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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 구병모

by mubnoos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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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는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한때 과일이었던 것. 수명이 다한 것, 분해되어 형태와 본질을 잃고 일부 흔적만이 자기가 왕년에는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였음을 강력히 그러나 사뭇 안쓰럽게 주장하는 유기화합물엥 대한 시선의 발아는. 

 

 

ㆍ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이 소설은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파과’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1. 부서진 과일, 흠집 난 과실이 그 첫 번째 의미이고,

2. 여자 나이 16세 이팔청춘, 즉 가장 빛나는 시절을 뜻한다.

우리 모두 깨지고 상하고 부서져 사라지는 ‘파과(破果)’임을 받아들일 때, 주어진 모든 상실도 기꺼이 살아내리라 의연하게 결심할 때 비로소 ‘파과(破瓜)’의 순간이 찾아온다. 이처럼 소설 『파과』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다.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조각은 새삼스레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게 된다.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는 모든 것,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조각의 마음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파과』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다.

 

 

 

 

 


 

 

 

 

ㆍ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명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ㆍ열차가 완전히 멈추고 압력이 가득 찬 밥솥의 콕을 젖힌 것처럼 문이 열린다. 스크린도어 위치가 약간 어긋나게 대어져 있다. 

 

ㆍ몸도 마음도 오래 나둔 국수처럼 불어터진 것 같다. 

 

ㆍ중요한 건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지.

 

ㆍ손톱을 단정하게 자르고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는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부피와 질량을 감추는 수백 가지 소극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다. 철저하게 검박한 손톱은 고무찰흙에조차 상처를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여 손톱 주인에게 내재한 공격성을 가리는 역할도 한다. 

 

ㆍ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이.

 

ㆍ대부분의 방역은 이런 식이다.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왜 누군가의 안에서 구제해야 할 해충이나 소탕해야 할 쥐새끼가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또한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데에 대해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뢰인이 고위직이나 요인일수록, 방역 대상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입장을 가진 자일수록 '왜'는 언제나 수락된 채 업자에게 전달된다. 그의 죽음으로써 누가 무슨 이득을 취하는지, 그의 죽음이 창출하는 이윤을 방역업자는 계산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죽음과 함께 요동치는 주가라든가 사회 경제 문화의 크고 작은 변화를 목격하면서 비로소 의뢰인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고 무슨 이유로 그런 의뢰를 했는지 역추적으로 짐작하며 대부분 음모론이 그 과정에서 비롯하지만, 그조차도 까마귀 날고 배 떨어지지 않았단 법도 없으니 짐작 이상의 촉을 가동하지 않는다. 

 

ㆍ그들이 너를 보면 안락사를 시킬 거란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주인의 시체를 먹은 개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판단도 그렇고, 변질된 고리를 먹었으니 사람들에게 세균이나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염려... 하지만 무엇보다... 아무도 거기까지는 말 안 할테지만... 네가 너무 늙어서 누구도 너를 맡으려 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렇다.

 

ㆍ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것들이 세상에서 두번째로 싫어. 물론 첫번째는 이 짓 시키면서 돈도 없는 것들이지만. 

 

ㆍ요즘 폐지 값이 똥값 돼서 이렇게... 한 50키로 되나, 가면 한 3천 원 나오나 그래요. 1키로에 6,70원 나온다고 보시면 돼. 세끼 밥 먹고 살 만하면 안 하시는게 나을걸.

 

ㆍ월급쟁이란 으레 상사의 암흑의 루트 같은 건 모른 척해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대담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딸과 부모를 생각했을 적에 철새처럼 옮겨 다니기도 벅차거나 귀찮아서인가. 

 

ㆍ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ㆍ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그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ㆍ유괴당한 아이가 72시간 넘게 살아 있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하지. 

 

ㆍ힘든 줄은 아는데, 그냥 오래된 게 익숙해서 그래요. 노인네들 특징이 그렇지. 다른 거 필요 없어. 시간도 그렇고.

 

ㆍ기억이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아마 듣지 않으면 결국 모르고 말아버릴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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