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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사회 / 정지우

by mubnoos 2022.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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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서 가장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제1장 분노란 무엇인가

ㆍ분노는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전통적으로 감정이란 이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신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형상이라 정의되어 왔다. 이성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사태를 숙고하는 것이라면, 감정은 즉각적이고 신체를 통해 사태에 반응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서만 진행되는 이성적 사고에 반해, 감정적 반응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킨다. 신체는 슬플 때 눈물을 흘리고, 기쁠 때 웃음을 떠뜨리며, 화가 날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처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이자, 사태에 대한 본능적인 대응 방법이기도 하다.

 

ㆍ분노 역시 생존의 위협에 대처하는 원초적인 방식이다. 자산의 영역을 침범하는 적, 유전자의 계승을 방해하는 경쟁자, 포식자의 공격에 대한 저항으로서 분노는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ㆍ증오는 진화의 최상위 원칙인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공격 또한 도피를 나타내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ㆍ현대 사회에서 감정은 더 이상 생존과 본능 같은 원초적인 차원에서만 작동하지만 않는다.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감정이 가장 중요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의식'이다. 분노는 여러 감정들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의식 즉 '관념'과 관련을 맺는다. 

 

ㆍ분노는 인간이 '상징적이고 정신적인' 존재라는 점을 정확히 지시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분노는 우리 신체에 가해진 반응으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관념이 없다면 분노는 없다. 분노는 인간이 언제나 관념을 향해있고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감정이다. 

 

ㆍ한 사회의 관념은 개인들의 의식, 생각, 상상을 통해 유지된다. 또한 개인들은 바로 그 의식, 생각, 상상 즉 관념에 의지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하나의 개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 사회를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이 사회는 어떤 사회이다, 이 사회의 약속은 어떤 것이다. 이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윤리와 원칙에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와 같은 믿음을 통해서만 인간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믿음을 통해 지탱되며, 인간은 사회적 믿음을 가진 존재, 즉 '사회적 동물'이다. 

 

ㆍ분노는 관념과 관계 맺는 감정이지만, 이처럼 관념에는 두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하나는 사회 전체의 층위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 층위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객관적 층위와 주관적 층위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분노 역시 이 두 가지 층위 모두에 걸쳐 있다. 

 

ㆍ종교(기독교)야 말로 원한과 복수심의 결과물이다. - 니체

 

ㆍ관념과 삶의 불일치, 즉 넓은 의미에서 삶의 실패에 직면한 이들은 맹목적 신비주의를 갈구한다. 그 속에는 세계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이 서려 있다. 

 

ㆍ자기 자신에 대한 부적절감은 곧 내 삶 전체에 대한 부적절감으로 옮겨간다. 내 삶이 어딘지 완전하지 않다는 느낌, 삶이란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기분, 인간의 삶이 정말 원래 이런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인생 전체에 뿌리내리게 된다. 나아가 그러한 의문은 나와 사회, 내 인생과 이 세계에 대한 의문으로 옮겨간다. 내가 이 사회와 어긋나있다는 느낌, 나와 세계의 관계가 부조화하다는 느낌을 거쳐, 결국 내가 잘못되었거나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에 이른다. 이와 같이 내면의 부적절감, 즉 '내면의 어긋남'이야말로 모든 분노의 근원이다. 어긋남이 빈번해질수록 분노는 만성화된다. 

 

ㆍ현대인에게 자기 정체성이란 어디까지나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영역이 되었다. 현대의 개인이란 '스스로가 스스로인 존재'를 의미한다. 현대 이전까지 사회적 존재로 머물 수 있었던 개인들은 현대 사회에 이르게 되면,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강령을 얻게 된다. 이 고유한 개인, 원자환된 주체는 '사회 속 존재' 이상의 존재이다. 

 

ㆍ현대에서 어떤 개인의 사회적 가치는 그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지위의 직접적 결과물이 아니며, 자신의 자아로부터 길어 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자아는 유일하며 사적이며 인격적이며, 제도로는 담기지 않는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 

 

ㆍ현대인은 자신의 취향, 성격, 감정,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의 꿈 등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느낀다. 

 

ㆍ우리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이란, 사회가 늘 내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조화로운 세계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내가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에 따라 교육받고, 공부하고, 일하고, 사회에서 지정한 적정 시기에 따라 진학, 취직, 결혼, 출산, 은퇴 등을 수행했을 때 그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행복과 안정'을 제공한다.

 

ㆍ분노의 문제는 내가 나를 어떻게 장악하고 다스릴 것인가,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내 삶의 의미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나와 어긋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나의 자리를 만들고 나의 세계를 구축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하루하루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중심을 잃을 때, 내 삶을 나만의 이야기로 써나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할 때 삶은 분노가 된다.

 

ㆍ복수심은 자존심에 의해 추동되는 반면, 분노는 외적으로 승인된 일련의 기준, 가치, 규범에 의해 추동된다. 

 

 

 

 

 

 

 




제2장 분노하는 사람들의 사회

ㆍ만성적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들은 늘 분노의 씨앗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거나, 자기 정체성의 수립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이 세계 전체가 절망으로 가득 차있다는 신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내심 우리 사회가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나아가 전 세계가 절망을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록 기뻐한다. 그들에게 이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은 거추장스러운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오직 절망과 좌절만을 믿으며 거기에 중독되고 자신의 세계 전체를 부정적 인식으로 덮어씌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의 관념들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더불어 현재 사회의 관념이 정확히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관념 나같이 분노를 양성해내고 있는데 그만큼 우리 사회의 모든 관념들이 거의 다 어긋나 있고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에게 ‘하나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남아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 부터 사회 없는 상태에서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회 없음. 그것이야 말로 지금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일지도 모른다. 

 

집단주의라는 동일한 형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후 사회에 그러한 집단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관념에 저항하기보다 는 더욱 강화하는 세대로 남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 성립된 집단주의는 가능한 한 모든 병페를 만들어냈다. 근래 갑을문화라 지칭되는 위계질서와 복종하는 군대식 상명하달 문화 역시 집단주의에 속한다. 지연, 학연, 혈연으로 지칭되는 한국의 병리적 인맥(연고주의, 온정주의) 또한 끼리끼리 뭉치는 집단주의적 문화이다. 

 

집단적 위계 문화는 서로를 비교하며 우열을 가르고 수치심, 모멸감, 박탈감, 적개심, 좌절감, 강박증, 탐욕 결과적으로는 분노를 생산하는 근거가 된다. 집단적으로 위계 지어진 관념은 개인들로부터 고유성을 박탈한다. 우리는 이미 집단에서 공유하는 잣대로 개인들을 평가하는 폭력에 익숙하다. 집단적 기준을 통한 각종 뒷담, 멸시, 차별, 시기에 동참할 때 우리는 스스로 이 사회를 걷어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없는 사회, 세계 없는 세계 속에서 분노를 느끼고, 누군가를 증오하며, 속물성에 충실히 살아간다.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낸 게 우리와는 관련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어왔던 자본주의, 세계화, 국제관계, 금융, 역사, 권력, 전쟁 등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서 우리로부터 세계를 앗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참여해서 그 논리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순간 우리 역시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면죄해주지 않는다.

 

현대인의 과도한 소통과 연결은 '개인이 개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개인이 진짜 개인이 되지 못한 데서 오는 현상이다. 

 

극우는 자신이 정의롭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신 상대방의 정의감을 깎아내리는 데 치중한다. 반대로 극좌는 상대는 부패했고 자신은 정의롭다는 이분법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인다. 극좌는 자신이 맏는 세력이 집권하면 낙원과 정의가 도래하리라는 환상 에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도취된다.

 

자기 세력이 패배했을때,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들이 원한 것은 증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존재를 형성하는 힘을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성공과 실패는 불가피함을 둘러싼 세계의 상태와 결부된다. 이 때문에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좋은 세계로 인식하여 그 상태로 보존하고 싶어 하지만 좌절한 사람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


ㆍ극우든 극좌든 집단에 자기를 동일시하고, 궁극적으로 도취와 열정을 바란다는 점에서, 승리와 우월감을 통해 자기를 다시 느끼고 싶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들은 에릭 호퍼가 말한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라는 명제에서 정확히 동일한 거리로 동떨어져 있다. 그들이 모두 현실을 왜곡하는 망상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ㆍ분노는 제도를 등진 사람보다 제도를 따르는 사람에게서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삶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분노를 낳는다. 제도를 믿었을 때, 정해진 삶의 양식을 따랐을 때 얻게 되리라 믿었던 행복과 안정은 살아나갈수록 거짓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자기 삶에서 끊임없이 맞이하는 부적절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의 제도 자체가 왜곡되어 있고, 비합리적이며, 기형적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없어진 곳에는 찢어진 사회의 조각들만이 남는다. 지역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한 지역 사회, 경제적 차등을 기초로 한 계층사회, 각 직업별 입장별로 자신들만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각종 집단들만이 남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이 사라지고, 집단적 이익에 봉사하는 집단적 존재들만 남게 된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근대의 유산인 자유와 평등을 반납하게 되며, 사회의 가능성 역시 저버리게 된다.  

 

한국의 교육은 현대의 진정한 개인을 길러 내거나 시민을 양성하는 데 전적으로 실패 하고 있다. 더 이상 한국의 교육이 무엇을 달성하고 있는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삶은 사익을 줄이고 공익을 택하거나 주관적 삶보다 객관적 사회를 우위에 놓거나, 내 삶을 포기하고 타인 헌신하는 식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가장 이득이 되는 삶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에도 가장 이득이 되는, 내가 가장 좋다고 확신할 수 있는,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좋은 삶’이다. 그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고 좋은 삶에 동참할 때,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가 성립한다. 그 삶에 참여하는 한 사람이 결국 우리가 믿는 사회도 바꾸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삶 속에 사회가 있다. 내가 내 삶을 때, 사회 역시 저버리게 된다. 

 

 

 

 

 

 

 



제3장 존재의 기술

ㆍ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부채의 삶이면서 기부의 삶이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 인간은 누군가에 의한 피해자이면서 누군가에 대한 가해자이며, 채무자이자 채권자이다. 그러한 관계를 마음 안에서 의도적으로 끊을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삶은 항상 타자와 연계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지식인이 자본주의의 수혜자이고, 속세를 부정하며 떠도는 출가승이 세속인의 보시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듯이, 모든 관계로부터의 ‘완전하고 순수한 자유’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던 사람일수록 성공의 확률이 높다. 반면, 자기 안으로 깊이 내려가지 못하고 주위에 휩쓸려 선택한 사람일수록 삶을 실패할 확률이 높다. 

 

진정한 개인이 된다는 것은 변화하는 자기 존재의 본질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을 통해 나와 관계 맺는 사회성 자체를 바꾸고 생성시켜 나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끊임없는 역동성의 존재야말로 현대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즉 고요한 역동성을 담보한 자유롭고 보편적인 개인이다.

 

개인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유연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자 할 때, 즉 자기의 이기심과 탐욕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책임을 강요하려고 할 때, 그러한 개인들이 사회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사회 모든 곳이 삐걱거리게 된다.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부채의 삶이면서 기부의 삶이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 인간은 누군가에 의한 피해자이면서 누군가에 대한 가해자이며, 채무자이자 채권자이다. 그러한 관계를 마음 안에서 의도적으로 끊을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삶은 항상 타자와 연계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지식인 주의의 수혜자이고, 속세를 부정하며 떠도는 출가승이 세속인의 보시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듯이, 모든 관계로부터의 ‘완전하고 순수한 자유’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삶의 실패와 성공은 반드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차원에서 말해져야 한다. 즉,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실질적인 기분, 생성하고 성장한다는 상승감, 넓어지고 여유로워진다는 확장감, 자기실현에서 오는 자부심, 사회와의 관계에서 오는 만족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곁에 있는 이들과 나누는 사랑과 공감이 삶의 성공을 드러내는 단서들이다. 이러한 감각들을 통틀어 ‘힘의 기분’ 이라 말할 수 있다. 그가 가진 의욕, 의지, 열정은 강박이나 집착이 실질적인 만족과 여유,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생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하루하루 속에서 자신이 실제적으로 '활약’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그는 인간의 근본 조건으로서 세계에 대한 빚을 자기 자신의 삶을 통해 갚아 그러한 빚 갚기의 삶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실현함으로써, 그러한 실현을 통해 세상의 편견을 바꾸어 나감으로써,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세계를 재구축함으로써 완성된다. 

 

우리는 인류의 문명 탄생 이후, 계속해서 이어져왔던 이 부조리를 인정하고 자기 자신의 중심을 지켜내야 한다. 사실 모두가 갈구하고 있는 시장질서의 공정성, 관료와 정치인의 도덕성, 개인들의 건강한 시민의식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될 때만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심을 잃고 자유와 책임을 집어 던졌을 때, 우리 아무리 가도 지금 여기의 사회로만 다시 도착하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의 사회란, 주지하고 있다시피, 사회 없는 증오와 상실만이 넘쳐나는 분노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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