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고 있고, 어느 방햐으로 가야할지 불투명한 상태
만일 신이 전능하다면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을 영원한 진리라고 선포함으로써 신을 제약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는 예정된 확실성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각자의 열정을 탐닉하고 각자의 이기주의를 좇으면 될 것이다.
1. 사회과학의 탄생
사회과학은 18~19세기에 나타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함께 나타난 학문 분과였다. 특히 근대가 태동한 이후 진리만 추구하고 선을 추구하지는 않는, 그래서 가치중립을 부르짖는 ‘과학’의 특징을 사회과학에 밀어 넣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이는 어거스트 콩트(A. Comte)가 사회과학 중 하나인 사회학(sociology)을 ‘감각적, 경험적으로 파악되는 것만이 지식이라는 실증주의’에 기반을 두어 정립해 나갔던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사회과학의 여타 분과학문인 정치학, 경제학에서도 다르지 않았으며, 이와 같은 법칙 정립적인 학문 기조의 귀결은 과학적인 것만이 학문이었어야 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때 월러스틴이 말하는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사회과학의 위기란, 기존의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했기에 그와 더불어 탄생한 사회과학도 위기를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는 무엇이고, 어떻게 위기에 처했는가?
2. 자유주의 시대와 위기
자유주의는 18~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 20세기 초중반의 수정 자유주의,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른 내용들이지만, 핵심은 개인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에 대한 내용들이다. 주목해봐야 할 점은 자유주의의 탄생 배경이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자는 것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즉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이며, 이때의 개인은 합리적이고 유능한 개인이다. 왜냐하면, 국가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개인이 계몽되면 합리적일 수 있음에도 '애초부터 왕족들은 모든 인간 중에서 뛰어나다'라는 생각을 하는 비합리적이고 덜 유능한 기존 국가의 권력을 가진 기득권 집단보다, 합리적인 개인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가 더 이치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합리적이고 유능한 개인이라는 제한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말인데, 계몽주의가 설파하듯이 모든 사람이 능력을 평등하게 가지기는 했지만, 교육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권력 소유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자유의 권리에도 배제와 차별이 존재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계몽하라’를 외치며, 우리들과 같이 일정한 합리성이 인정되면 같은 자유를 누리도록 해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비합리적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자유를 누린다면, 유능하지 않았던 과거의 기득권 집단들처럼 분명 그릇된 선택을 할 것이라는 사고를 기본 전제로 두었다. 따라서 만인이 권력을 가진다면, 그들이 힘겹게 이뤄낸 자유의 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차별과 배제를 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고, 또 합리성 기준에 따른 포섭을 통한 자유 부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별과 배제는 사회 양극화를 심화 시켜서, 체계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등의 위험 계급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즉 평등에 대한 요구가 급속도로 퍼져서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반체계운동도 결국엔 자유주의 진영의 양보와 연합, 담론 구분에 포섭되어버려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월러스틴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주도했던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급진주의 이데올로기가 모두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라는 권리를 얻어낸 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행위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또한 증명했어야 했다. 즉 '자연이 필요에 따라 더 나은 것으로 진화한다'라는 진화론과 같이 그들의 행위가 사회 전체의 진보를 이끌어냈어야 했는데, 이를 사회 내의 자유시장과 자본축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자본주의가 팽창되던 당시는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자본으로 해결 가능했었고 자본축적은 필수적 행위로 간주되던 때였다. 한편, 자본축적은 막스 베버(M. Weber)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달성하여 신의 구원을 받는 것에서 중요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은 유럽에 팽창하는 자본주의를 개인의 경제적 자유, 즉 자본축적하는 행위를 최대한 허용하도록 노력하여, 자본주의의 팽창 속도를 어마어마하게 키우고 세계를 자국에 유리한 자본축적 구조로 확고히 하려 했다.
그런데 합리적인 개인들이 이기심으로 자유로운 경제 행위를 하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해준다는 아담 스미스(A. Smith)의 말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차츰 신앙 수준으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즉 합리적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줄수록 개인들은 자유로운 경제행위를 통해 개인, 사회 전체에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경제학의 논리와 거기에 따르는 자동 조절적 시장에 따라 자본축적을 실제로 달성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경제학은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로서 달성 불가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따라서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팽창과 자본축적을 함포와 총, 칼을 들이대며 강제적∙폭력적으로 해냈다. 여기에서 그들이 어떻게 그런 권한의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가? 이것은 그들이 합리적이고 그 외의 사람들, 비유럽 국가들이 비합리적이었기에, 그들을 계몽하게 해주고 자유를 알게 해준다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다시금 정당화시킨다. 즉 세계는 우월한 서양인들에 의해 진화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인위적인 행위로 자본축적을 통한 사회 후생의 증진이 이루어져 ‘이전 사회보다는’ 전체적인 면에서 풍요롭게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진화론처럼 사회도 진화하는 것처럼 보여, 자유주의적 시장을 중심으로 앞날은 진보만이 있다는 ‘발전주의’가 강해졌다. 특히 이 자유주의적 발전주의는 20세기에 들어 확고한 이데올로기로서 자리 잡고 여러 민족국가들의 성장에 사회동력으로써 기능하였다. 그런데 자유주의의 반대 진영에 있던 구좌파 공산주의 진영이 자유주의에 포섭당하면서 80년대부터 점차 그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고, 결정적으로 대표주자였던 소련이 91년에 해체되면서 오히려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즉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만 남은 지금 이 시점에서 국가 발전은 미미할뿐더러 더욱이 경제 위기는 더 자주, 더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진보는 항상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깨지기 시작하였다.
3. 사회과학의 위기
그 와중에 사회과학은 어떠했는가? 사회과학은 자유주의적인 현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사회를 설명하려는 움직임에서 출발하였고, 자본주의가 만연해지는 사회를 다른 이념들이 비판하면서 그 깊이를 더해갔다. 하지만 다른 이념들은 계속해서 자유주의에 포섭되고 이념이 학문화되어 대학 내에 학문 분과를 만들면서, 현 자본주의를 하나의 이상향으로 삼고 각 학문분야가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따로따로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자본주의에 문제가 생기면 전문성을 띤 각 학문들은 그 모순점들을 열심히 조정하고 수정했으며, 이제 인간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현재 체계에 안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으로 그럴 듯 해지게 되었다. 그리고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가 이루어 낸 위대한 자본주의가 있는데, 왜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느냐고 분석하고 조언하고 소리치지 않는가? 그리고는 마지막에 읊조린다. 다시 균형으로 되돌아오자고.
하지만 체계는 ‘역사적’이고 균형은 예외적이라고 월러스틴은 말한다. 즉 이 체계의 역사가 끝나는 시점은 반드시 올 수밖에 없고, 현재의 역사적 체계가 끝나면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체계가 새 시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인 구좌파가 몰락한 것에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점점 더 각박해지는 현재 상황을 보면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더욱 강력한 사회 양극화 속에서 상위계층에 속하려는 발버둥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뿐이다. 상위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더 진보하려 하기보다는 계속하여 축적하고 보호하고 강화할 방법만을 찾는다. 하위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진보하려는 목표를 상위계층에 안착하는 것에 둠으로써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다. 실상 오늘날의 사회 발전은 진리를 향한 진보가 아닌, 현 체계 내에서의 불확실한 희망에 기대어 위태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사회과학은 자본주의라는 현재 세계체계에 너무나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월러스틴은 여전히 진리만 추구하고 선은 분리해내면서, 계산 가능하기 때문에 계산하는 형식 합리성의 풍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어느 순간 약화되고 새로운 세계체계가 나타나게 되면, 사회과학자들은 부랴부랴 그에 맞는 분석과 예측을 내놓지만, 이는 이전의 체계로 다시 회귀하려는 구시대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계를 이상적으로 두고 균형을 회복하려는 학문의 성격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미래시대에 어느 순간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사회과학은 이제 예전의 명성은 찾아볼 수 없는 '비디오 플레이어'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어디 비디오 플레이어에 들어갈 비디오는 차치하고서라도 비디오 플레이어 자체를 요즘에 쉽게 구할 수나 있는가? 이렇듯 정교한 분석 도구를 만들어 놓으면 물론 지금을 분석하기에는 너무나 좋다. 하지만 미래에는 그 유용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하드웨어화 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소프트웨어화 시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실천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4. 사회과학이 나아가야 할 길
월러스틴은 우리가 아는 세계, 즉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종언하는 만큼, 사회과학의 새 출발을 위해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주장한다. 그는 먼저 현재 사회과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진리와 선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한 지금 우리의 진리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며, 보편적 진리가 있다면 복합적∙모순적∙다원적이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과학은 목적인(진리, 선)을 이해하기 위해 작용인(사회변화, 사회문제)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속에서의 도덕과 지식계급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사회과학은 이런 ‘새로운 기조’를 갖출 때 비로소 이전의 차별, 배제의 문제가 극심해지는 자유주의적 발전주의를 궁극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이후 새로운 역사적 체계가 도래했을 때에도 유용한 학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월러스틴은 현재 새로운 학문에 대한 모습이 이미 보이고 있다고 하면서, 복잡성 연구와 문화 연구를 예로 든다. 복잡성 연구의 핵심은 시간의 화살과 확실성의 종언을 두고 있고, 문화연구의 핵심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문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때 사회과학은 이 두 연구를 포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하면서, 앞서의 새로운 기조를 기반으로 한 학문을 전개한다면 위기 해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의 주장은 그 자신의 강력한 확신에서 오는 주장이지만, 약간은 과도한 확신에서 오는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논의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가치가 있다. 한 마디로, 총체적 위기는 왔고 이전과는 다른 해결책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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