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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 / 미하일 일린

by mubnoos 2021. 1. 28.

제1부 선사편 I

 

다리, 목, 이빨의 선택과 변이라는 이 커다란 일이 이루어지는 데는 몹시 오랜 세월-거의 5천만 년쯤 걸렸다. 그러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변화를 거쳤을까? 바다와 육지 사이의 벽도, 숲과 평야 사이의 벽도, 영원한 벽은 아니다. 바다는 말라 붙기도 하고 육지를 채우기도 한다. 평야가 사막이 되는 일도 있다. 바다의 주민은 때로는 물가로 기어 오르고, 숲의 주민은 때로는 평야의 주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위의 자연에 매여 있는 사슬을 끊고 자기의 작은 세계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동물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동물은 사슬을 끊은 다음에도 자유롭게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우리를 나와서, 다시 다른 우리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숲에서 평야로 나간 말은 숲의 동물 처지를 면하고, 그 대신 평야의 동물이 되었다. 뭍으로 올라간 물고기는, 변이를 통해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자신이 끊어버렸다. 바다로 되돌아가려면 다시 한 번 변화해야만 한다. 뭍의 동물이 바다로 들어갈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24

 

강물에 흘러 드는 어느 지류의 물도 한 방울의 헛됨이 없는 것처럼 이들 세대의 노동도 무익하게 끝나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의 노동은 요즘 사람들의 노동과 일체가 되어 사람의 경험이라는 강물 속에서 합쳐졌다. 우리는 강의 원류 쪽으로, 우리의 모든 일의 시초 쪽으로 다가갔다. 일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사람은 이렇게 태어났다. 사람과 원숭이를 격리시킨 길고 긴 세월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노동이 사람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유명한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107

 

 

 

 

제2부 선사편 II

‘소나무 시대’는 ‘떡갈나무 시대’로 바뀌었다. 한 숲의 주인은 타인에게 그 자리를 양보했던 것이다. 어느 집에도 저마다의 주민이 있었다. 활엽수와 더불어 관목, 버섯, 딸기 종류가 그들을 좋아하는 동물들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해 갔다. 149

 

개는 산속에서 나그네를 살려 냈으며, 싸움터에서 부상병을 운반해 냈고, 집을 지켰고, 국경을 수비했다. 개는 집에서도 사냥에서도 전투에서도 학문연구소에서도 충실히 사람에게 봉사하고 있다. 개는 과학을 위해서, 인류의 이익을 위해서, 학자의 손으로 수술대 위에 놓이게 될 때도 신뢰에 찬 눈길을 학자에게 보낸다. 그것은 주인에게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자의 눈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파블로프 연구소에서는 학자들이 뇌의 작용을 연구하는데, 그 건물 앞에 커다란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우리의 충실한 네 발 달린 친구의 명예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154

 

 

 

 

제3부 고대편 I

우리는 바빌로니아인과 마찬가지로 원을 360도로 나누고 1년을 12달로 나눈다. 현재 1주일이 7일인 것은 바빌로니아인이 일곱 개의 행성을 알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달과 태양도 행성으로 보았다. 이후 프랑스인이 월요일을 달의 날, 화요일을 화성의 날, 수요일을 수성의 날, 목요일을 목성의 날, 금요일을 금성의 날로 부르게 되었다. 또 영어에서 토요일은 지금도 토성의 날이 된다. 영국인과 독일인이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부르는 까닭은 고대 셈족의 바빌로니아인이 그렇게 칭한 것을 따랐기 때 문이다. 시계의 글자판을 보면 기호와 선, 즉 12시간과 60분 표시가 되어 있다. 하루와 한 시간을 이렇게 나눈 것도 역시 바빌로니아인이었다. 256

 

옛날엔 사람이 조상의 땅에서 평생을 살고 조상의 신앙을 굳게 지켰었다. 그런데 바다는 사람과 신들을 뒤섞어 버렸다. 세계를 다니면서 온갖 것을 보거나 듣게 되었다. 신들의 이야기만 하더라도 천차만별이었다. 예를 들어, 이디오피아의 신들은 살갗이 검고 주먹코였으며, 트라키아 신들은 머리칼이 붉고 눈이 파랬다. 어째서 그리스인만이 옳고 이디오피아나 트라키아인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263

 

대체 탈레스는 어째서 물을 모든 물질의 근원이라고 보았을까?? 그는 만물의 근원인 재료를 자연 속에서 찾았다. 그러다가 물을 가장 알맞은 재료로 찾아냈던 것이다. 물은 담긴 그릇에 따라 어떤 모양으로도 된다. 그러고 보면 물은 어떤 물질의 모양으로도 될 수가 있는 게 아닐까? 물은 유동적이다. 세계가 운동으로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물은 모든 것에 생기를 준다. 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다.

 

물은 물질의 근원이고 또한 그것으로 돌아가는 재료이다. 세계에는 아무 것도 생겨나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소멸되는 것이 없다. 물질은 쉴새 없이 변화되고 있지만, 무로부터 나타나는 일도 없고 또한 사라져 없어지는 일도 없다. 학문의 최초의 말 속에서 학문의 마지막 말을 보고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질 불멸의 법칙’이 아닌가? 267

 

크세노파네스는 다시 키타라를 손에 잡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신들과 사람들 중에서 가장 거룩한 단 하나의 신은 모습이든 지혜이든 사람과는 닮지 않으리. 이 신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듣고 계시므로, 그분은 모든 것의 세계를 지배하리. 그분은 한곳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으리. 장소를 바꾼다는 것은 그분에게 어울리지 않으므로.” 크세노파네스는 새로운 신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다. 자연이 영원하듯이 신은 영원했다. 공간이 무한이듯 이 신은 무한이었다. 자연이 하나인 까닭에 신은 하나였다. 신이란 모든 것이었고 온 자연, 온 우주였다. 275

 

헤라클레이토스는 새로운 이름을 찾았다. 노모스’ 즉 법칙이라 이름을 붙일까? 아니면 ‘코스모스’, 즉 우주의 질서로 할까? 또는 법칙과 말과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로 할까? 새로운 사상을 낡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로고스’라는 말이 가장 확실하게, 전세계의 법칙에 대한 생각을 전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법칙은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자연도 사람의 이성도 그 지배 아래 있었다. 293

 

엠페도클레스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물과 불과 흙과 공기의 네 원소라고 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들 원소에서 만들어졌다. 그것들의 결합에 의해 물건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의 분리에 의해 물건은 없어진다. 어느 것 하나도 없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또 어느 것 하나도 무에서 생겨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죽음이니 삶이니 하고 부르는 것은, 결합과 분리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러하다. 하나에서 많은 것이 생겨나고, 많은 것에서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298

 

데모크리토스의 아트마는 분해되어 없어지는 일이 없는 오늘의 원자와는 다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데모크리토스가 올바르게 밝혀낸 것이다. 운동은 영원하다는 것, 우주는 무한하다는 것, 세계는 여럿이라는 것, 가장 순응성이 강한 동물만이 살아남는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333

 

자유와 진리와 자연에의 지배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차츰 험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이제 자유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는 노예 제도와 함께 얻어졌던 것이다. 사람은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진리에로의 길은 미신과 편견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의 부를 자랑했다. 그러나 부는 빈곤과 손을 맞잡고 찾아왔다. 사람은 쇠를 얻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쇠로 쟁기뿐 아니라 칼도 만들었다. 사람은 다 위에 과수원을 일구고 올리브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뒤에 그것을 잘라 내고 불사르기 시작했다. 사람은 바다의 파도를 정복하고 바람을 부려 배를 달리게 했다. 바다의 지배자가 된 사람이 가라앉힌 것만큼 많은 배를 파도와 바람이 가라앉히지 는 않았다. 346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같은 시대 사람들의 완전히 달라진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가 쓴 ‘전쟁사’에 다음과 같은 어두운 글이 나온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신의 규칙도 사람의 규칙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가 그때까지는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행하던 것을 드러내 놓고 하며 부끄럽게 여기질 않았다. 신에 대한 두려움도 사람의 규칙도 구속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모두 똑같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신을 존경하든 존경하지 않든 마찬 가지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저질러도 재판에 벌을 받을 때까지 살아 남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눈앞의 두려움이 미래의 두려움을 잊게 했다. 그래서 너나없이 죽음에 붙잡히기 전에 인생에서 뭔가 거머쥐려고 했다. 248

 

학문은 수공업자에게만 필요하다. 양갓집 자제는 영혼과 전쟁에 필요한 것만을 알 일이다. 368

 

소피스트들은 모든 사람에게 외부적인 진리는 없다. 사람의 수만큼 의견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증명 하려 했다. 그러나 진리를 옹호하면서 그들은 아직도 영구불변의 환상의 세계인 이데아 세계에 진리를 살게 한 것이다. 일찍이 과학과 종교는 한 몸뚱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 뒤 과학은 종교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플라톤은 또 이 둘을 결합시켜 학문의 형태를 갖춘 종교를 만들어 내려 했다. 피타고라스 이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데아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초이며, 자연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관념론에 첫 실마리를 주었다. 플라톤 시대에서부터 철학에서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아직 그것이 계속되고 있다. 369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는 박차가 필요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당기는 고삐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육신이 없는 영혼, 사물 그 자체를 빼버린 사물의 집-있을 수 없는 꾸며낸 세계로 스승이 끌고 가려 하면, 이 제자는 고집을 부리며 완강히 저항했다. 372

 

형상을 질료에서 떼어내고, 그릇의 재료인 은에서 그릇을 떼어낼 수는 없다. 기술자가 손을 더할 때, 은은 그릇 모양을 갖는다. 그럼 뭐가 세계를 만들어 내는가? 아낙사고라스는 기술자가 그릇을 만들고 조각가가 상을 만들듯이, 자연에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지성이란 것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 자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이 에 대한 원인을 피해 지나가려 했다. 그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때에만 세계 창조의 기계로서의 ‘지성’을 끌어 내고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이러한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이것은 미움과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원소를 결합하고 미움은 분리시킨다. 또 레우키포스와 그 친구인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은 원자의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즉 형상과 질료 이외에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은 어디서 나타나는 것일까? 375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 BC450-380)가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교편을 잡고, 아르키메데스가 여기서 수학을 배우고 있었다. 왕들까지도 공부하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왔다. 프톨레마이오스왕은 에우클레이데스에게 수학으로의 가까운 길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에우클레이데스는, “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407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집듯이 로마는 십자가에 의지했다. 전에는 노예들을 처벌한 십자가였으나, 지금은 그 사형도구가 제국의 깃발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로마의 멸망을 막아주지는 않았다. 십자가는 남고, 로마의 사제는 자신의 권력을 자랑할 것이었다. 이렇게 로마제국은 숨이 끊어져가고 있었다. 노예제도는 그 생애를 끝냈다. 그것은 죽음의 병이 되었으며, 그것에 걸려 제국은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를 그 병에서 도와줄 수 없었으며, 또한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478

 

 

 

 

 

제4부 고대편 II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농노였다. 노예는 노동을 싫어하지만, 농노는 노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농노는 반 또는 3분의 1의 주인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튼 주인은 주인이었다. 그들은 영주와 자신을 위해 손을 쉬지 않고 일했다. 노예에게는 자신의 것이 하나도 없지만 농노에게는 자신의 연장이 있었다. 그들은 쟁기와 괭이의 손질을 잊지 않았다. 프랑스나 독일의 숲속에 외딴 섬처럼 떠있는 영지에서는 농노의 노동이 가장 중요했다. 494

 

9세기에 키릴로스라는 수도사가 그리스의 도시 살로니카에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러시아어도 할 수 있는 학자였는데, 우연히 흑해 연안의 도시 코르스니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러시아인 집에서 러시아 글자로 쓰여진 복음서와 시편을 보았다. 이것은 키릴로스의 전기로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떤 글자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 글자 대신 키릴로스는 다른 알파벳을 고안했다. 키릴로스는 슬라브인을 위해 성경 번역 부탁을 받았다. 그것은 훨씬 전부터 모라비아인이 그리스인에게 부탁했던 일이었다. 키릴로스로서는 손에 익은 그리스 글자로 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래서 지금 슬라브인들을 위한 새로운 알파벳을 만듦에 있어서 글자의 대부분을 그리스 알파벳에서 빌려 썼다. 이 ‘키릴 글자’에서 오늘날 러시아 알파벳이 생겨났다. ‘키릴 문자’는 새로운 신앙, 새로운 성경과 함께 키예프에 전해졌다. 513

 

‘6일간’이라는 책을 읽고 독자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에 대해 알게 되었다. 4원소란 불 바람 물 땅을 가리키며, 그것이 맨 처음에 창조되고 다른 물질은 그 뒤에 이 4원소 에서 창조되었다고 했다. 다섯 번째 원소도 있다고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에 하늘 즉, 에테르를 덧붙였다. 하늘은 대지에서 팔방으로 똑같이 떨어져 ‘연기처럼’ 대지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대지는 구이며, 이쪽이 밤일 때 반대쪽은 낮이라는 것을 알고 러시아인들은 깜짝 놀랐다. 책은 일식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의 ‘울타리’가 되었을 때 일식이 일어나며, ‘지구의 차단’으로 월식이 일어난다. 522

 

이슬람교는 성전을 세계 정복을 부르짖었다. 이리하여 세계 정복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번엔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서 시작되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아라비아인의 눈에는 다섯 개의 큰 나라가 있었다. 서쪽에는 ‘루마의 왕, 전사의 왕’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황제이다. 로마, 즉 비잔티움 옆에는 ‘왕의 왕, 보석 왕’의 영토가 있었다. 풍요로운 페르샤 국가이다. 북쪽 초원에는 ‘말의 왕, 즉 터키 칸’의 지배하에 있는 터키인의 기마족 대군이 우 글거리고 있었다. 동쪽에는 ‘만민의 왕, 예술과 통치의 왕’ 즉, 중국 황제가 있었다. 남쪽 인도에는 ‘코끼리의 왕, 지혜의 왕’이 있었다. 이것이 아라비아인이 메카에서 본 세계였다. 528

 

레반트(동쪽 지중해 연악의 여러 나라)의 여러 도시…야파, 안티오키아, 카에사레아 등에서는 유럽의 말이 때때로 귀에 들리게 되었다. 이슬람교 사원의 뾰족탑과 아울러 종탑이 시리아의 뜨거운 하늘에 솟아있었다. 무에진의 외침 소리가 종소리와 섞였다. 그 무렵 북방의 자유도시 뤼벡에서는 노브고로트의 상인들이 발뒤꿈치까지 이르는 긴 털가죽 외투를 입고 운두 높은 모자를 쓰고 자기들의 러시아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이들 외국 상인들도 또한 다른 나라에 살면서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고향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 생활을 했다. 세계는 남쪽으로도 북쪽으로도 넓어져 갔다. 548

 

러시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한 늙은 수도사는 이렇게 예언했다. 지금까지 두 개의 로마가 있었다. 첫 번째 로마는 신앙심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두 번째 로마, 즉 비잔티움은 터키인의 폭력 때문에 붕괴되었다. 세 번째 로마, 즉 모스크바는 흔들림 없이 서 있다. 따라서 네 번째 로마는 있을 수 없다! 590

 

상인과 공장주는 부자가 되었다. 부유해진 피렌체의 모직물 공장 주인은 자기 자신이 기계 앞에 설 필요가 없었다. 그를 위해 몇십 명의 고용인이 일을 했다. 피렌체에서는 이런 고용인들을 ‘치온피’, 즉 누더기라고 불렀다. 공장에 있는 새로운 값진 기계는 주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이익은 모두 주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런데 치온피(직 조공)에게는 아침부터 밤까지 북을 움직이는 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치온피는 굶주리고 있었다. 치온피는 폭동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것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도시 의 권력은 돈 많은 상인과 주인들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피렌테의 봉건세력은 훨씬 전에 무너졌다. 지금 여기서 왕후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왕후가 아니라 상인과 은행가였다. 602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 그는 책상을 대하고 쓰기 시작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사람의 값어치에 대해서였다. ‘천지의 온갖 법칙을 인식하고, 천지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천지의 위대함에 감격하듯이, 신은 창조의 마지막 날에 사람을 만들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한곳에 묶어두지 않고 사람에게 일정한 일을 정해 주지도 않았다. 사람을 필요에 따라 속박함 없이 움직이는 능력과 자유의지를 주었다. 창조주는 아담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세계의 한가운데 놓았다. 거기서 너는 사방을 쉽게 볼 수도 있고 세계에 있는 것을 남김없이 볼 수도 있다. 너는 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죽지 않는 자도 아니다. 너는 지상의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상의 존재도 아니다. 자기 의지와 자기 명예에 걸어서 네가 자신의 창조자가 되고 조각가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너를 만들었다. 너는 동물이 될 수도 있고 신처럼 높아질 수도 있다. 짐승은 본디 있어야 할 모습으로 어머니 태 안에서 태어난다. 최고의 영혼은 본디 처음부터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을 하고 있다. 자기의 자유의지대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은 다만 너 뿐이지만…너는 너의 운명의 대장장이이다.” 608

 

사람들은 선조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계는 변하여 다른 것이 되려고 했다. 따라서 낡은 규범은 이미 사람들의 눈에 띄는 사물과 일치하지 않았다. 역사는 되풀이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되풀이하지 않는다. 산길은 차츰 높아지지만, 그 동안에 뒤로 돌아가기도 하고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도 한다. 올라가는 사람은 눈을 인 산꼭대기로 꽤 접근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산꼭대기는 도리어 낮게 멀어져 가는 것만 같다. 눈을 배경으로 전나무 숲이 톱니 모양의 성벽처럼 더욱 검게 똑똑히 보인다. 그러나 아까 건넌 골짜기의 작은 다리는 멀리 아래에 있고 훨씬 작아진다. 사방은 조용해지고 골짜기의 흐름소리는 거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610

 

제노바의 뱃사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46?-1506)는 카스틸랴 왕과 레온 왕을 찾아 에스파냐로 갔다. 또한 베네치아인 조반니 카보토(1425?-1498)는 영국의 브리 스톨에 조선회사를 세웠다. 콜럼버스는 돈 크리소토발 콜론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에스파냐의 제독이 되었다. 카보토도 역시 존 카보토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한 사람은 대양을 건너 서인도 제도에 닿았으며, 다른 한 사람은 몇 년 뒤에 북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인류는 이 두 해, 1492년과 1497년을 잊지 않을 것이다. 626

 

에스파냐인은 인디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아메리카에는 아직 말이 적었다. 그래서 에스파냐인은 짐을 운반하는 동물 대신 인디언을 사용했다. 긴 행군 때는 그 인부들이 포가도, 무거운 닻도, 배의 로프도, 모든 것을 둘러메고 가야만 했다. 인디언은 광산에서 은을 채굴하고, 에스파냐인의 영지에서 밭을 갈았다.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심한 벌을 받았다. 집과 함께 태워 죽이거나 개에 물려 죽었다. 에스파냐인은 사나운 불도그를 가지고 와서 사람 사냥을 가르쳤다. ‘토마로, 잡아라!’하고 명령하면, 불도그들은 금방 인디언에게 덤벼들어 목을 물었다. 인디언은 가엾은 비명을 지르며 손발로 개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단말마의 몸부림에 에스파냐인은 웃고 있을 뿐이 었다. 629

 

러시아인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진출했다. 상인 스트로가노프 집안은 카마강과 그 여러 갈래의 지류에 마을을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 ‘의용병’을 입주시켜서 소금을 만들고 재목을 벌채하고 처녀지를 개간했다. 대귀족이나 영주 밑에서 숲이나 초원으로 도망친 자유민 카자흐들이 스트로가노프 집안에 봉사하기 위해 찾아왔다. 당시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짜르에게 세금을 지불하는 동시에 영주에게 연공을 상납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금은 불어나기만 했다. 짜르에게는 군의 장비나 관리의 봉급을 줄 돈이 필요했다. 짜르는 군무에 복무하는 사람들에게 드보랴네라고 부르는 녹과전, 즉 토지를 주었다. 그러자 이 지주들은 그 땅의 농민을 뼈와 가죽만 남게 하고, 이번에는 그 대신 새 땅을 받아내는 악독한 짓을 했다. 오프리츠니크라고 하여 군주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군인 들은 반란을 가라앉히고 복종하지 않는 대귀족들의 세습 영지를 멋대로 짓밟았다. 물론 그 화를 입는 것은 농민들이었다. 농민의 밭은 말발굽에 짓밟히고 집은 불에 탔다. 강력한 국가는 저절로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그 댓가를 지불했다. 657

 

 

도미니쿠스회는 훨씬 옛날부터 신앙의 엄격한 수호자, 이단에 대한 맹렬한 공격자로서 알려졌다. 그것은 ‘성 종교재판’과 타고 있는 횃불을 입에 문 개의 얼굴을 그린 단기로 나타났다. 단원들은 하느님의 충견이 되어 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이단의 냄새를 맡아 냈다. 더욱이 그들은 가장 학문이 있는 수도사로, 까다롭고 알기 어려운 논문 중에 서도 이단의 사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천사적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교단의 사람이었다. 그는 ‘신학대전’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681

 

 

 

 

역자후기

 

‘인간의 역사’의 원제는 ‘인간은 어떻게 해서 거인이 되었는가?’이다. 전편인 선사편이 1940년, 후편인 고대편이 1946년에 발표되었는데 통틀어 10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된 역작이다. 전편은 일린이, 후편은 부인인 엘레나 알렉산드로브나 세갈이 많은 부분을 썼다. 그녀는 처음엔 일린의 조수로 있다가 1929년 그와 결혼, 병약한 그에게 좋은 협조자가 된 재능 있는 여성이었다. 700

 

이 책이 씌어진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일린은 당시 폐결핵으로 전선에는 나가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가?’하는 명제에 골몰하게 되었고, 결국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어 온 정열을 이 저서에 쏟게 되었다. 그는 자칫하면 진보나 발전만을 중시 하고, 도구를 가지고 생산만을 위해 진화하는 ‘인간의 역사’에 중점을 두기 쉬운 가치관에서 벗어났다. 진실로 인간적인 ‘거인의 걸음’이 특히 문제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은 진정한 명저로서의 참된 가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701