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보뇌르 "코코" 샤넬
Gabrielle Bonheur "Coco" Chanel
1883년 8월 19일 ~ 1971년 1월 10일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영원하다”
ㆍ그녀를 알기 위해서는, 또는 어떤 누구라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람을 완성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 - 버지니아 울프
ㆍ나는 전 세계에 옷을 입혔다. - 코코 샤넬
ㆍ샤넬이란 무엇인가? 모든 여성이 알지도 못한 채 입고 있는 것이다.
ㆍ여신은 40년도 더 전에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샤넬 제국의 창립자로서 이 대리석 건물 안에서 영원히 젊고 영원히 현전하며 '마드무아젤'로 불린다.
ㆍ사람들이 '샤넬'이라고 인식하는 것의 일부는 패션을 초월하고, 심지어 샤넬이라는 인물조차 초월하는 정체성이다.
ㆍ샤넬은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보육원에서 자라며 공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서른 살에 이미 프랑스에서 누구나 다 아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30세에 해외로 진출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샤넬 No.5(역사상 최초의 합성 향수)가 거둔 대성공에 힘입어 그녀는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호가 되었다. 샤넬은 47세가 되는 1930년에 2천4백 명을 고용했고, 그녀가 세운 기업의 가치는 당시 최초 1천5백만 달러에 달했다. 샤넬 No.5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향수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3초마다 1병씩 판매된다. 1910년에 설립된 샤넬은 세상에서 가장 수익이 높은 개인 소유의 명품 회사다.
ㆍ샤넬은 20세기에 여성이 가장 많이 모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ㆍ샤넬은 다른 사람들, 연인들, 친구들과 맺은 관계를 통해 활기를 얻었다. 그녀는 타인을 통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측면(예술과 역사, 정치)을 흡수하고 통합했다. 샤넬의 세계적 중요성에서 핵심은 이런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녀는 가까운 이들에게서 사회적 지위나 육체적 우아함, 재능이나 스타일 등 가장 멋있어 보이는 건 무엇이든 전부 집어삼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유례없이 격렬한 갈망, 거의 흡혈귀 같은 욕망을 품고 타인에게 접근했다.
1 유년 시절
ㆍ샤넬이 일으킨 모더니즘 혁명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혁명의 힘은 오래전에 파묻어 버린 그녀의 어린 시절에, 그녀가 태어났던 프랑스 세벤 지역의 딱딱한 토양에, 농사를 지으며 빈곤하게 살았던 선조들에, 그녀에게 미학적, 도덕적, 심리적 흔적을 남겨 놓은 주요 조직인 로마 카톨릭교회와 군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ㆍ어려서 찾아오는 행복은 오히려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어려서 극심하게 불행했던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 코코 샤넬
ㆍ나는 여섯 살에 이미 혼자였다. 우리 아버지는 고모들네 집에 나를 짐짝처럼 버려두고 곧바로 미국으로 떠나셨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고아', 이 단어가 내 마음을 공포로 가득 메웠다. - 코코 샤넬
ㆍ가브리엘 샤넬의 성격에서 핵심을 이루는 두 가지 측면은 분명히 소녀 시절의 추억에서 비롯했다. 하나는 왕처럼 당당하고 단호한 태도다. 샤넬은 그때 이미 자기가 자신만의 조그마한 영토를 지배하는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비침한 상실감과 외로움이었다. 어린 샤넬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ㆍ샤넬은 성인이 되고 나서는 드문드문 미사에 참석했을 뿐, 종교 생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ㆍ샤넬은 왕정주의라는 이상을 드러내 놓고 열정적으로 지지했으며,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분명하게 피력했다.
ㆍ타고난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꿰뚫어보았던 샤넬은 새로운 환경을 파악하고 냉정하게 탈출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샤넬은 어린 나이에도 사회 계층 질서에서 자기에게 부과된 비천한 신분을 이해했고 거부했다. 그리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ㆍ'나는 반항아였다. 자존심 강한 사람이 바라는 것은 자유 단 하나다. 하지만 자유로우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나는 돈을 오로지 감옥 문을 열어 줄 수단으로만 여겼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였다. 돈, 돈은 왕국의 문을 열 열쇠야. 돈을 물건을 사는 수단이 아니다. 나는 나의 자유를 사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를 사야 했다.'
ㆍ샤넬은 십 대 후반에 가슴 아픈 교훈을 얻었다. '옷이 내가 누구인지 결정한다.' 샤넬은 이 교훈을 결국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했다.
ㆍ샤넬은 라 도통드에서 '포즈걸'이 되었다. 포즈걸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스타 뒤에 반원형으로 줄지어 서서 '포즈'를 취하는 예쁜 여성이었고, 각 공연 사이에 노래를 몇 곡 부를 수도 있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노래에 재능이 없었지만, 라 도통드를 찾는 관객을 매료시켰고 곧 가장 인기 있는 포즈걸이 되었다.
2 새로운 세계
ㆍ부유한 남자와의 결혼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적 생활을 꿈꿔 볼 수 있는 유일한 탈출 수단이었다.
ㆍ샤넬이 언니의 애인을 유혹해서 상실감에 빠진 언니가 자살하도록 몰아갔을 수도 있다. 우리로서는 절대로 진실을 알 수 없지만, 그런 행동은 코코 샤넬의 성격과 어긋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너무도 외로웠던 샤넬은 사랑을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샤넬이 보기에 이 게임에서 어느 여자가 이득을 본다면 다른 여자가 항상 손해를 보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녀 자신의 가족까지 포함해서 어떤 여자든 경쟁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훗날 샤넬의 인생에서 자주 반복되었다. 샤넬을 계속해서 기혼 남성과 불륜 관계를 맺었고, 그녀가 유혹했던 남자 중에는 친구나 고객을 포함해 그녀가 가까웠던 여성들의 남편도 있었다.
ㆍ샤넬은 임시로, 그리고 은밀하게 매춘하며 운을 시험해보려던 시기가 있었다.
ㆍ코코 샤넬은 마구간 일꾼다운 걸쭉한 입담으로 말을 탈 때 자세를 제대로 유지하는 비결을 털어놓았다. "소중한 불알 두짝을 차고 있다고 상상해야 해요! 샤넬은 이렇게 말하면서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쥐었다. 그 위로 몸무게를 싣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그 뒤로 평생 샤넬은 남자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의 덕을 톡톡히 봤다.
ㆍ샤넬은 대세를 거스르는 자기만의 직감을 따르고 발장의 말 사육사들처럼 꾸며 입으면서 처음으로 패션 열풍을 일으켰다.
ㆍ여성들이 샤넬의 모자를 쓰고 다니자, 세간의 이목을 끄는 다른 아가씨들도 샤넬의 모자를 탐내는 일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처음에 코코 샤넬의 친구들은 매력적인 새모자를 어디서 구했냐는 질문을 받자 대충 파리에 있는 모자 가게라고 둘러대며 거짓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샤넬의 이름을 털어놓았다. 별안간 샤넬에게 자그마한 사업이 생겼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샤넬이 사업을 만들었다. 샤넬의 성의 침실에서는 모자 사업을 운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게를 내고 싶어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후원자, 에티엔 발장에게 달려갔다.
ㆍ그 운명이란 바로 임신이었다. 만약 샤넬이 낙태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불법 낙태 시술은 샤넬이 평생 불임이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 함께 디자인하다: 코코 샤넬과 아서 에드워드 ‘보이’ 카펠
ㆍ샤넬은 카펠의 사랑과 후견 덕분에 '코코 샤넬'로 태어났다. 카펠은 샤넬의 정신을 일깨웠고, 샤넬의 몸을 흥분으로 가득 채웠고, 샤넬이 생각하도록 가르쳤고, 샤넬에게 사업 감각을 불어넣었고, 샤넬에게 예술과 문학, 정치, 음악, 철학을 알려 줬다.
ㆍ발장은 샤넬에게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었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도 지원해 주었다. 그는 샤넬에게 중요한 기회의 창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카펠은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보이 카펠은 코코 샤넬을 이해할 수 있었다.
ㆍ샤넬은 카펠의 격려에 힘입어 다른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재능 있고 미래가 유망한 사람,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카펠은 샤넬을 진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게 대했고, 샤넬의 심술궂고 상스러운 유머, 부족한 학식, 심지어 나쁜 시력까지 지적했다. 그는 샤넬에게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읽어 볼 만한 책을 주었다. 샤넬은 카펠의 가장 냉정한 비판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ㆍ카펠은 남다른 안목으로 코코 샤넬을 꿰뚫어 보았고, 샤넬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ㆍ모자는 여전히 샤넬의 사업에서 비중이 컸지만, 샤넬이 입고 다니는 톰보이 스타일 옷도 샤넬의 가게에서, 더 정확히는 샤넬의 가게들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ㆍ코코 샤넬은 분명히 보이 카펠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카펠은 샤넬에게 무슨 말을 했든, 샤넬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펠은 사고가 개방적이었고 샤넬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시대와 계급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샤넬과 함께 공공장소로 외출하는 일을 자제했고 예술가나 지식인 친구 일부에게만 샤넬을 소개했다. 카펠은 샤넬의 존재를 감춰서 사회적 평판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도 자유롭게 만나고 다녔다. 코코 샤넬은 카펠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의연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ㆍ'나는 정말로 별안간,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유명해졌다.' - 코코 샤넬
ㆍ샤넬은 전통을 공공연히 조롱한다는 평판을 얻었다. 샤넬은 그저 옷을 입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도 발명해 내고 있었다. 여성들은 샤넬이 마법처럼 불러낸 해방 판타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샤넬의 옷을 입는 일은 샤넬을 입는 일, 코코 샤넬의 개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샤넬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만, 곧 모두가 샤넬을 닮아갔다.
ㆍ샤넬이 만든 옷은 노출이 심하지도 않았고 노골적인 성적 요소도 사실상 없었다. 하지만 샤넬의 옷은 명백히 관능적이었다. 샤넬이 신체의 단순한 물질성, 즉 옷 아래 놓인 살과 근육과 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샤넬은 이렇게 말했다. "옷이 예뻐 보이려면, 그 옷을 입는 여성이 반드시 그 옷 아래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
ㆍ샤넬은 디자이너 경력 내내 신체의 자유를 강조했다.
ㆍ사고방식이 크게 전환되자, 의복 문제를 넘어서서 여성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여성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샤넬은 그녀만의 신선하고 남다른 페르소나, 독립적인 커리어 우먼이라는 정체성을 펼칠 길을 열어 주었다.
ㆍ샤넬의 디자인은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서 코르셋을 박탈하기도 했다. 샤넬의 고객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샤넬의 저지 드레스를 입으려면 코르셋을 입을 수 없었다.
ㆍ여전히 카펠은 성장하고 있는 샤넬 제국의 주요 투자자였다. 그는 샤넬에게 그녀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시장과 고객을 이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한 번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ㆍ옷의 가격은 코코 샤넬 자체와 관련 있었다. 샤넬은 자기 자신이 옷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우쳤다.
ㆍ샤넬은 자기가 카펠에게서 빌려 쓴 돈을 완전히 다 갚자 그가 충격을 받았다고 모랑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장난감을 사 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자유를 사 주었소."
ㆍ카펠은 샤넬에게 단지 돈을 빌려줬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돈보다 더 귀중한 것을 제공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브랜딩'이라고 부르는 것, 즉 상품이나 개인, 주장에 관해 지속적이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와 서사를 만들어 내는 기술에 대한 직관을 제공했다.
ㆍ어떤 이들은 샤넬과 카펠의 성을 하나로 묶기 위해 'C' 두 개가 포개져 있는 그 유명한 로고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ㆍ카펠은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들은 오랜 혼외관계, 즉 실패한 결혼 생활과 불편한 휴전을 맺고 수년간 공존하는 관계를 유지한 듯 하다.
ㆍ카펠이 탄 차는 돌진해서 배수로에 처박혔고 불길에 휩싸였다. 카펠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카펠이 죽자 샤넬은 깊은 비탄에 빠졌고, 부모님을 잃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견될 만한 공허함을 느꼈다.
4 드미트리 대공
ㆍ샤넬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과의 연애를 깎아내리곤 했고, 2년간 이어졌던 이 사랑은 잠시 이국적 취향에 빠졌던 탓이었다고 설명했다.
ㆍ샤넬은 로마노프 황실에 빠져 있던 시기에 평생 막대한 부와 명성을 거머쥐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또 다른 혁신 두 가지를 창조했다. 하나는 샤넬의 첫 번째 향수인 샤넬 No.5였고, 다른 하나는 이름의 첫 글자 'C' 두 개가 포개져 있는 로고였다.
ㆍ샤넬은 이제 막 태동한 파시즘과 그 상징에 분명히 매력을 느꼈고, 나치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데까지 나아갔다. 샤넬은 갈수록 반동주의와 국수주의에 이끌렸으며 자주 심각한 반유대주의자들과 어울렸다. 샤넬의 작품은 계속해서 포퓰리즘과 군국주의, 일종의 자발적인 귀족주의가 기묘하게 뒤섞인 방향으로 진화했다.
5 내 심장은 주머니 속에 있다: 코코와 피에르 르베르디
ㆍ샤넬이 평생 가깝게 지냈던 지인은 극소수에 가깝다.
ㆍ샤넬은 1919년 르베르디와 만나 로맨스를 시작했다. 그해 샤넬은 결혼한 극작가 앙리 베른슈타인과 잠깐 만났을 것이고, 그 직후 드미트리 로마노프 대공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도 사랑에 빠졌다. 샤넬은 바쁘게 연애 사업에 매달리며 보이 카펠을 잃은 슬픔을 떨쳐 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샤넬은 권력 있는 남성이 수많은 여성과 만나는 방식으로 한꺼번에 여러 남성을 정복해 나갔다.
6 여성 친구들, 모방 전염병, 파리의 아방가르드
ㆍ마리아의 변신 과정은 샤넬이 여성들과 우정을 쌓아 나가는 전형적인 방식을 잘 보여 준다. 샤넬은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여성들을 매료했고, 마지 도장을 찍듯 그들에게 자기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새겨 놓았다.
ㆍ샤넬이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이 모방 전염성, 여성들의 마음속에 그녀를 모방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힘 덕분이었다.
ㆍ샤넬은 여성복을 만드는 일에 6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지만 여성을 멸시했다. "여자는 질투심 더하기 허영심 더하기 수다 더하기 혼미한 정신 상태와 같아요."
ㆍ코코와 미시아 세르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공범이 되어 파리에서 함께 외식하고 오페라를 보러 다녔다. 둘은 가끔 우정을 더 극적으로 과시하고 위해 똑같은 샤넬 의상을 입고 쌍둥이처럼 꾸몄다.
ㆍ거울처럼 서로를 비췄던 코코 샤넬과 미시아 세르는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변함없이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았다. 둘 다 언제든 상대방을 먹어치울 준비가 되어 있는 굶주린 짐승이었다. 서로를 향한 이토록 강렬한 욕망은 어느 정도 성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미시아 세르가 샤넬과 동성애 관계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샤넬은 끝까지 함구했고, 전기 작가들은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말년에 샤넬과 세르는 서로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아주는 습관을 공유했다.
7 『보그』에 실린 안티고네: 샤넬이 모더니스트 무대 의상을 만들다
ㆍ샤넬은 고대를 떠올리게 한느 아름다운 의상을 창조해냈다.
ㆍ샤넬은 공연 의상을 제작할 때면 거의 언제나 노골적인 무대의상을 포기하고 누구나 샤넬의 옷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는 쿠튀르 의상을 개조하는 독창적인 관행을 고수했다.
8 벤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내
ㆍ샤넬이 거절할수록 벤더는 더 매달렸다.
ㆍ'호사스러움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해요. 그 대신 반드시 느껴져야 하죠. 럭셔리는 안팎을 뒤집어서 안락의자에 던져두는 코트 같은 거예요. 안이 바깥보다 더 가치 있죠.' - 코코 샤넬
ㆍ샤넬은 빠른 속도와 호사스러움을 모두 누리는 삶을 계속 이어나갔다.
ㆍ샤넬은 요트를 타고 지중해를 여행하며 올리브 빛깔 피부를 구릿빛으로 태워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일광욕 열풍을 일으켰다. "공작과 함께 크루즈를 타고 여행했더니 피부가 집시처럼 탔어요. 원래 언제나 태양을 피했던 제가 이번에는 햇빛에 저 자신을 방치했던 거죠. 그런데 그날 밤, 피부색 덕분에 치아가 빛나 보였어요. 또 저는 생기로 가득 차 보였죠. 바로 그때부터 여성들이 일광욕을 시작했답니다."
ㆍ샤넬이 과거를 부정하며 허세를 부려봤자, 진실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그녀가 열망했던 왕족의 세계와 여전히 그녀의 내면에 남아 있던 시골 소녀 사이에 놓인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틈은 다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9 럭셔리의 애국심: 샤넬과 폴 이리브
ㆍ폴 이리브를 만났을 때 샤넬을 48세였고, 막 웨스터민스터 공작과 헤어진 후였다.
ㆍ샤넬은 자기 자신을 진정한 예술가로도 재창조했고, 모더니즘 운동에서 가장 밝게 빛났던 예술가들과 계속해서 우정을 맺고 함께 작업했다.
ㆍ'나는 돈을 빌려 주는 것보다 그냥 주는 것이 더 좋다. 어차피 나가는 돈은 똑같다.' - 코코 샤넬
ㆍ샤넬과 이리브는 드비어스에서 의뢰받아 다이아몬드 주얼리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가장 중요한 공동 작업을 계획하면서 가까워졌다.
ㆍ이리브는 샤넬에게 청혼했다. 하지만이리브는 중증 심장마비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0 역사의 박동: 샤넬과 파시즘,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절
ㆍ온 세상이 샤넬이 스파츠와 가벼운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도, 그녀가 간첩 활동을 했다는 사실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할 본이 제시한 증거는 샤넬이 어느 정도로 나치 활동에 개입했는지, 그리고 샤넬의 지위가 얼마나 공식적이었는지 보여줬다. 샤넬은 나치에서 암호명과 요원 번호를 부여받기까지 했다.
ㆍ샤넬은 파업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직원 3백 명을 전부 단박에 해고했다. 그녀는 노동자의 권리와 노사 협상이라는 개념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샤넬은 직원들이 자기 덕분에 생계를 꾸릴 수 있었으니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심과 감사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의 권리와 노사 협상이라는 개념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오래전 젊었던 가브리엘 샤넬이 양복점 뒷방에서 바느질하며 쥐꼬리만 한 박봉을 받던 시절, 파업은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녀가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얻기 위해 시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샤넬은 스스로 그 자리까지 올라갔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기를 바랐다.
ㆍ파시즘 운동은 장식과 동일시, 초월성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조종하는 방법이나 마케팅을 포함해서 핵심 전략 일부를 패션 산업과 공유했다.
ㆍ히틀러 그 자신도 여성 패션에 안목이 있었고 그가 만났던 여성들이 멋스럽게 차려입는 것을 좋아했다.
ㆍ샤넬은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었고, 자식도 없었으며, 공개적으로 애인과 동거하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사실상 그녀는 출산 장려 운동 지지자와 파시스트가 개탄했던 ‘슬픈 캐리커처’를 상징했다. 게다가 샤넬은 그녀를 모방하는 광신적 숭배 집단을 만들었고, 유럽 전역의 여성에게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이중 C 로고로 낙인을 찍었다. 코코 샤넬은 파시즘이 매도했던 근대 여성의 수호성인이었다.
ㆍ카리스마 넘치는 모든 독재자처럼 샤넬도 군중과 관계를 맺는 법을 통달했다.
ㆍ패션은 집단에 형태를 제공하고, 그 집단을 품은 세상에 공동적 시각적 서명을 보여주고, 마을과도시, 국가의 겉모습을 만든다. 샤넬은 이 근본적인 역설을 파악했다.
ㆍ샤넬이 상상한 이상적 존재는 중성적이고 심지어 레즈비언 같은 시크함을 특징으로 삼았다.
11 사랑, 전쟁, 스파이 활동
ㆍ샤넬은 오래전부터 피카소에게 홀딱 반했었지만, 샤넬과 피카소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마 둘이 너무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둘 다 통제하고 군림하려 들었고, 툭하면 화를 냈고, 유혹하는 데 능했다. 샤넬은 피카소에 관해 "그는 제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 사람 때문에 저는 겁에 질렸었죠."
ㆍ샤넬과 페노사가 연애를 시작했다. 페노사는 피카소에 비해 더 손에 넣기 쉬운 정복 상대였다.
ㆍ샤넬은 폐업 결정에 관해 단 하나의 일관된 설명을 제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ㆍ샤넬은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약물 사용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으며, 집에서 스스로 약물을 주사했다. 투여량이 얼마였든지 간에, 약물의 특성과 수년간 사용한 이력을 생각해 보면 샤넬의 몸은 틀림없이 세돌에 중독되었을 것이다.
ㆍ샤넬은 약을 끊지 않았고 페노사는 떠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둘은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
ㆍ'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모호했다. 감지하기 어려운 독이 우리의 가장 선한 행동마저 타락시켰다.' - 장 폴 사르트르
ㆍ'재산은 쌓아두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 코코 샤넬
ㆍ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첩자 혹은 정보원으로 활동했을 현실적인 그리고 충격적인 가능성이 폭로됐다.
ㆍ샤넬은 가족을 구한다는 임무를 넘어서까지 나치를 위해 노력했다. 나치가 내세운 대의명분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ㆍ샤넬이 해야 할 임무는 마드리드로 가서 독일에 매우 유익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 전부였다. 나치에서 공식적으로 요원번호 F7124와 암호명 웨스터민스터를 부여받았다.
ㆍ코코는 여왕처럼, 처형대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행동했죠.
ㆍ샤넬은 기소를 모두 피했지만 그녀의 나치 협력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얼마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샤넬은 아무 탈 없이 스위스로 돌아갔다. 이 소송 절차를 보도한 언론도 없었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샤넬의 넉넉한 재정 형편 덕분에 역사적 사실이 삭제될 수 있었다.)
12 세상에 보여 주다: 샤넬이 복귀하다
ㆍCOGA 샤넬이 전쟁 후에 세운 신탁 재단 ( 코코와 가브리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ㆍ'마음속에로는 한 번도 은퇴한 적이 없어요.' - 코코 샤넬
ㆍ샤넬은 과거에도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패션쇼를 5일로 잡았다. 샤넬에게 5는 언제나 행운의 숫자였기 때문이다.
ㆍ샤넬은 패션쇼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의 반감을 감지했고, 쇼가 끝나자 방문객을 피해 위층으로 물러갔다. 하지만 유럽 언론은 샤넬이 거대하고 극도로 중요한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듣자, 논조를 상당히 부드럽게 바꾸었다. 샤넬이 기존 스타일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며 쏟아냈던 불평은 샤넬의 '한결같음'데 대한 찬가로 바뀌었다.
ㆍ샤넬은 겉으로는 다른 여성들을 비난했지만, 사실 그녀가 정말로 공격하는 대상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이었다.
ㆍ샤넬은 단순함과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특유의 능력에 의지한 덕분에 과거의 지위를 다시 얻었다.
ㆍ샤넬이 성형 수술의 도움을 받아서 유지했을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은 그녀의 복귀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ㆍ샤넬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개조했다. 샤넬은 순전히 직감을 따른 것처럼 가장 강력한 국가와 동맹을 맺고, 그곳의 문화에 녹아들고, 전 세계에 그 문화를 퍼뜨렸다. 추축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던 여자가 이제는 다름 아닌 승리를 거머쥔 연합국의 편에 섰다. 모든 일이 용서받았다. 혹은 그저 잊혔다.
ㆍ샤넬은 어떤 품질이든 자기 작품의 모조품을 환영했다.
ㆍ샤넬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절대로 벗지 않았다. 샤넬은 사계절 내내 날마다 같은 슈트를 입었다.
ㆍ샤넬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갈수록 소식했고, 160cm의 키에 몸무게가 45kg 정도 나갔다.
ㆍ샤넬이 가장 신랄하게 말했던 대상은 동료 디자이너들이었다. 다만 그녀가 재능이 훌륭하다라고 평가했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만은 예외였다.
ㆍ뮤지컬 <코코>에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을 줄 알았던 샤넬은 실망했다. 캐서린 햅번으로 결정되었다. 샤넬은 뮤지컬 <코코>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ㆍ샤넬은 무엇보다도 뇌졸증 떄문에 자기가 늙고 허약해 보일까봐 겁냈다. 샤넬은 체면을 유지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고용해서 매일 아침 호텔 객실로 불렀다. 그녀는 코코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완벽하게 꾸미고 차려입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ㆍ샤넬이 가장 골치 아파했던 증상은 몽유병이었다. 어느 밤, 샤넬이 옷을 제대로 입지도 않고 리츠 호텔 로비에서 발견되자 마침내 샤넬의 직원들이 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그때부터 샤넬이 밤에 세돌을 주사하고 나면 마르캉과 셀린이 샤넬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묶었다. 샤넬은 저항하지 않았다.
ㆍ"사람은 이렇게 죽나 봐." 샤넬은 숨을 거뒀고, 샤넬의 얼굴에 눈물에 젖어 있었다.
ㆍ샤넬의 진정한 부활은 1983년이 되어서야 부활했다. 55세의 독일 출신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를 아트디렉터로 임명했다.
ㆍ"존경은 창조가 아니죠. 샤넬은 잘 알려진 명물이에요. 그리고 그런 명물은 창녀처럼 다뤄야 해요." - 라거펠트의 우상 파괴 정신은 샤넬 하우스에 충격과 활기를 주었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절제'를 폐기했다. 하지만 덧없이 사라지는 새로움에 열정을 보였으면서도, 샤넬을 샤넬답게 만드는 불후의 특징을 절대로 경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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