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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 김원일

by mubnoos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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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할 수 있다. 

 

 

 

 

1장 ‘푸른색으로 본 슬픔과 가난’
: 파리의 입성과 그의 어린 시절, 그리고 막스 자코브와의 교유.

ㆍ'나는 예술이 슬픔과 고통에서 싹튼 것이라 생각한다. 슬픔은 명상에 적합하고, 고통은 삶을 기반으로 한다. - 피카소

ㆍ자신의 재능과 실력에 자신만만해했던 피카소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그린 <자화상> 머리 위에 '나는 왕이다'란 말을 세 번이나 휘갈겨놓았다. 16세에 이미 스페인의 주요 공모전을 휩쓴 그로서는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장애물을 없으리라 기고만장했다. 

 

ㆍ정물화가이자 미술학교 소묘 교사였던 아버지는 자식이 어릴 적에 이미 놀라운 재능을 알아보았고 자신의 실력이 아들에 비해 일천함을 깨달았을 정도다. 

 

진정한 예술가는 일찍이 세상에 없던 것, 새로운 그 무엇을 독창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의미 있는 낯선 하나를 새롭게 보탤 수 있어야 한다. 

 

ㆍ착상은 출발점일 뿐이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기 시작해보아야 한다. - 피카소

 

ㆍ'내가 만약 이 그림을 그린다면?' 하고 가정했을 때, 피카소의 두뇌 회전은 다른 화가들보다 몇 배는 빨랐고 시각적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한 번 본 그림을 결코 잊지 않았다. 

 

ㆍ피카소의 여성관은 여자는 암컷의 성기를 가진 존재이기에 눈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체면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골라잡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ㆍ'모든 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색을 지닌다.' - 피카소

 

ㆍ작업이 나에게는 곧 휴식이다. - 피카소

 

ㆍ자유분방하고 돌연한 행동으로 친구들을 놀래주기를 좋아했던 피카소는 스페인 한류객이 파리 구경 나왔듯 그렇게 허랑방탕한 나날로 보내지는 않았다. 피카소의 장점은 쉼 없는 작업을 통한 자기 확인과 발전의 모색에 있다. 그는 평생 '일의 노예'가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화가로서의 천직에 마소처럼 충실히 일했다. 그에게 노동은 끝이 있을 수 없었다. 쉬지 않고 그렸고, 그림 한 점이 완성되면 이젤에 새화판을 얹어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ㆍ예술과 가난은 실과 바늘이야. 숙명적인 관계인 셈이지.

 

ㆍ피카소는 무정부주의자였다. 

 

ㆍ화가에게 눈은 생명이다. 

 

 

 

 

2장 ‘슬픔을 따뜻하게 껴안기’
: 분홍빛시대로서 ‘세탁선’ 시절의 가난과 첫 연인 올리비에 페르낭드, 그리고 거트루드 스타인과의 만남.

ㆍ성공이란 항상 대중에게 아첨하는 자만이 누리는 것이라고 어디에 쓰여 있는가? 나는 타협하지 않고 어떤 난관에 처하더라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ㆍ파블로는 큰아버지의 이름에서, 피카소는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왔다. 

 

ㆍ피카소가 처음 배운 말은 '피스(비둘기)'였다고 한다. 

 

성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예술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소위, 예술에 대한 숭고한 사랑만으로 작업해야 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점잖게 말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예술가는 성공할 필요가 있다.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작품을 지속적으로 창작해나가기 위해 그렇다. - 피카소

 

 

 



3장 ‘현대미술의 시발점, <아비뇽의 아가씨들>’
: 경쟁자이자 이해자였던 마티스와의 만남과 <아비뇽의 아가씨들>, 아프리카 원시미술에 경도되었던 때를 다룬다.

ㆍ고독은 그들의 불행이며 동시에 축복이었다. 이해받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있을까? 이해받기가 원래 불가능함에도, 만약 이해를 받는다면 더더욱 위험하다. 인간은 늘 오해를 받아왔다. 인간은 고독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지만, 그럴수록 실제로는 더 고독해진다. 

 

ㆍ피카소의 세탁선 작업실은 온갖 잡동사니로 난장판이었다. 세워진 화판과 잡다한 물건들로 몸 돌릴 틈조차 없는 공간에 개와 고양이, 심지어 거북이와 원숭이도 데리고 살았으며, 밤에는 쥐까지 설쳐댔다. 

 

ㆍ무엇보다 피카소의 인간적인 결점은 유아독존의 오만함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주위에는 좋든 나쁘든 칭찬 일변도의 아부꾼만 모여들었다. 피카소는 자기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과는 상종하려 들지 않았다. 비판의 쓴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자기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통설에는 피카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기 작품의 비공개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선대의 그림이나 당대의 그림 중 배울 만한 점이 있으며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그의 의견을 듣지 않고, 혼자 이를 깨달아 자기 작품에 이용할 장점을 찾아냈다. 

 

ㆍ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려야 하지 않을까? 피카소는 이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ㆍ피카소가 성공의 길로 들어선 뒤, 그는 세간의 입방아질을 받을 만큼 '경제인 화가'로서의 면목을 과시하기도 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피카소의 그림 값이 차츰 높아지자 그는 자신의 이름값까지 계산하여 본격적으로 흥정에 나섰다. 파리 생활 초기에 겪은 혹독한 궁핍의 체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1910년대 중반에 이미 그의 그림 값은 파리의 어느 화가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최고로 호가였으며, 피카소는 그 수준에 걸맞게 자기 그림 값을 산술적으로 냉정하게 따졌다. 

 

ㆍ화가는 대상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동적인 생명력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피카소는 생각했다. 

 

 

 



4장 ‘브라크와 함께 연 위대한 입체주의’
: 브라크와 함께 열었던 입체주의 시절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입체주의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당시의 미술 경향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올리비에 페르낭드와의 결별과 에바를 만난 것, ‘곰의 가죽’ 경매에서 보여준 피카소의 작품에 대한 찬사, 제1차대전의 발발과 입체주의와의 결별을 담고 있다.

ㆍ우리가 입체주의를 만들 때는 의도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고 우리 내부에 있던 것을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5장 ‘명성과 돈을 바퀴로 달고 질주’
: 장 콕토, 러시아 발레단과의 만남으로 새롭게 펼쳐 보인 신고전주의를 이야기한다. 여기에 큰 몫을 하는 것은 <퍼레이드>를 둘러싼 당시의 반응과 친구들의 변호이다. 결혼하여 첫 아이를 얻게 된 올가와의 만남도 빠지지 않았다.

ㆍ헤어짐에 있어서 피카소는 냉정했고, 돌아설 때는 칼로 물 베는 게 아니라 쇠톱으로 강철을 자르듯 끊어낼 수 있음 또한 피카소의 기질이었다. 그런 냉정함이 있었기에 그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싸우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6장 ‘초현실주의도 현실이다’
: 초현실주의자들과의 만남이 펼쳐진다. 그리고 네 번째 여인 마리 테레즈와 그녀로 인해 촉발되었던 관능과 서서히 드러나는 미노타우로마키의 공격성도 있다.

ㆍ발전이란 단어가 잘못 사용되는 데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나는 발전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할 뿐이다. 예술에는 미래도 과거도 없다. 

 

ㆍ피카소는 먼저 여자를 겁탈하고 그 다음에 그 여자를 그렸지요. 상대가 나든 다른 누구든, 언제나 그런식이었어요. 피카소는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점령할 때 그녀 스스로 몸을 맡기고 싶어 하도록 감미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솜씨가 없었다. 피카소의 논리로는, 그 폭력적 욕망이 발산이야말로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기에 순수하다고 주장을 되풀이할 터이다. 피카소가 테레즈를 겁탈한 것은 너무 사랑하기에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순수한 열정의 발로라고 변명할 수 있으리라.

 

ㆍ화단의 비난이 쏟아졌으나 피카소는 침묵했고, 태연했다. 오히려 그런 비난을 즐기듯, 그는 인체를 인체가 아니게, 더 극심하게 변형시켜나갔다. 회화에서 가장 신성하게 받아들여지던 여성의 아름다움을 무차별 공격하며 이를 상상 속의 괴물로 해체시켰으니 붓을 통한 해부학, 그 둔갑술이야말로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ㆍ예술가는 모든 걸 잊고 작품에만 매진할 수 있어야 하며, 안정된 생활에는 절대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 피카소

 

ㆍ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야말로 이상적인 섹스 파트너였다. 

 

 

 

 

 



7장 ‘양심의 무기로서 <게르니카>’
: <게르니카>로 대변되는 피카소의 조국 스페인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연인이자 동지였던 도라 마르와의 사랑도 포함된다.

ㆍ피카소는 줄무늬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곧잘 어릿광대짓을 하여 좌중을 웃겼다. 손에 든 검은 칫솔을 윗입술에 가져다 개곤 파시스트 히틀러의 연설 흉내를 내어 주위의 폭소를 유도하기도 했다. 

 

 

 

 

 

 



8장 ‘전쟁 전후와 <한국에서의 학살>’
: 프랑스 공산당의 입당과 발로리스에서의 작업을 중심으로 그가 보여준 ‘전쟁’과 ‘평화’ 이미지를 살린다.

ㆍ병에 대해서는 가히 공포증 환자인 피카소는 엄살도 대단했다. 

 

ㆍ피카소는 나치에 일체 타협하지 않은 채 칩거했고, 심정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나치의 수사망에 쫓기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금전적 지원이나 피난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행동대원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ㆍ피카소는 나치에 의해 '퇴폐 작가'로 지목되어 일체의 작품 제작과 공개가 거부되었다. 

ㆍ피카소는 공산주의자였기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자연스럽게 북측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학살

 

 

 

 

 



9장 ‘영과의 말년, 92세에 붓을 놓다’
: 마지막 반려자 자클린느 로크와의 사랑과 명화 재해석을 중심으로 그의 말년을 묘사한다. 그리고 매 장마다의 끝에 주요 작품을 별면으로 놓아 해설과 함께 작품에 대한 김원일의 감상을 적었다.

ㆍ피카소는 신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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