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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다쓰루

by mubnoos 2022. 3. 17.

 

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과 핵심 사상을 한자리에서 만난다!

 

 

들어가는 말

 

ㆍ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ㆍ지성이 스스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물음 아래 밑줄을 긋는 일'입니다. 

 

ㆍ'알기 쉽게'라는 것이 '간단하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1장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

 

ㆍ포스트구조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구조주의를 상식으로 간주하는 사상사적 관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아직 구조주의가 상식인 시대에 머물러 있으며 거기서 빠져나올 만한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지금 내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자체가 '구조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상식이 된 어떤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편견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자각 자체가 구조주의가 안고 있는 중요한 단면입니다. 

 

구조주의란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파헤친 것이 구조주의의 성과입니다.

 

 

마르크스, 헤겔

 

ㆍ인간은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사고방식을 '계급의식'이라고 한다. - 마르크스

 

ㆍ보편적인 인간성이라는 것은 없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의 사회관계에서 '현재 상태의 긍정', 즉 '존재하는 것, 행동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인간은 행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그 창조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생산관계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을 매개로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기본적 인간관입니다. 

 

ㆍ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객관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노동에 의해, 오직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이 '자연적 존재자 이상의 것'이 되려면 인위적인 대상을 만든 후여야 합니다. 

 

ㆍ헤겔이나 마르크스 모두 '자기로부터의 괴리 = 조감적 시야'의 확보는 단순한 관상이 아니라, '생산=노동'에 몸을 던짐으로써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노동하는 사람만이 '나는'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ㆍ관계망 속에 던져진 사람은 거기에서 만들어진 의미나 가치에 따라 자신이 누군인가를 회고적인 형태로 알게 된다.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헤겔과 마르크스로부터 20세기의 사고로 계승된 것입니다.

 

ㆍ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ㆍ마르크스는 인간 주체가 자기가 누구인가를 '생산=노동'의 관계망 속 '행동'을 통해 사후에 알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했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가 '자기는 무언가를 의식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화할 수 없다는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니체

 

ㆍ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외적 규범의 노예에 불과하다. - 니체

 

ㆍ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 니체

 

ㆍ홉스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배틀로얄)

 

ㆍ니체에 따르면 대중사회란 구성원들이 무리를 이루어 오로지 '이웃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바탕이 되는 사회를 가리킵니다. 니체는 비주체적인 군중을 '짐승의 무리'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단 하나의 행동 준칙은 '타인과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도덕은 무엇보다 사회의 균질화를 지향합니다. 

 

ㆍ상호참조하여 이웃사람을 모방하고 집단 전체가 한없이 균질화되어가는 것에 깊은 희열을 느끼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노예'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노예가 상호모방의 포로라고 한다면, 귀족은 자기의 외부에서 참조할 항목이 없는 자립자입니다. 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자, 행동하기 위해 외적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귀족입니다. 

 

ㆍ니체의 '초인'은 구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초극'이라는 운동성 그 자체인 듯 합니다. 다시 말해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존재자 = 노예' 라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감수성,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제2장 창시자 소쉬르의 등장

 

소쉬르

 

ㆍ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사상사적으로 구조주의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구조주의의 아버지)

 

ㆍ'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 - 소쉬르

 

ㆍ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사물이 그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라면 명명되기 이전의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게 소쉬르의 생각입니다. 

 

ㆍ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 소쉬르

 

ㆍ소쉬르가 가르쳐준 것은 어떤 것의 성질이나 의미, 기능은 그 사물이 그것을 포함한 관계망, 또는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자치하고 있는가에 따라 차후에 결정된다는 것으로 사물 자체에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ㆍ우리가 마음이나 내면이나 의식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언어를 운용한 결과, 나중에 얻게 된 언어 기호의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즉 내가 말할 때 그 말이 국어의 규칙에 속박되고 규정된 어휘로 이루어진 한 우리가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타인으로부터 얻은 것이 되며, 그때 내가 말한다라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말해지는 것의 기원은 대부분 나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나의 정체성은 내가 하는 말을 통해서 차후에 알려진다고 했는데, 말 그대로 내가 한 말 조차 그것을 구성하는 사실의 대부분이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니. 그렇다면 이때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일까요?

 

20세기 초반 제네바 대학교의 어느 작은 교실에서 한 명의 언어학자(소쉬르)가 강의한 이론은 그 후 프라하학파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양한 문예 사상 운동과 이종배합을 하면서 사상의 수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1920~1930년대의 동유럽, 러시아를 중심으로 두드러진 이 새로운 학문적 지식의 파도 속에서 구조주의가 생성됩니다. 이 새 물결의 세례를 받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친 프랑스의 전후세대는 구조주의의 ‘제3세대’에 해당됩니다. 이 사람들(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에 의해 그때까지 언어학에 한정되어 있던 구조주의 이론은 단숨에 다양한 인접 영역으로 전개되었고 곧바로 보편적인 지적 위상을 획득하게 됩니다.

 

 


구조주의의 4총사

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문화인류학)

2)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

3) 롤랑 바르트 (기호론)

4) 미셸 푸코 (사회사)

 

 


제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

미셸 푸코 (사회사)

 

ㆍ'지금-여기-나'를 역사의 진화에서 최고 도달점, 필연적인 귀착점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푸코는 '인간주의'라고 부릅니다. 

 

푸코의 사회사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권력’이라는 말을 단순히 ‘국가권력’이라든지, 그것이 조종하는 각종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실체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권력’이란 모든 수준의 인간적 활동을 분류하고, 명명하고, 표준화하여 공공의 문화재로 지의 목록의 등록하려고 하는 ‘축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 비판론이라고 해도 실질적으로 열거하고 목록화해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부여하는 한 그것 자체가 이미 ‘권력’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ㆍ고통은 만인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회 모든 시대에 동일한 강도나 동일한 형태, 동일한 고통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역치에는 개인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제4장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

 

롤랑 바르트 (기호론)

 

바르트가 탐구한 것은 ‘어법의 각인이 찍힌 질서에 대한 어떤 노예적 복종에서 해방된 순수한 에크리튀르’, 즉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고 그저 거기에 우뚝 서 있는 순수한 언어라는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에크리튀르의 영도, 순수한 에크리튀르란 희망·금지·명령·판단 등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순백의’ 에크리튀르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르트가 평생에 추구한 언어의 꿈이었습니다.


ㆍ'텍스트'란 직조된 것'입니다. 

 

 

 


제5장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문화인류학) / 사르트르

 

레비스트로스의 결론은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명인’과 ‘미개인’은 그 관심을 갖는 방법이 다를 뿐, ‘문명인’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미개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명은 각자가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부분이 있다’고 준엄하게 충고합니다. 자기가 ‘문명인’이고 세계의 구성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인’의 그런 오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ㆍ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실존주의에 실질적인 사망선고를 내리게 됩니다. '의식'이나 '주체'에 대해 말하기를 그치고 '규칙'과 '구조'에 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명실상부한 '구조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ㆍ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등의 실존 철학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이론을 접합한 것입니다. '실존한다'라는 동사는 말의 뜻만 보면, '바깥에 선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존립의 근거가 되는 발판을 '자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두는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 점만을 보면 '인간을 생산=노동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을 매개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헤겔-마르크스주의와 기본적인 틀이 같습니다. '실존'이라는 학술용어는 일단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실마리로서,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ㆍ'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ㆍ1952년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에서 사르트르는 역사의 이름으로 카뮈를 고발했습니다. "자네가 자네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싶다면 자네는 변화해야만 해. 그러나 자네는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하고 과거 절친한 동지였던 카뮈에게 사상가로서의 사망선고를 내렸습니다. 

 

ㆍ실존주의는 이렇게 한번 배제했던 '신의 관점'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뒷문으로 끌어들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비난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주체는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서 자기형성을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청지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정치적 올바름'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계에 이르러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결별하게 됩니다. 

 

ㆍ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의 결론은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ㆍ우리는 모두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인 리얼한 세계이며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세계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깔봅니다. 자기가 문명인이고 세계의 구성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역사'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ㆍ사르트르는 '역사'를 궁극적인 재판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미개로부터 문명으로, 정체에서 혁명으로 진행되는 단선적인 과정 위에서 모든 인간적 삶의 영위의 '옳고 그름'을 판정합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사르트르가 '역사'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역사적으로 옳은 결단을 내리는 인간'과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멜라네시아의 야만인'이 그들의 독자적인 잣대로 '자기들'과 '주변 사람들'을 구별하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행위입니다. 

 

ㆍ인간의 본성은 '증여'에 있다.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 싶다면 타인으로부터 증여를 받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여와 답례의 운동을 일으키려면 먼저 자기가 그와 동일한 것을 타인에게 주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증여의 기본 규칙이다. 

 

ㆍ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두 가지 규칙

1)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

2)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

 

ㆍ'남자는 다른 남자로부터 그 딸 또는 자매를 양도받는 형식 외에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대발견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간 장치입니다.

 

 

 

 


제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

 

ㆍ솔직하게 말하자면 라캉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난해함 때문이겠지만 라캉에 대해 쓴 해설서나 연구서의 대부분은 그를 다른 구조주의자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ㆍ'프로이트로 돌아가라' - 라캉

 

ㆍ거울 단계 이론이란 라캉이 1936년에 발표한 것으로 주체의 형성에서 거울에 비친 영상이 지닌 결정적인 중요성을 해명한 것입니다. 거울 단계란 유아가 생후6개월이 되면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마침내 강렬한 희열을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과연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요? 아이는 '나'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거울 단계는 '일종의 자기동일화로서, 즉 주체가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 주체의 내부에 일어나는 변용으로 이해' 됩니다. 

 

ㆍ인간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가정하는' 것에 의해 '나'를 형성한다는 '외상'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 

 

ㆍ모든 자기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듯이 피분석자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진실을 포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