 슬픔이 찾아와서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아빠도 재인이의 웃음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아빠가 재인이 손 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고싶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저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아버지 살아계셨으면 저 아직도 개차반 사람구실 못했을겁니다.
아빠, 우린 대화가 너무 없었어요. 인정하시죠? 제가 가출해서 집에 안 들어오고 말도 드럽게 안 듣고... 근데 아빠도 좀 너무 엄했어요. 아직도 아버지가 보여주신 '한국인의 손맛'을 기억합니다. 아빠도 잘해보려고 그러셨던 거 이해합니다. 이젠 다 지나간 이야기니까... 이젠 대화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저 요새 돈 공부합니다. 지금도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돈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앞으로 돈을 엄청 많이 벌거 같아요. 재인이가 태어나기 전엔 돈이 중요한지, 왜 그렇게 필요한지 몰랐습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되는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얘기가 달라졌고, 돈 많이 벌고 싶습니다. 아버지께만 말씀드리는 건데, 저 엄청 부자가 될 거 같아요. 어머니한테도 아직 말씀 안 드렸습니다. 아빠, 부자 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거대한 배를 만들 수 있는 거대한 야망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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