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켄트 대학과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수학한 후 런던에서 작품을 쓰고 있다.
인생의 황혼 녘에 비로소 깨달은 삶의 가치 그리고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허망함과 애잔함을 내밀하게 그려 낸 <남아 있는 나날>은 영국 귀족의 장원을 자신의 세상 전부로 여기고 살아온 한 남자 스티븐스의 인생과, 그의 시선을 통해 근대와 현대가 교차되면서 가치관의 대혼란이 나타난 1930년대 영국의 격동기를 작가 특유의 문체로 풀어내고 있다.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여인과 아버지, 그리고 30년 넘게 모셔 온 달링턴 경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말해 준다.
프롤로그 1956년 7월,달링턴 홀
ㆍ요 며칠 사이에 나의 상상을 붙들어 온 그 여행을 정말 감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패러데이 어르신의 안락한 포드를 타고 나 홀로 즐기게 될 여행, 잉글랜드의 수려한 산하를 거쳐 서부 지방으로 나를 데려다 줄 여행, 그리고 예상컨대 무려 닷새나 엿새 동안 나를 달링턴 홀에서 떼어 놓을 여행이다. 이 여행의 발상 자체가 패러데이 어르신의 지극히 고마운 권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ㆍ전반적으로 볼 때 이 여행을 떠나지 못할 큰 이유는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첫날 저녁 솔즈베리
ㆍ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그때 노인은 그저 웃자고 그랬던 것 같다. 즉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나는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ㆍ객관적인 관찰자로 하여금 영국의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만족을 주는 풍경으로 꼽게 만든다고 믿으며, 이 특징을 가장 잘 요약한 말이 있다면 '위대함'이란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이 땅을 Great(위대한) Britain 이라 부르는 것을 두고 좀 건방진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풍경 하나만으로도 그 숭고한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ㆍ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의 '결핍', 바로 그 점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땅 자체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ㆍ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ㆍ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집사로 산다는 것은 무슨 판토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쩍 밀거나 약간만 비틀거리게 만들어도 가면이 떨어져 내려 가면 뒤의 배우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말이다.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ㆍ진정한 의미의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으며 그 외의 나라들에는 실제로 사용되는 칭호가 무엇이든 오직 하인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이따금 듣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대륙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들이기 때문에 집사가 될 수 없다. 오직 영국 민족만이 할 수 있다.
둘째 날 아침 솔즈베리
ㆍ어쨋거나 나는 내가 볼 때 아주 하찮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실수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내가 지금 가려는 길이 그 '문제'가 수면에 떠오르기 전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처음에는 이 사소한 문제들이 다소 걱정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ㆍ“스티븐스, 이 집은 유서 깊고 웅장한 진짜배기 영국 저택이오. 안 그렇소? 내가 돈을 지불한 것도 그 때문이지. 그리고 당신도 진짜인 척하는 얼간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통적인 영국식 진짜배기 집사요. 틀림없는 진품이다 이거지.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것이고 또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오, 안 그렇소?”
ㆍ내 인생의 남은 부분을 어떻게 유용하게 채울 것인지 비록 알지 못하지만, 남은 내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
둘째 날 오후 도셋 주, 모티머 연못
ㆍ'위대한 집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숙고해 보지 못한 어떤 총체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ㆍ나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믿는데, 우리 세대는 세상을 사다리가 아니라 '바퀴'와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ㆍ지금까지 30분가량 머리에 스쳤던 생각들은 좀 더 철저하게 파고들 수 있는 것은 바로 고요한 환경 덕분임은 물론이다.
셋째 날 아침 서머싯 주,톤턴
셋째 날 저녁 데번 주,타비스톡 근처 모스콤
ㆍ당시 우리에게 세상은 이 저명한 저택들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바퀴였으며, 거기에서 내려진 막강한 결정들이 부자든 가난뱅이든 바깥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간다고 생각했다. 우리 중 직업적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 힘닿는 대로 이 중심축에 다가가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ㆍ자신의 지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열망하는 집사라면, 남들 앞에서 결코 쉬지 않는 법이다.
ㆍ어쨌거나 때늦은 깨달음에 의지해 과거를 뒤져 보노라면 그러한 전환점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게 마련이다.
ㆍ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ㆍ큰 문제들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차원이게 마련이어서 우리 분야에서 진정 이름을 떨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기 영역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최선임을 꺠달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 문명 사회의 운명을 실제로 좌지우지하는 저 위대한 신사들에게 가장 훌륭하게 봉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넷째 날 오후 콘월 주, 리틀컴프턴
ㆍ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실망스런 사태에 대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ㆍ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여섯째 날 저녁 웨이머스
ㆍ“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ㆍ그녀의 말에는 여러분도 짐작하겠지만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슬픔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실제로 그 순간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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