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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영원한 낙서 / 트레바리

by mubnoos 2025. 1. 3.

아름답고, 영원한 낙서

'씀'의 에세이

 

학창 시절, 나는 종이 위에 펜으로 낙서하는 것을 즐겼다. 친구들과 뛰어놀거나 대화하는 것보다 책상에 혼자 앉아 낙서하는 것이 더 편하고 좋았다. 낙서는 교실에 있으면서도 다른 곳에 있을 수 있게 하거나, 다른 사람과 있어도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은밀하고 합법적인 일탈이기도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음악을 들으며 생각나는 것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다가 정류장을 놓치는 일도 종종 있을 정도로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뭔가를 알고 싶었을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었을까? 둘 다 아닌 것 같다. 그냥 그랬던 것 같다. 다른 특별한 의미없이 단지 무엇인가를 쓰거나 그리고 난 뒤, 그것을 보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종이 위에 질서정연하게 쓰인 글씨들은 어딘가 아름답다. 칸트가 대칭과 균형을 제1의 아름다움으로 정의했다면, 종이 위의 차분하게 배열된 글씨 조합 역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낙서를 좋아했던 이유는 낙서를 통해 나만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읽는 것은 타인의 것이고, 우리가 쓰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다. 결국 내가 쓰는 것만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 쓴다는 것은 나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보지 않으면 확실히 알 수 없고, 보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글을 쓰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쓰지 않고는 생각할 방법이 없다. 뇌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은 뇌의 전파를 정리해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목표를 분명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룰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쓴다는 것, 또는 쓰여진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그 의미를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쓰여진 글은 영원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유한한 존재가 만든 것들 중에 유일하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죽은 시체를 붕대로 감싸고, 피라미드에 보관하며, 거대한 스핑크스로 지키려 했지만, 결국 시간의 유한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파피루스 위에 남긴 문자들은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Word became Flesh)”라는 구절이 있다. 어쩌면 생명도 결국은 시간이 쓴 문자들의 조합(DNA)이고, 삶은 그 문자들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우리 몸에 새겨진 DNA라는 문자 조합은 영원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기적인 철자 조합을 전달하기 위해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죽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한성 속에서 무언가 영원한 것을 찾으려 한다.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는 그 영원함과 관련이 있다. 쓰는 행위는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우리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우리를 기억하게 만들고, 시간이 흘러도 우리 생각과 감정은 그곳에 남아 다른 이들과 교감하게 만든다. 어쩌면 글쓰기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흔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